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1화 (51/250)

#51. 용호상박 (2)

지금도 그렇지만 작년 말, 신복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가리지 않고 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아는 사람 소개로 한 것이 호텔 발렛 파킹이었으니 아주 잠깐이라 하더라도 평소 가까이서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외제차를 직접 몰아볼 수 있다는 건 신세계였다.

문제는 정직원이 아닌 탓에 사고가 나면 보험 처리가 되지 않아 하루 일당이 아닌 1년 치 월급이 다 날아갈 수 있다는 거였다.

신복현은 주차를 하던 중 실수로 그만 기둥에 앞 범퍼를 긁고 말았다. 기둥에 긁힌 앞 범퍼에 차주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하하. 이거 어쩔 거야? 뽑은 지 한 달도 안 된 신차라고. 그런데 걸레로 만들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죽여 놓고 죄송하다면 그만이야? 어? 이거 어쩔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모습에 신복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 탓이었는지 남자는 검지로 신복현의 어깨를 꾹꾹 찌르며 시비를 걸었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어쩔래? 새 차로 뽑아 줄 건가? 어?”

“수리는 해 드리겠습니다. 수리비는 제가 월급 받는 대로-.”

“하! 너 월급이 얼만데? 너 월급이 수리비는 되겠냐?”

자존심이 상했지만 자신이 잘못한 것도 있었으니 신복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기분 나빠? 기분 나쁘면 사고를 치지 말았어야지! 에이 씨, 구질구질하게 진짜.”

그러더니 지갑에서 꺼낸 오만 원짜리 몇 장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놈들한테 한소리하면 갑질이네 뭐네 떠들어 대면서 정신적 피해 보상비 요구한다며? 수리비는 됐고 이거나 먹고 떨어져.”

그러고는 그를 향해 돈을 뿌리는데 공교롭게도 그 남자가 민경우였으니, 그날의 일을 떠올린 신복현은 이를 부득 갈았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때의 민경우와 지금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 * *

“김 작가님, 혹시 시놉시스 말고 대본은 써 둔 거 없나요?”

<곰과 여우 사이>의 시놉시스를 보던 경우가 작품의 주인인 김해영 작가에게 물었다.

“2부까지는 쓰긴 썼는데…….”

“그럼 그것도 함께 봤으면 좋겠어요. 시놉시스를 보니까 대본도 보고 싶네요.”

하는 수 없이 김해영은 경우의 말대로 그녀가 쓴 대본을 뽑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공모전이 당선된 이후, 인턴 생활을 통해 2편의 단막극을 방송에 낸 경험이 있는 김해영은 미니 시리즈 기획안을 내 봤지만 그녀의 대본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나선 PD는 없었다.

그렇게 인턴 기간마저 끝이 나자 그녀는 작가 생활도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 아는 PD의 소개로 온 곳이 이곳 ‘스튜디오 글로리’였다. 기회라도 주어진 게 어딘가 싶었지만 인턴 때와 마찬가지로 작품을 합평하니 김해영은 자꾸만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시놉시스는 많았지만 높아진 그녀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 때 내지 않았던 건데 하필이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시놉시스를 경우가 보게 된 거였다. 결국 회의에까지 올라오게 되었으니 가뜩이나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 그녀는 조마조마했다.

분명 물고 뜯고 지적질을 해 댈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거 시놉시스보다 대본이 더 좋은데요.”

“정말 재밌어요.”

“작가님, 혹시 CCTV로 저 몰래 훔쳐보셨어요? 이거 완전 내 얘긴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때 미소 짓고 있던 경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재밌어요?”

“그럼요, 여기 남녀 주인공의 이 대사요. 대본만 봐도 머릿속에서 그려져요. 박자가 딱딱 느껴지잖아요. 혹시 이거 작가님 경험담이에요?”

“그, 그건 아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김해영은 뭘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사실 여자들이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일종의 대리 만족이었다. 현실에선 미남의 재벌 3세가 나만 봐 주고 나만 좋다고 집착하는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곰과 여우 사이>는 여우가 되길 바라지만 현실은 곰인 여자가 평범한 남자와 벌이는 현실 로맨스. 당연히 대리 만족 같은 요소는 하나도 없었고 사소한 것들로 연인이 다투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 보니 김해영의 입장에선 이게 먹힐까 싶었던 것이다. 거기다 결혼 문제까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경우가 말을 이었다.

