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용호상박 (4)
“뭐? 진짜?”
“어, 아직 정식 발표 전인데 당선자들한텐 미리 알려 준다면서 오늘 연락이 왔더라고.”
“그럼 형 이제 작가 선생님 된 거야?”
“작가 선생님은 무슨. 턱걸이로 겨우 붙은 거야.”
“그래도 그게 어디야. 잠 안 자고 만날 드라마만 보더니 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런 거면 진작 말을 하지. 형, 진짜 대단하다!”
“정말? 형 대단해?”
“당연하지. 그럼 형 이제 공장은 그만두는 거야?”
“그럴 리가 있냐.”
“왜? 당선된 거면 방송국으로 출근하는 거 아냐?”
“형이 공장 다니는 거 싫어?”
“그게 아니라 2교대 하면서 힘들게 일하니까 그렇지. 남들 잘 때, 남들 쉴 때 형은 일만 하잖아.”
자신을 걱정하는 신도윤의 모습에 신복현의 동생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형 괜찮아. 그리고 방송국에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냐. 알아보니까 한 달에 한 번? 그렇게만 나가면 된대. 그것도 6개월뿐이고, 생각보다 드라마 작가로 돈 벌기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드라마 작가로 당선된 신인 작가에겐 6개월 간의 인턴 생활이 주어졌지만 받을 수 있는 월급은 기껏해야 100만 원. 가작 상금으로 받을 450만 원까지 합한다고 해도 지금껏 다녀온 직장을 그만둬 버리기에는 액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다 다음이 기약되지도 않은 자리.
다행히 신복현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도, 이뤄질지 모를 희망에 모든 것을 걸 만큼 무모하지도 않았다.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만 나오는 거지, 드라마 작가라고 다 잘 버는 건 아니야. 확신이 있을 때까진 공장도 계속 다닐 거고.”
“그래도 난 형이 드라마 작가 했으면 좋겠다. 아, 공장 다니는 게 싫은 건 아니야. 그냥…… 한번도 형이 뭘 하고 싶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형도 형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했으면 좋겠어.”
“그래, 형이 노력해 볼게. 기분이다, 치킨이라도 시켜 먹자!”
“오예! 치킨, 치킨. 근데 형…… 맥주도 먹으면…… 안 될…….”
“쓰읍! 쪼그만 게 술은 무슨.”
“나 고3이거든. 키도 클 만큼 다 커서 형이랑 비슷하구만, 형은 항상 나보고 쪼그맣다고 하고. 밖에 나가 봐. 교복 벗으면 사람들이 나보고 청년이라고 하지.”
“아유, 그러셨어요. 이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놀리지 마.”
“귀여우니까 그러지. 그래, 까지껏, 오늘만이다. 생맥주도 시켜!”
“아싸! 형님, 최고! 짱미남!”
“짜식, 아부는.”
동생의 애교에 신복현은 그만 웃고 말았다.
그래, 행복이 별거냐. 맛있는 거 먹고 즐거우면 그게 행복인 것을.
“참, 어디 가서 형 당선됐다고 말하면 안 돼.”
“왜?”
“생각해 봐. 당선됐다고 하면 상금 받았을 거라며 한턱 쏘라고 불러내고. 그럴 때마다 술 마시면 나 일 못 해. 거기다 앞으로 방송은 언제 나오는 거냐, 연예인 만날 수 있는 거냐, 싸인 좀 받아 달라……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야.”
“그게 아니라 돈 쓰게 될까 봐 그거 걱정하는 거 아냐?”
“그것도 없지 않고.”
“하여간 누가 짠돌이 아니랄까 봐.”
“됐으니까, 비밀 지켜. 알았지? 대신 운동화 좋은 걸로 사 줄게.”
“입에 지퍼 채웠습니다요, 형님.”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신복현은 드라마 작가로 꼭 살아남기 위해 밤잠을 줄여 가며 이전보다 더 열심히 드라마를 보고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 * *
스튜디오 글로리, 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은 평소와 달리 다들 조금씩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김준수 대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편성 받았습니다. KBC.”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 듣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했다.
“근데 민 작가, 어떻게 안 거예요?”
“네? 뭐가요?”
“민 작가가 그랬잖아요. 신지홍 PD한테 먼저 보여 보라고. 신 PD가 마음에 들어하니까 국장님까지 다이렉트야. 덕분에 일이 아주 수월하게 끝났어요. 고마워.”
