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4화 (54/250)
  • #54. 용호상박 (5)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정혜가 승합차에서 내렸다.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에 주변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음소거가 된 것마냥 그녀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함께 온 경찰들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모여든 사람들 탓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던 정혜가 고개를 살짝 들자 아는 얼굴들이 몇몇 보이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 대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오랜 친구 은주, 오다 가다 만난 주변 상점의 사람들까지.

    하지만 어디에도 중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라면 자신을 도와줄 거라 생각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그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달걀이 날아와 깨졌다.

    “에헤이, 거참. 이러지 마시라니까 그러네.”

    비릿한 냄새에 정혜의 귓속으로 그제야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을 죽였다는 사람들의 비난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 내가 안 죽였어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비난 소리에 묻혔고 경찰들의 손에 의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살던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형사님, 저 안 죽였어요. 남편을 제가 왜 죽여요?”

    “윤정혜 씨, 이미 진술했잖아요. 사람들 몰려드니까 이제야 겁이 나신 모양인데 어차피 실형은 피할 수 없어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현장 검증 마칩시다. 어이, 김 형사. 시작해.”

    남편과 함께 쓰던 방 안엔 남편을 대신한 마네킹이 누워 있었다.

    “그날 남편이 먹던 밥에 수면제를 탔어요. 그리고 남편이 잠이 드니까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번개탄을 방 안에 피운 겁니다. 그렇죠?”

    “수면제를 탄 건 맞아요. 맨날 술주정에 때리려고 드니까. 근데 번개탄은 아니에요.”

    하지만 김 형사가 방 안으로 불을 피우지 않은 번개탄을 가지고 들어오자 희미한 기억이 떠올랐다.

    바닥에 쓰러진 채 잠든 남편의 모습과 창문을 닫던 손길, 그리고 냄비 속에서 타고 있던 번개탄.

    정혜는 혼란스러웠다.

    정말 내가 남편을 죽인 건가? 남편을 죽여 버리고 만 건가?

    그때 정혜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사랑해, 정혜야. 사랑해.’

    바로 중기의 목소리였다.

    술을 마신 탓에 그날의 일이 드문드문 생각이 났다.

    남편이 죽어 버렸으면 그랬다면 미련 없이 중기에게로 갈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퍼뜩 떠올랐다.

    정혜는 혼란에 가득 찬 얼굴로 수갑을 찬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부녀자, 남편 살인 사건의 전말>.

    신복현은 민경우 작가의 이번 단막극을 벌써 세 번째 다시 보는 중이었다. 확실히 경우의 드라마는 다시 봤을 때 처음에 찾지 못한 복선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부녀자, 남편 살인 사건의 전말>은 한 남자의 자살이 사실은 타살로 밝혀지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아내 정혜가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남편, 쫓기듯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첫사랑 중기와의 재회, 거기에 정혜를 둘러싼 친구 은주와 집주인 아주머니의 이야기까지 펼쳐지며 사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이었다.

    “재밌네, 재밌어.”

    세 번을 봐도 확실히 재미있었다. 거기다 이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데도 전해지는 흥미진진함까지.

    불륜, 치정,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가득했으나 단순히 자극적이기만 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었다.

    심리적으로 옭아매는 스토리 전개에 보는 입장에서도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반전.

    신복현은 그의 재능을 느끼며 또 다시 좌절감을 느꼈다.

    “난 언제쯤 저런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그는 경우만 생각하면 이상하리만치 심란해졌다. 과거에 얽힌 일도 있었거니와 얼마 전 방송국에서 만난 어떤 PD가 한 말 때문이었다.

    ‘민경우 작가 아시죠? 사실 민 작가가 작가님 이번 공모전 작품 봤거든요.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앞으로 이쪽을 씹어 먹을 대성할 작가라면서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시상식 날짜 나오면 알려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거든요.’

    ‘팬이 될 것 같다나 뭐라나.’

    ‘민 작가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확실히 작가님 필력도 좋고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는 전개 방식도 좋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큽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그렇다고 과거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뭐야, 두 얼굴의 사나이야? 아니면 지킬 앤 하이드야?”

