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2화 (52/250)
  • #52. 용호상박 (3)

    김해영의 현란한 손짓에 소주잔이 맥주잔 안으로 퐁당 빠지며 포말을 일으켰다. 살면서 이런 기술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인 경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분명 눈앞에 있는 건 김해영이었으나 낮에 본 그 김해영과는 완전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소심하고 수줍어 자신의 주장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던 사람이 술 몇 잔에 괄괄한 큰형님이 되어 있었다.

    사람 겉만 보고 모른다 하더니 김해영이 딱 그랬다. 어차피 취하면 보이지도 않는다면서 두꺼운 안경은 진작 가방 속에 던져 둔 그녀는 폭탄주를 제조하며 술자리를 화려하게 이끌고 있었다.

    1차 곱창집, 2차 노래방, 3차 호프집을 돌 때까지 이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다들 이런 김해영의 모습이 익숙한지 놀란 건 경우뿐이었다.

    어쨌든 신세계를 경험한 경우는 웃고 떠들며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노는 일에도 체력은 필요한 법. 최근 일이 너무 많았던 탓에 저질 체력으로 버티지 못했던 경우는 화장실을 가겠다는 핑계로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화장실 쪽에 소란을 우연하게 목격하게 되었다.

    “야, 너 몇 살이야?”

    “먹을 만큼 먹었다, 왜?”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됐어. 민증 까.”

    “허! 그러면 누가 겁낼 줄 알고.”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실 것이지. 결국 술자리의 끝은 싸움밖에 없는 것인가 싶어 다른 곳으로 돌아서려던 무렵이었다.

    “악!”

    누군가 내지른 소리에 돌아보니 드잡이를 하는 취객들 사이로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어딘가 다쳤는지 불편해 보였지만 정작 학생을 다치게 한 두 취객은 학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경우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예, 경찰서죠. 지금 취객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요.”

    얼마 후 출동한 경찰에게 두 사람을 인도한 경우는 손목을 붙잡고 있는 학생에게 물었다.

    “저기, 학생 괜찮아요?”

    일그러진 얼굴에 괜찮지 않다고 느낀 경우는 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 * *

    “인대가 늘어났어요. 당분간은 통원 치료를 해야 할 거예요. 나을 동안 손목을 쓰면 안 되니까 통깁스까진 그렇고 반깁스를 하면 덜 답답하면서 그나마 나을 겁니다.”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도윤 학생.”

    “정말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집에 전화 안 해도 괜찮아요? 걱정하실 것 같은데?”

    신도윤은 형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가방 속에 있는 휴대폰을 꺼내려 했지만 한 손으로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괜찮으면 내가 도와줄게요.”

    신도윤의 가방 속 휴대폰을 꺼내보니 부재중 전화가 30통이 넘게 와 있었다. 모두 다 형이었다. 통화 내역도 대부분 형이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가?’

    경우가 신도윤을 대신해 그의 형, 신복현에게 전화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자 그가 나타났다. 다친 동생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조금 부러워졌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를 엄습한 것은 암담함. 만약 그때 자신에게도 동생이나 형이 있었다면 그렇게 외롭고 암담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가족이 생기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가족보다도 못한 사이, 형제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복현이 갑자기 경우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이야? 당신이 내 동생을 이 꼴로 만들었어?”

    “형! 그러지 마.”

    “저기, 이것 좀 놓고.”

    신도윤이 말렸지만 복현은 경우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목이 조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 형!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왜 이래? 내가 형 땜에 못살아!”

    놀란 도윤이 소리치자 그제야 신복현의 손에 힘이 풀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그만.”

    경우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조금 화가 나려고 했지만 그의 사과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형의 굳은 표정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동생이 다친 탓이라 생각했다. 거듭 사과하는 형제를 뒤로하고 경우는 물러났다. 그런데 사이 좋은 형제의 모습에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쪽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많이 다친 거야?”

    “괜찮아. 얼마 안 다쳤어. 그리고 이거…….”

    머뭇거리던 신도윤은 가방 옆에 놓아둔 검은 비닐 봉지를 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봉지를 열어 보니 보이는 건 포장된 곱창.

