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0화 (50/250)
  • #50. 용호상박 (1)

    신복현은 컴퓨터 화면 속 드라마에 빨려 들어갈 듯이 집중하고 있었다. 다음에 이어질 장면 탓에 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 방 안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돌아보니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동생 신도윤이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벌써 일어났어? 더 자지. 혹시 형 때문에 깼어?”

    “벌써는 무슨. 형, 아침이야. 설마 드라마 보느라 날을 샌 거야?”

    혹시 동생 잠을 깰까 이어폰을 꽂고 집중해서 보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잠이 안 와서. 어차피 내일까지 쉬니까 이제 자면 돼. 얼른 씻어. 형이 아침 차려 줄게.”

    동생이 등교할 준비를 하는 동안 신복현은 능숙하게 아침을 준비했다.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와 소식도 끊긴 채 어머니와 셋이서 살던 형제는 홀로 자신들을 돌보던 어머니마저 재작년 세상을 떠난 후 둘이 되었다.

    공부를 잘하는 동생만은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신복현은 일찌감치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낮 근무보다 페이가 좋은 밤 근무를 도맡아하기도 하고 틈이 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버는 그에게 유일한 취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드라마 보기.

    이렇게 쉬는 날이 껴 있으면 그는 날을 새서 드라마를 보곤했다.

    어느새 씻고 나온 동생과 아침상을 마주한 신복현은 공부하느라 갈수록 수척해진 동생의 모습에 걱정이 되었다.

    “오늘 또 독서실 갈 거야? 몇 시에 오는데?”

    “한 열두 시?”

    “너무 늦게 오잖아. 일찍 와서 쉬고 그래. 가만 보면 너도 수면 부족이야.”

    “그렇게 공부해서 의대를 어떻게 가. 열심히 공부해서 꼭 의사 되야지. 그래야 우리 형 호강시켜 주지.”

    “공부도 좋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 형은 네가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한 게 제일이야.”

    “내 걱정 말고 형 몸이나 생각해. 밤낮 바뀌면 건강에 안 좋다고.”

    “알았어.”

    “근데 아까 보던 드라마 전에 보지 않았어? 제목이 뭐였더라.”

    “셀룰러 메모리. 요즘은 저게 제일 재밌거든.”

    “한 번 봤으면 됐지, 몇 번을 보는 거야?”

    “원래 드라마는 여러 번 보는 거야. 발견 못 한 복선도 보이고 볼 때마다 다르거든.”

    “형은 옛날부터 하나에 꽂히면 그거밖에 모르지. 그래도 저 골동품 잘 돌아가네. 형이 사무실에서 얻어 가지고 왔을 때는 금방 고장 날 것 같더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내 보물 2혼데 고장나면 드라마 못 본다고.”

    “보물 1호는 뭔데?”

    “너. 히히.”

    “골동품이랑 동급인 건 좀 그런데.”

    “얼른 먹어. 늦겠다.”

    동생의 너스레에 실없이 웃으며 아침밥을 먹던 그때, 신복현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예, 형님!”

    [너 오늘 시간 있냐? 내가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아, 그러세요? 마침 저 오늘 쉬는 날인데 제가 할게요. 대신 일당 두둑하게 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요즘 별점이다 뭐다 생겨서 그거 때문에 좀 골치거든. 내가 웃돈 더 줄 테니까 대신 친절하게 해야 돼. 알지?]

    “친절 빼면 시체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좀 이따가 뵙겠습니다.”

    룰루랄라 신이 나서 전화를 끊는 신복현을 신도윤이 걱정스레 보았다.

    “설마 형 또 일하러 나가는 거야?”

    “어, 영준이 형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택배 좀 대신 해 달래.”

    “못 하겠다고 해. 그거 힘들잖아. 가뜩이나 밤에 잠도 안 잤으면서.”

    “괜찮아. 하루 안 잤다고 큰일 나겠냐. 힘들긴 한데 페이가 쎄잖아.”

    “돈 너무 좋아하다가 몸 상할까 봐 그러지. 그러게 밤새 드라마는 왜 봐?”

    “알았어. 동생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데. 앞으론 우리 동생 말 잘 들어야지.”

    “할말 없으니까 괜히 둘러대기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투덜대는 동생과 달리 돈 벌 생각에 그는 싱글벙글이었다.

    * * *

    물류 센터에서 김영준과 함께 차에 배달할 물건을 가득 실은 신복현은 김영준과 헤어져 물건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에어컨을 틀어도 의자에 닿은 허벅지며 등이 금세 땀에 젖었다. 그럼에도 힘든 기색 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신나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그도 배달해야 할 물건을 확인하고는 좌절하고 말았다.