“아니요, 별말씀을. 전 그저 신 PD님하고 잘 맞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뿐인데요. 어쨌든 일이 잘됐으니까 다행이네요.”
“그래요. 이제 또 바빠지겠지만 이번에도 힘을 내 봅시다.”
이전 생과 마찬가지로 <곰과 여우 사이>가 KBC에서 편성을 받자 경우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오는 2009년 3분기에 편성을 받은 덕분에 시간은 넉넉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여유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감독과 작가가 정해졌다고 해도 배우 섭외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 일단은 주연 배우들을 캐스팅하기 위해 대본 수정부터 들어가야 했다.
흥분은 가라앉히고 다시 각자의 일을 하러 돌아가려는 순간 김해영이 경우를 붙잡았다.
“김 작가님?”
“저, 부탁이 있는데요.”
조심스럽게 김해영이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저기, 제가 단막극 2편이 경력의 전부라…… 괜찮으시면 작가님 조언을 좀 얻고 싶어요. 대본이 나오면 좀 봐주셨으면 해요.”
“제가요? 사실 제가 로맨틱 코미디는 잘 몰라서요.”
경우도 로맨틱 코미디를 쓰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감정선을 잡는 게 쉽지 않았다. 해서 고명희에게 들었던 욕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 결국 아예 쓰지 못하는 장르가 되어 버렸다.
“괜찮아요. 그래도 작가님은 미니 시리즈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그냥 대본 나오면 괜찮으니 봐주셨으면 해서요. 그냥 봐 주시는 것만 해도 힘이 날 것 같아요.”
하긴 시청률에 일희일비하는 게 작가들이었으니 김해영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하죠.”
“감사합니다.”
김해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이 지난 회식 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경우는 안경을 벗으면 딴 사람으로 변신하는 만화 속 캐릭터가 생각나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
* * *
MBS의 드라마 공모전 최종 당선작이 발표가 난 후 지난해 당선된 작품들이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상황이 달라진 신복현 역시 누구보다 그 일에 관심을 갖고 보기 시작했다.
“MBS 드라마 페스타? 매주 금요일 밤 열두 시. 열두 시면 너무 늦은 거 아냐? 올림픽 때문에 중간엔 하지도 않구만. 완전 찬밥 신세네.”
페스타라는 이름에 맞지 않은 늦은 편성 시간 탓에 신복현은 자기도 모르게 서운한 감정을 느꼈지만 반가운 이름에 얼굴이 확 펴졌다.
“어? 민경우 작가님, 드라마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단막극도 쓰셨네.”
올림픽이 방송되는 기간을 제외하고 총 10주간에 걸쳐 방송되는 ‘MBS 드라마 페스타’의 마지막 주자가 민경우였다.
“역시,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지. 무조건 본방사수!”
그렇게 기사를 더 읽어 내려가던 신복현의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스튜디오 글로리? 설마 거기?”
민경우가 스튜디오 글로리 소속임을 처음으로 알게 된 신복현은 스튜디오 글로리에 대한 폭풍 검색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견한 블로그 하나.
보기 좋게 꾸며진 블로그에는 이미 제작된 드라마와 영화 이외에도 새로 들어갈 드라마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곰과 여우 사이, 김해영 작가? 혹시 그 남자가 김해영 작간가?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안 물어봤네.”
도윤을 병원에 데려다 준 남자를 떠올리며 그가 혹시라도 김해영 작가 아닐까 생각한 신복현은, 그가 민경우라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민경우 작가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에 괜히 질투가 났다.
“됐다. 어차피 또 볼 사이도 아닌데…….”
신복현은 애써 생각을 떨쳐 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마침내 MBS 드라마 페스타 방송까지 끝나자 기다리던 공모전 시상식이 열렸다.
안청모에게 시상식 이야기를 들은 경우 역시 MBS로 향했다. 지금이 아니면 그를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늦게 도착한 탓에 시상식은 다 끝이 났지만 국장인 김동권과 함께 수상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경우가 고개를 내밀고 안을 살펴보자 그를 본 김동권이 경우를 불렀다.
“오, 민 작가! 마침 잘 왔어요. 이쪽으로 와서 인사들 나눠요. 이쪽은 <셀룰러 메모리>를 민경우 작가. 다들 알죠?”
김동권의 소개에 새로 뽑힌 신인 작가들이 눈을 반짝이며 경우를 바라봤다. 그런 눈빛을 이해한 김동권이 신인 작가 이름을 한 명 한 명 소개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작은 팬 미팅이 열린 것 같은 열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쪽은 신도현 작가.”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의 시선이 어색하게 얽혔다.