    “지난번에 TV에 그거 나오니까 눈이 빠지게 보고 있었잖아. 오늘 잠도 못 자고 일까지 나가고……. 맨날 입맛 없다면서 물 말아 대충 먹고 그러니까 형 먹고 싶어하는 거 사 주고 싶었는데…….”

    하루 동안 있었던 설움과 동생이 무사하다는 안도감, 자신을 생각하는 동생의 마음까지.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했던 신복현은 동생이 자신을 이토록 생각하는 마음에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형! 울어? 아니, 무슨 곱창에 울고 그래. 아, 진짜 내가 형 때문에 못살아!”

    그런 형제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경우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사람들 쳐다보잖아. 이제 그만 울어, 뚝!”

    “그래, 알았어. 미안.”

    “미안할 것까진 없고. 이제 그만 집에 가자. 피곤해.”

    “입원 안 해도 괜찮아? 병원에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인대 조금 늘어난 거래. 별거 아냐. 아까 의사 선생님이 집에 가도 된다고 했어. 집에 가서 자고 싶어.”

    “그래, 집으로 가자.”

    가방을 챙긴 신복현이 계산을 위해 원무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르던 신도윤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병원비 많이 나오겠지? 아까 사진도 찍고 막 그랬는데……. 아,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미안해, 형.”

    “그런 소리 마. 돈이야 쓰려고 버는 거지. 형은 너 크게 다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마.”

    “그래도 미안.”

    “됐다니까 그러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금 넣고 나면 한 달 예산이 빠듯했던 신복현은 어느 부분에서 생활비를 줄여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었다. 그런데.

    “수납하셨는데요.”

    “네? 누가요? 신도윤 맞아요?”

    “네. 신도윤 환자분 수납 다 되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한 그때 놀란 건 신도윤도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 형님이 내주고 가셨나 봐.”

    “형님?”

    “나 병원에 데려다 준 형님. 어른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미안하네 어쩌네 하시더니. 우와, 그 형님 진짜 멋지시다. 근데 나 그 형님 연락처도 모르는데 어쩌지?”

    “넌 걱정 마. 형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대답을 하는 신복현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 * *

    “야, 저건 아니지. 발로 써도 내가 저것보단 더 잘 쓰겠다.”

    같이 일하는 이창수의 투덜거림에 허겁지겁 밥을 먹던 신복현이 고개를 들었다. TV에선 지난 주말에 했던 드라마가 재방송 중이었다.

    “또 뭐가요?”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정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펴? 삼강오륜이 왜 있는 건데? 아무리 드라마라도 할 얘기가 있고 못 할 얘기가 있지 말이야.”

    “드라마잖아요. 전 재밌기만 하더만.”

    “재미야 있지. 근데 우리 마누라 저 드라마 끼고 산다고. 본방에 재방에 뭐 삼방? 그렇게 보다가 마누라도 딴 맘 품으면 지들이 책임질 거야?”

    “어휴, 형님. 어디 가서 그런 말씀 하지 마십쇼. 형수님이 어떤 분이신데요. 아무렴 형수님이 드라마 좀 봤다고 바람피우기야 하겠습니까? 진짜 별소리를 다 듣습니다.”

    “크흠,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괘씸하잖아. 그 뭐라더라? 한 번에 3천이라던가? 아무튼 3천만 원씩이나 받아 가면서 사람들한테 나쁜 영향을 주는 건 하면 안 되지.”

    “예? 얼마요?”

    “3천.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써 재껴 놓고 하루에 3천씩 받아간 댄다. 저게 주말 드라마니까 한 50회 하지? 그럼 그게 다 얼마야?”

    “15억이요.”

    “하여간 돈 계산은 빨라. 그래, 15억. 남들은 1억 벌기도 아등바등인데 15억이나 벌면 자기 하는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야!”

    이창수의 투덜거림은 이미 신복현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하루 온종일은 물론 쉬는 날도 반납하고 밤 근무까지 해야 1년에 3천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 1편에 3천이라니.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쪽 세계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인터넷으로 드라마 작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 꼭 문창과나 국문과 안 나와도 됩니다.

    - 차라리 경험을 많이 하세요.