    2L짜리 생수 여섯 병 묶음 두 박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빌라를 눈앞에 둔 그는 암담했다.

    “세상에 쉬운 일 하나도 없네.”

    생수 한 박스를 등에 짊어지자 제법 묵직한 무게 탓에 몸이 휘청였지만 곧 중심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이내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숨이 헉헉댔다.

    이놈의 저질 체력, 먹고 사는 거 외엔 움직이질 않으니 평소 운동 좀 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문 밖에 내놓은 작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왈왈 짖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놀란 신복현은 그만 생수병을 떨어뜨리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쿠, 놀래라. 조그만 놈이 더럽게 사납네.”

    다행히 목줄이 한쪽에 묶여 있어 더 다가오진 않았지만 개는 그를 향해 제법 맹렬하게 짖고 있었다.

    “아니, 왜 개를 문 밖에 놔두는 거야?”

    투덜대며 바닥에 떨어진 생수병을 살펴보자 한쪽 끝이 움푹 들어간 거 말고는 아무렇지 않았다. 무거운 생수병을 겨우 들고 5층 문 앞에 내려둔 신복현은 남은 한 박스를 다시 짊어 매던 순간 조금전 넘어진 탓인지 허리가 찌릿했다.

    “아, 좀 삐끗했나. 아오, 다치면 안 되는데.”

    겨우 생수병을 옮기고 난 후 몇 집 더 배달을 한 그는 점심 끼니도 잊은 채 막간을 이용해 산 파스를 붙이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남은 배달할 물건이 아직 차 안 가득,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막 차를 움직이려는데 김영준에게서 받은 업무용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

    [야! 너 일 똑바로 안 할 거야?]

    “네?”

    다짜고짜 들리는 고성에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그런데도 상대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물건을 이렇게 망가뜨리면 어쩌자는 거야! 너 땜에 생수병 다 구겨졌잖아.]

    “죄송합니다.”

    [일을 하기 싫으면 일을 하지 말든가. 배달시킨 물건은 똑바로 가져다 놔야 할 거 아니야!]

    “정말 죄송합니다.”

    [네 거 아니라고 막 던지지. 하여간 사람이 말이야, 경우가 없어, 경우가.]

    겨우 끊어진 전화에 한숨을 내쉰 신복현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아니,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빌라에서 자기 편하자고 무거운 생수를 배달시킨 건 누군데! 그렇게 중요한 거였으면 자기가 직접 사다 나르던가! 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성질대로 였다면 다시 쫓아가 하고 싶은 말 다 해 대고 싶었지만 그놈의 별점 탓에 웃돈까지 받은 처지에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돈 받아서 참는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이 자식아!”

    돈 없고 가진 거 없고 배운 거 없어서 서러워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요원하기만 했다.

    * * *

    “저희 쪽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정보하고 사진, 보도 자료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보내 드릴 테니까 부담 없이 말씀하세요. 네, 그럼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한참 동안 전화를 붙잡고 있던 경우가 겨우 전화를 끊자 그 모습을 본 김종수가 다가왔다.

    “뭔데 그래요? 보도 자료는 또 뭐고요?”

    “제 친구 중에 이번에 모델이 된 친구가 있어요. 어쩌다 보니까 그 친구 팬 블로그를 보게 됐거든요.”

    “그런데요?”

    그 팬 블로그의 전체 방문자 수가 170만 명.

    엄청난 수에 놀란 것도 잠시, 다른 블로그와 달리 보기 좋게 꾸며진 이유가 차별화된 인터페이스 때문이었다는 깨닫고는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블로그를 제작사 홍보 수단을 쓰기로 한 것.

    훗날 블로그가 기업 제품의 홍보에도 많이 쓰인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한 그였기에 제작사에도 그런 홍보를 이용하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제작사의 이름만 들어도 믿고 보는 드라마, 영화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게 그의 목표. 그러려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친근하게, 차근차근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해서 이수현의 블로그를 꾸몄던 사람에게 연락해 수고비를 주는 대가로 블로그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가만 보면 민 작가도 일을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야.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좋은 드라마 만들면 어련히 유명해질까. 그런 일까지 신경 쓰니까 대표 맡아 달라고 부탁한 내가 다 미안해지네.”

    “다 저 좋자고 하는 일인데요.”

    “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래도 민 작가 정도 되면 쉬엄쉬엄하면서 살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대표님, 저도 부잣집 아들은 하고 싶은 거만 하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아니더라구요. 해야 할 게 많은 건 마찬가지더라구요.”

    “뭐예요. 꼭 어느 날 갑자기 부잣집 아들이 된 것처럼 말하시네. 허허.”