    방송국 내에서 매너 좋고 평판이 좋기로 소문난 민 작가였기에 자신이 과거에 본 그 사람이 맞는지 기억을 의심할 정도였다. 확실히 그가 좋아했던 드라마 작가 민경우는 최근 그가 본 민경우와 같은 이미지였으니 혼란스러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거기다 민경우의 인정을 받은 작가라고 방송국에 소문이 난 탓이었는지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민경우는 어쩐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작가가 칭찬한 작가라고 하기엔 자신은 너무 별 볼 일 없었던 것이다. 그 탓에 경우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열등감이 느껴졌다.

    그는 연습장을 펼쳐 이전부터 생각해 둔 소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질투였다고.

    애초 신복현은 오연옥의 전설 같은 걸 알지 못했다.

    어차피 인턴이라는 게 결국 장편 드라마를 쓰기 위해서 하는 거라 생각한 그는 단막극은 뒤로 제쳐 둔 채 미니 시리즈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게 조금 더 경우와 대등해지는 길이었으니.

    적어도 그와 대등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그를 뛰어넘고 싶었다.

    모두 합쳐 0이 되는 결국은 상처만 남을 수밖에 없는 게임, 제목은 <제로섬>으로 정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2008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매일 대본을 쓰고 신지홍과 만나 회의를 진행하는 김해영은 어느 때보다 바빴지만 얼굴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다들 자신의 일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경우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작가실을 들이밀고 들어온 박종연 탓이었다.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시는 건데요? 작업실 있으시다면서요?”

    “아, 왜? 나도 계약 기간 동안은 엄연히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인데 작가실 쓸 수도 있는 거지. 언제부터 사람 가려 받았어? 너 지금 나 차별하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 나오는 게 그렇게도 꼽냐?”

    “누가 그렇대요? 그게…… 다른 작가님이 불편해하시니까.”

    “내가? 불편하대? 아니 왜? 누가 그래?”

    “꼭 말을 해야 아나요? 감독님이야 아무렇지 않으시겠죠. 근데 작가님들 입장을 생각해 봐요. 이렇게 잘나신 대감독님이 옆에 있는데 일이 손에 잡히겠어요?”

    “하긴 나 정도 잘난 감독이 옆에 있으면 심장마비 안 당하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그치?”

    “에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째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인지…….

    원활한 작품 집필을 위해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며 사무실 출근을 고집하는 박종연과의 대립에, 경우는 자신의 방에 책상 하나를 더 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남는 책상 하나를 옮긴 경우를 향해 박종연이 물었다.

    “근데……. 우리는 뭐 송년회 안 하냐?”

    “아시다시피 방송가는 연말이 제일 바쁘잖아요. 거기다 각자 참석해야 하는 송년회도 많고요. 그래서 저희는 시무식 겸해서 연초에 하기로 했습니다. 저 오기 전부터 그랬나 보더라고요.”

    “그래? 연초부터 술판이라. 좋구만. 딱 내 스타일이야. 민 대표, 나 빼먹지 말고 꼭 불러.”

    “알았어요. 하여간 은근히 술 좋아하신다니까.”

    “옛날이야 술을 좋아했지. 근데 요즘은 술이 아니라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거다. 에효, 나이 들어 봐라. 주변에 사람은 없고 외롭고 사는 게 헛헛하다.”

    그렇게 투덜대던 박종연이 문득 생각이 났는지 경우를 향해 물었다.

    “참, 오늘 저녁에 나 동권 선배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갈래? 별일 없으면 같이 가자. 둘이 만난 지 좀 됐잖아.”

    “저도 같이 가도 괜찮아요?”

    “당연히 괜찮지. 오랜만에 이 조합으로 술 한번 마셔 보자고.”

    그렇게 경우는 박종연을 따라 김동권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민 작가, 정말 이러기야?”

    하지만 막상 만나 김동권은 예상과 달리 경우에게 성을 내기 시작했다.

    “선배, 왜 그래요?”

    “그래, 너도 들어 봐. 올해 우리 MBS의 대히트작이 뭐야?”

    “당연히 얘가 쓴 드라마죠. 종방 40퍼센트 찍었다면서요.”

    “그래, 그래서 우리도 연말 시상식에 힘 좀 주겠다고 했는데 이 녀석이 글쎄 안 나오겠다고 하잖아.”