    - 일단 드라마를 많이 보셔야 합니다.

    “드라마를 많이 보라고? 나잖아?”

    드라마 보는 걸 좋아했던 터라 못 보면 재방이라도 챙겨본 덕에 누구보다 드라마 보는 일에는 자부심이 있는 그였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가 되는 최우선 조건이 드라마 많이 보기라니.

    그날로 그는 드라마 대본을 찾아보며 조금씩 익혔다. 드라마는 한 번 보는 것보다 여러 번 보는 게 더 낫다는 소리에 자는 것도 미룬 채 드라마를 보고 대본을 봤다.

    배운 거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몸 쓰는 것밖에 없었던 그였기에 만약 드라마 작가가 된다면 돈도 돈이지만 공부 잘하는 동생에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꿈은 멀기만 했고 현실은 생각보다 비참했다.

    그런데 돈 많은 누구는 회사 대표도 모자라 자신이 그토록 바라는 작가까지 하고 있으니.

    분명 동생을 도와준 건 고마웠지만 과거 자신에게 돈을 뿌리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 그는 일도 미룬 채 ‘스튜디오 글로리’를 찾았다.

    눈앞에 나타난 신복현의 모습에 경우는 의아했다.

    “어? 어제 그…… 도윤 학생 형 맞죠? 근데, 여긴 어떻게?”

    자신은 똑똑히 기억하는데 경우는 택배를 가져왔던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신복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오다 가다 알게 됐습니다.”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아니요. 저 이거.”

    신복현이 건넨 것은 흰 봉투. 얼떨결에 받아 든 경우가 신복현을 바라보자 그가 대답했다.

    “어제 제 동생 병원비 내주신 거요. 도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신세를 질 수만은 없어서. 감사했습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경우 역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곤 돌아섰다.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었으니.

    “이렇게 보니까 완전 다른 사람 같네.”

    분명 그때 자신에게 돈을 내던진 그 남자가 맞았는데도 180도 다른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으니까.

    후련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그때 신복현의 전화가 울렸다.

    출근이 좀 늦어질 것 같다고 했더니 도대체 언제 오냐며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갑니다. 지금 간다구요.”

    자신의 속 좁음을 여실히 깨달으며 그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은 그때.

    [여보세요?]

    들려오는 건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신도현 작가님 핸드폰 아닙니까?]

    “네? 누구요?”

    [신도현 작가님이요.]

    신도현이라면 그가 드라마 공모전에 쓴 필명이었으니. 신도현을 찾는다는 건 다름 아닌 방송국에서 찾는다는 생각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 네, 맞아요. 저예요, 제가 신도현이에요.”

    [여기 MBS 드라마국입니다.]

    신복현은 그토록 기다리던 공모전 당선 소식을 그렇게 듣고 있었다.

    그 시각, 신복현이 나간 문을 보고 서 있던 경우는 봉투 안을 살펴봤다. 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가 들어 있었다.

    “아니 뭘 또 은행에 가서 신권까지 받아오셨대?”

    형제의 모습이 보기 좋아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를 만지던 그는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며 괜한 수고를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마침 그의 상념을 깨기라도 하듯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안청모였다.

    “네, 형님.”

    [드디어 단막극 촬영 들어간다.]

    “정말요? 그럼 이제 진짜 PD님이시네요. 앞으론 안 PD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네요.”

    [그렇지. 하하.]

    “혹시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대본 수정해야 할 데라든가.”

    [없어. 완벽해. 어차피 단막이라 촬영 시간도 길지 않을 거고. 고생해서 대본도 줬는데 이번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네. 그래도 혹시 뭐든 걸리는 거 있으면 지체 없이 말씀하세요.”

    [그래, 그럴게. 참, 지난번에 네가 말한 거 그거.]

    “네? 뭐요?”

    [공모전 그 작품 말이야. 그 사람, 진짜 당선됐어. 가작으로. 시상식 날짜 잡히면 알려 줄 테니까 그때 한번 오든지.]

    “네, 정말 고맙습니다. 언제 우리 밥이나 먹어요.”

    [그래, 그러자.]

    마음이 심란했던 것도 잠시. 드디어 신도현,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우는 팬심으로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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