‘이 인간이 민경우였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민경우가 자신의 얼굴에 돈을 내던지며 모욕감을 줬던 그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신복현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렇게 글러먹은 인간이 그런 드라마를 쓸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한 후 자리가 파하자 경우는 돌아가려던 신복현을 붙잡았다.
“혹시 저 기억하세요?”
“네. 제 동생 도와주신 분.”
“도윤 학생은 이제 괜찮습니까?”
“도와주신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고3이라 한창 공부에 매달리고 있어요.”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는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했고 말투엔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분명 호의를 가지고 다가갔는데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다 보니 경우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기, 작가님. 혹시 제가 뭐 실수라도 한 거 있습니까?”
“……글쎄요. 제가 좀 바빠서.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선 먼저 돌아서 버렸다.
“아니, 왜 저래? 이유를 알아야 뭐라도 할 거 아냐?”
애매한 그의 대답을 곱씹은 경우가 혼자 투덜거렸다.
“내가 진짜 뭐 실수라도 했나? 그런 거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던 그의 모습을 본 안청모가 다가와 물었다.
“나이든 사람처럼 웬 혼잣말이야? 무슨 일 있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대답이 그래?”
경우는 상대가 누군지 말하지 않고 신복현과 있었던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줬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안청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제작 기다리던 어떤 대본을 읽은 적이 있거든, 거기 그런 대사가 있어. 자존심은 미친년 머리에 꽂은 꽃이다.”
“그게 뭔 말이에요?”
“사람들한테 맞고, 욕 먹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웃기만 한 미친년이 머리에 꽂은 꽃만 건들면 사납게 달려든대.”
“…….”
“생각해 보면 꽃 그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근데 나는 그 대사를 읽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 미친년이 왜 미친년인가, 머리에 꽃 꽂았으니까 미친년이지.”
“꽃이라……. 근데 갑자기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 건데요?”
“너 때문이지! 존재 자체만으로 상대방을 좌절시키게 하는 놈이잖아, 너는.”
“제가요?”
“그래. 머리 좋은 작가에, 회사 대표에, 생긴 것도 나름 괜찮은데 재벌 아들이야. 너 같은 놈들을 요즘 말로 넘사벽이라 한다지? 오죽했으면 그런 말이 생겼겠어? 너 같은 존재를 마주하면 우리 같은 나부랭이들은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생긴다고.”
“형님도 그래요? 나 보면 막 자존심 상하고?”
“나한테 자존심이 어디 있냐? 싹싹 비빌 두 손바닥밖에 없어. 봐, 지문 닳은 거.”
안청모의 너스레에 경우는 웃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웃어. 그리고 그런 놈은 그냥 신경 쓰지 마. 암만 봐도 꼬인 성격, 괜히 엮이면 너만 피곤해져. 알았어?”
“네.”
안청모 덕분에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경우는 돌아섰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친분을 쌓지 못한 건 아쉬웠으나, 안청모의 말마따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있을 만큼 그는 한가하지 못했다. 그래도 베일에 싸인 신도현 작가의 정체를 알았으니 그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 * *
시상식이 끝나고 공모전 당선자들의 인턴 기간이 시작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합평 시간에 참석하게 된 허선재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 돌아왔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안청모가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참, 오늘 신인 작가 합평 있었죠? 왜요? 올해도 어김없이 꼴통?”
“오냐, 도대체 지망생들한테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도는 건지…….”
“그럴 수 있죠. 요즘 드라마 공모전 경쟁률 장난 아니잖아요. 사법 고시만큼 어렵다나 뭐라나. 그 힘든 경쟁률 뚫고 당선됐는데 당연히 뽕이 찰 수도 있죠.”
“전설이 왜 전설이겠어? 그만큼 대체 불가한 오리지널리티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뭐 지들이 무슨 오연옥이고 송지현인 줄 아나.”
인턴 시절 120부작 대본을 써 다이렉트로 국장을 통해 방송을 잡았다는 오연옥의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 이후, 해마다 당선자들 중 하나는 자신 역시 그런 전설을 만들기 위해 장편 드라마의 대본을 써서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오연옥만큼 기대치를 충족하진 못했다.
“제발 합평 때 할 대본이나 제대로 써 오라고. 그래야 괜히 뽑았다는 소리 안 하지.”
그렇게 기대감 하나도 없이 신인 작가가 건넨 미니 시리즈 대본을 펼쳐보던 허선재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대본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전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