“로코 하면 흔히 신데렐라 스토리가 먹힐 거라고 생각하죠. 하나같이 안하무인 재벌 남주에 먹고살기 바쁜 여주가 최악의 첫만남으로 원수 보듯 으르렁대는 걸로 시작하고요. 여주는 자기 밥줄을 쥐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주를 막 대하고 그런 게 처음엔 남주가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는 게 보통 클리셰잖아요.”

김해영은 경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매번 비슷한, 사람만 달라지는 그런 내용의 드라마를 사람들이 과연 좋아할까요? 뭐 재미있으면 보기는 하겠죠. 근데 차별화가 없으면 기억에는 안 남아요. 그리고 정말 재미있게 쓰지 않는 이상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거고요.”

“맞아요. 저도 그런 이야기 좀 지겨워요. 솔직히 어떤 때는 스토리보다 남주 얼굴이 더 흥미 있을 때도 많다니까요.”

“근데 작가님 드라마는 좀 다르죠. 독특한 걸 넘어서 유일하다고 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친밀함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뭔 줄 아십니까?”

“글쎄요.”

“공감대 형성. 저 사람도 나랑 다르지 않구나, 나랑 똑같은 사람이구나, 그걸 느끼면 서로 간의 거리감이 줄어들죠. 전 작가님 드라마가 그런 면에서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이제보니 민 작가님, 분석도 참 잘하시네.”

분석을 잘해서가 아니라 이전 생에 <곰과 여우 사이>의 인기 요인이 그것이었으니.

경우는 이전 생에서 ‘스튜디오 글로리’가 <스테이> 이후 송사에 얽히면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김해영 작가도 그때 빠져나간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결국 자신의 개입으로 김해영 작가가 이곳에 남게 되었으니 <곰과 여우 사이>가 편성을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이전처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표님, KBC에 신지홍 PD님 어때요?”

경우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김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까 지홍이랑 이 대본이 아주 찰떡인데요. 딱 지홍이가 좋아할 만한 스토리네. 근데 작가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뭐…… 신 PD님 드라마도 많이 봤죠. 분위기가 잘 맞을 것 같아서요. 근데 신 PD님하고 잘 아시는 사인가 보네요.”

“당연하죠. 뭐 한 다리 건너면 모를 사람이 있겠어요. 이 바닥에서 일한 시간만 해도 얼만데. 어쨌든 그럼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다음에 제작할 드라마는 이 드라마로 결정하는 겁니까?”

“네. 저는 그랬으면 하는데 다른 분 생각은 어떠세요?”

자신의 작품이 뽑히지 못한 점은 아쉬웠으나 대본이 확실히 좋았기에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거기다 드라마 하나만 제작하고 말 것도 아니니 다음엔 반드시 자신의 드라마가 뽑히도록 하겠다며 오히려 의지를 다졌다.

“그럼 김 작가님은 기획안 먼저 다시 작성하시죠. 어쨌든 편성을 받아야 캐스팅도 하고 제작에 들어가는 거니까요. 저쪽 입맛에 맞는 기획안으로 작성하셔야 해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괜찮으시면 작가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데요.”

“저요? 당연히 괜찮죠. 그래요, 우리 같이 기획안 써 봅시다. 이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 드라마가 왜 팔릴 것인가. 어차피 방송국 쪽에서 원하는 건 팔릴 만한 드라마니까. 아셨죠?”

“네.”

그렇게 두 사람이 기획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종수가 사람들에게 통보했다.

“참, 오늘 회식 있는 거 잊지 않으셨죠? 2차나 3차는 자유지만 1차는 의무 참석입니다. 그동안 바쁜 일이 많아서 민 작가님 오신 거 환영도 못했는데 환영회 겸하는 거니까 꼭 참석하세요.”

다행히 어느 누구 하나 회식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 일을 끝내려는 이들만 있을 뿐.

* * *

물류 센터 앞에 차를 주차하고 차키까지 맡겨 놓은 신복현은 여전히 허리에 통증을 느끼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집에 가서 찜질이라도 해야겠다며 그가 사는 다세대 주택 지하 방의 계단에 들어선 순간 올라오고 있던 집주인 아주머니와 마주치고 말았다.

“총각, 이제 퇴근하는 거야?”

“네, 안녕하세요.”

“나도 일하고 온 사람한테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은데 계단도 좀 쓸고 그래. 얼마나 청소를 안 했으면 먼지가 다 풀썩이겠어. 그리고 박스는 그때그때 잘 정리해서 요일에 맞춰 내놔야지. 사람이 왜 사람이겠어. 깨끗하게 하고 살면 좀 좋아?”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좀 바빠서.”