    어쨌든 어머니와 한 약속이 있었으니 뭐든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자, 오늘도 회의 시작합니다.”

    지난번 요구 사항을 수정해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한 탓에 작가진은 자료를 챙겨 회의실로 들어가려 서둘렀다.

    바로 그때 작가 한 명이 허둥대다가 그만 책상 위 쌓인 서류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가뜩이나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그녀 모습에 경우는 다가가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자, 작가님. 제가 해도…….”

    “얼른 정리하고 회의 들어갑시다.”

    그러다 경우는 표지도 없이 떨어져 있던 시놉시스 한 장을 들어 자기도 모르게 읽고 말았다.

    그런데.

    ‘어? 이거?’

    분명 익숙한 내용이었다. 그대로 일어선 채 시놉시스를 자세히 읽던 경우 모습에 놀란 작가가 시놉시스를 빼앗아 갔다.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작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너, 너무 당황해서.”

    ‘저 작가 이름이 뭐였더라?’

    그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작가였다. 소심하고 늘 조용한 편이라 이름이 얼른 기억나지 않았다.

    “저기, 작가님?”

    “네?”

    “혹시 이 작품 제목 아직 안 정하셨어요?”

    “그게 정하기는 했는데…….”

    “뭐죠?”

    “곰과 여우 사이라고…….”

    제목을 듣는 순간, 과거 그가 봤던 드라마와 작가의 이름이 곧바로 생각났다.

    2009년 KBC에서 방영된 월화 드라마 <곰과 여우 사이>.

    이 소소한 로맨틱 코미디물은 현실 연애를 잘 표현했다며 조금씩 입소문을 타 4퍼센트의 시청률로 시작해 23퍼센트로 종영한다. 문제는 이 드라마가 아니라 이 드라마를 쓴 작가에게 있었으니.

    첫 드라마로 소소한 흥행을 이룬 작가는 이후 자신의 특기를 살려 톡톡 튀는 로맨틱 코미디물을 연이어 히트한다.

    로코 장인이라 불릴 정도로 로코물에 최적화된 그녀를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경우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분명 그녀가 다른 제작사 소속이었던 것 같은데.

    자신 때문에 운명이 조금씩 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영 작가님. 왜 지난번 회의 때 이 시놉시스 안 내셨어요?”

    “예? 좀 부족한 거 같아서.”

    “작가님. 자기 작품에 자신을 가지세요. 남들이 뭐라 해도 작품을 만들어 낸 작가가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갖는 건 당연한 겁니다.”

    “네.”

    “그럼 회의 들어가시죠.”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가려던 그때, 사무실 안으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택뱁니다, 김해영 씨?”

    김해영이 택배를 챙기는 사이 아래층에서 올라온 회계사가 경우를 불렀다.

    “대표님, 이것 좀 봐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서류를 들이밀고 물어오는 회계사를 향해 경우가 낮게 투덜거렸다.

    “부담스러우니까 대표라고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간단하게 서류를 살펴보고 있는 그때였다.

    “두 분 작가님, 빨리 들어오세요. 회의 시작해야죠.”

    회의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에 회계사에게 지시를 마친 경우와 택배를 자리에 놓은 김해영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택배를 건네주고도 돌아가지 않은 채 신복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작가?”

    배달할 곳이 스튜디오라길래 사진 찍는 곳인 줄 알았더니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건 그도 봤던 드라마 <스테이>와 영화 <아침이 오기까지>의 포스터.

    “도대체 여긴 뭐 하는 데야? 드라마 만드나? 그럼, 저 남자가 드라마 작가?”

    그렇게 사무실을 나가 차에 탄 신복현은 조금 전 만났던 경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생은 안 한 듯 단정한 얼굴, 꽤 비싸 보이는 옷, 막말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에게도 친절한 몸에 밴 매너, 거기다 작가이면서 대표이기도 한 한마디로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

    “부럽네. 젊은 나이에 사업도 하고 작가도 하고. 다 해 먹어라, 다 해 먹어!”

    그는 대시 보드에 올려 놓은 연습장을 괜히 들춰보다 내려놓고는 휴대폰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전화엔 부재중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동생 몰래 밤새워 드라마를 써서 공모전에 냈는데 발표할 때가 가까웠지만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다. 혹시 떨어지면 창피할까 필명으로 써 냈는데 괜한 짓은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에휴, 나 같은 놈이 무슨 작가.”

    퀴퀴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하루 종일 흘린 땀 냄새가 겨드랑이에서 풍기고 있었다. 그 작가라는 남자는 향수를 뿌렸는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어쩔 수 없는 비교에 괜히 씁쓸해진 복현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억지로 잊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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