    “예? 그렇다는 건 작가상이 민 작가로 정해진 겁니까?”

    “당연하지. 솔직히 시청률도 좋고 대본도 좋은데 경우 말고 받을 사람이 또 누가 있어? 하도 안 나온다고 해서 작가상이 너다 했는데도 이 모양이니, 원.”

    “아무래도 아직 얼굴 밝혀지는 건 좀 그래서요. 필모 좀 더 쌓이면 모를까.”

    “뭐 재벌이 대수야? 재벌은 작가 하지 말란 법 있어?”

    “솔직히 제가 흑역사가 좀 많아서…….”

    아직도 인터넷상에서 새명 막내아들에 대한 악명이 있기는 했으니. 방송가에는 이미 그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그 외에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만은 막기 위해 경우는 들어오는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았다. 간혹 인터뷰를 한다고 해도 사진은 절대 찍지 않았다.

    신복현이 그가 민경우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필모 좀 더 쌓이고 작가로 더 인정받은 후라면 모를까 아직은 좀 조심스럽네요.”

    “저러니 내가 더 권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그나저나 민 작가, 제작사 KBC랑 작업한다며? 섭섭하네. 좋은 대본이 있었으면 나나 김 PD한테 먼저 알렸어야지.”

    “괜한 말씀 마세요. MBS도 편성 보니까 장난 아니던데요. 그리고 연말에 송지현 작가님 드라마 있다고 먼저 못 박으신 게 어디에 누구셨더라.”

    “하하. 그 덕에 요즘 시청률 재미도 보고 있지. 아주 올 한 해 우리 MBS가 다 해 먹는다고 난리도 아니야.”

    “뭐, 내년엔 긴장 좀 하십시오. 저희 작가님 드라마도 대본이 잘 나왔거든요.”

    “편성이 언제야?”

    “내년 3분기, 한 7월 말쯤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휴가철이다 보니까 좀 걸리긴 하지만 대본엔 자신 있습니다.”

    “허허, 그래? 긴장 좀 해야겠구만. 근데 월화야, 수목이야?”

    “월화요.”

    월화 드라마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김동권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미끼를 문 박종연이 달려들었다.

    “뭐예요? 뭐 있는 얼굴인데?”

    “우리도 요번에 걸출한 신인이 들어왔거든. 공모전 통과되고 인턴 시작하는데 곧바로 미니 시리즈 대본을 턱 하고 내놓더라니까.”

    “설마 그 친구 편성이 우리 쪽 시간하고 동 시간대인 거예요?”

    “우리?”

    “당분간은 민 작가랑 한솥밥 먹으니까 당연히 우리죠. 그래서요?”

    “편성도 얼추 그쯤이 될 것 같거든. 우린 포스트 민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직접 대결은 아니지만 민 작가네 드라마와 대결하게 되었으니 어쨌든 기대해도 좋을 거야.”

    “이야,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한 해에 둘씩이나?”

    “제가 천재는 아니죠.”

    “무슨 소리! 솔직히 경우 네 대본 처음 봤을 때 말은 안 했어도 꽤 놀랐어. 그래서 결국 그 대본으로 영화 작업도 하고 있는 거니까. 근데 그놈 대체 누구예요? 이름이라도 좀 압시다?”

    궁금해하는 박종연을 뒤로 하고 김동권이 슬쩍 경우의 눈치를 살폈다. 처음과 같이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으나 김동권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초조해 보이는 게 그의 눈에 보였다.

    “아, 누구냐니까요?”

    “신도현. 기억해 둬. 당분간은 다른 방송국 못 가게 붙잡아 둘 참이야. 마침 공모전 당선자니까 명분도 충분하고 말이지.”

    “그 정도예요?”

    역시나 김동권의 시선을 느낀 박종연 역시 경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마침내 잠자코 있던 경우가 입을 열었다.

    “제목이 뭔데요?”

    김동권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로섬.”

    살짝 고개를 숙인 경우의 모습에 김동권은 경우가 긴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자극은 창작자에겐 좋은 원동력이 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경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로섬>이라면 그도 알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애초 나올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년 후인 2011년.

    그런데 그 작품이 벌써 편성을 받았다는 사실이 경우는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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