“세상에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다 먹고사느라 바쁘지. 나 때는 말이야…….”

가뜩이나 서 있는 것도 힘든데 주인 아주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지자 복현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어른이 말하고 있는데 듣기 싫다 이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알았네. 나이 들었으면 입 다물고 말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괜한 오지랖이었어, 내가.”

안 그래도 속 좁은 집주인 아주머니가 신복현을 밀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면서 투덜대기 시작했다.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이 말이야. 어른이 무슨 말을 해도…….”

“동생이 공부를 잘하면 뭘 해. 저런 무식한 형한테서 뭘 배우겠어.”

“결국 동생 망신만 시키는 거지.”

들리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지 멀어지는 아주머니의 말소리가 그의 가슴팍을 찔러 대고 있었다.

월세를 밀린 적도 없건만 집주인 아주머니는 늘 별것 아닌 것들로 트집을 잡고 잔소리를 해 댔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부모 없이, 가진 거 없이 산다고 무시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건물이 낡은 탓에 다른 곳에 비해 월세가 쌌다.

의대는 학비도 비싸다는데 의대를 가고 싶어하는 동생을 위해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했다. 어차피 저만 듣고 말 일이었으니 혼자 속상하고 말면 그뿐이라 여겼다. 다행히 집주인 아주머니는 동생에게만은 친절한 것 같았다. 신복현은 적어도 동생의 앞길을 막는 형은 되고 싶지 않았다.

“됐다. 그냥 씻고 자자.”

동생 도윤이 올 때까지 시간이 남은 터라 그때까지 쉬자 싶었는데 하필이면 택배 차 대시 보드 위에 놓고 온 연습장이 떠올랐다.

“아, 왜 그걸 안 챙겨서는.”

마음 같아선 나중에 찾아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김영준이 나중에 보게 될까 그게 걱정이었다. 너 같은 놈이 무슨 드라마 작가냐며 비웃을까 두려웠던 신복현은 하는 수 없이 연습장을 가지러 다시 집 밖으로 나가야 했다.

“진짜 재수 끝내주게 좋은 날이네.”

무식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그에겐 너무도 긴 하루였다.

* * *

“도대체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오겠다던 열두 시가 넘은 지 꽤 됐는데도 동생 도윤이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해 봤지만 신호음만 갈 뿐 받지 않았다.

동생이 공부를 하고 있는 독서실까지 찾아갈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길이 엇갈릴까 싶어, 그는 집 앞 골목길에서 동생이 오길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왜 전화는 안 받는 건데?”

온갖 안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그는 애써 외면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며 스스로를 달래던 그때 마침내 전화가 울렸다. 다행히 동생이었다.

“야, 너 지금 어디야? 왜 전화 안 받는 건데? 형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런데 들리는 건 동생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니.

[여보세요? 혹시 신복현 씨 되십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기 병원인데요.]

동생이 병원에 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신복현은 자신의 허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허둥지둥 달려 응급실에 도착하자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윤아! 도윤아!”

그러자 간호사들이 달려와 그를 막았다.

“저기 보호자 되세요? 여기서 떠드시면 안 됩니다.”

“내 동생, 내 동생 괜찮습니까? 신도윤이라고 고등학교 3학년이거든요?”

“형!”

동생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한 신복현은 손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앉아 있는 동생 도윤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도, 도윤아. 괜찮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응?”

“아, 형. 조용히 좀 해.”

바로 그때 도윤의 옆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남자에게서 술 냄새가 확 끼쳤다. 이놈이구나 싶었던 신복현은 다짜고짜 남자의 멱살의 잡았다.

“당신이야? 당신이 내 동생을 이 꼴로 만들었어?”

“형! 그러지 마.”

“저기, 이것 좀 놓고.”

“어? 당신?”

분명 낮에 택배를 갔다가 만났던, 예전에 자신의 얼굴에 돈을 뿌렸던 그 남자였다.

새록새록 떠오른 그날의 설움 탓이었는지 오늘 하루 쌓인 그의 불만이 상관도 없는 이 남자에게 향해 버렸다. 열심히 사는데도 남자와 비교되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신복현은 남자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목이 조이자 고통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놀란 신도윤이 그런 형을 말렸다.

“아, 형!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왜 이래? 내가 형 땜에 못살아!”

그 말에 신복현은 남자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이 풀었다.

자신을 창피해하는 동생의 모습에 그는 동생 앞길을 막는다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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