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9화 (49/250)

#49. 끝은 새로운 시작 (4)

손석중의 입에서 난데없이 아내의 이야기가 거론되자 민 회장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말았다.

“집사람이?”

“네, 함께 식사나 하자는 말씀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집사람은 뭐라고 하던가?”

“특별히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미술관에 대해 말씀도 하시고…… 회장님 열심히 보필해서 고마웠다면서 앞으로 종종 식사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하셨는데……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내가 집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안 만날 건가?”

“예? 그건…….”

“그러면서 뭘 물어. 설마 내가 막아 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사장님이 단순히 밥 같이 먹자고 부르시는 건 아닐 것 같아서 말입니다.”

평사원으로 입사해 선대 회장인 민판섭을 거쳐, 지금의 민홍준 회장의 수족 노릇을 하기까지 25년이란 세월을 새명에서 지낸 손석중이었다. 눈치만으로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 정도의 경지가 된 그도 경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윤정숙.

그런 그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윤정숙은 의도 없이 움직일 사람은 아니라는 거였다.

“괜찮아. 밥 몇 번 먹었다고 자네가 집사람 편에 붙을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자네 입장에서도 집사람 제안, 거절하기도 힘들 거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막는 것도 모양새가 그래. 그러니 앞으로도 밥 사겠다고 하면 사양 마.”

“네, 회장님. 그럼 그때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아냐, 그럴 거 없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먹고 와.”

“알겠습니다.”

그렇게 손석중이 나가자 여유롭던 민 회장의 얼굴은 굳어졌다. 태연한 척했지만 혹시나 아내가 일을 벌일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민준호까지 인도로 내보낸 마당에 아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싶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설마, 아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손석중을 불렀다는 사실에 민 회장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애써 외면했다.

* * *

‘당분간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대신 성과가 있어야지. 네가 투자한 그…… 제작사라고 했던가? 눈에 띌 만한 성과를 내. 네가 네 몫을 제대로 해낸다면 나도 굳이 건설로 가라고 강요하진 않으마. 하지만 지금보다 나아진 게 없다면 넌 새명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아야 해. 알겠니?’

“누나가 누굴 닮아서 저러나 했더니 이제 보니 어머니를 아주 쏙 빼닮았네.”

어머니를 만나 지난번 일에 대한 답을 들은 경우는 당분간은 다른 것 보지 않고 제작사의 일에 올인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박종연의 일이 중요했다.

박종연의 일이 본격 시작되기 전, 청모에게 넘긴 대본을 잘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경우는 가만히 기다리기보다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데 함께 일한 시간이 있으니 거절도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런 거라면 자신이 나서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방송국으로 향한 경우는 매일 오갔던 그곳이 어쩐지 이전과 달리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누군가가 경우를 붙잡았다.

“저기 민 작가, 시간 괜찮으면 나랑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돌아보니 황성준이었다.

‘커피 맛이 왜 이래?’

‘가서 담배 좀 사와.’

‘이런 거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어쩌자는 거야? 이래서 너랑 같이 일 하겠냐?’

끼리끼리 논다고 하더니 고명희와 쿵짝이 잘 맞았더랬지.

이전 생에 그는 고명희 작업실로 자주 찾아왔다. 심부름은 기본, 그가 만든 드라마가 경우의 손에서 나왔음을 알지 못했던 그는 사소한 것들로 그를 괴롭혔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어떻게 보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반말을 하는 거 보니 태생이 그런 모양이었다.

사람 고쳐서 쓰는 거 아니란 말을 실감했다.

“무슨 일이시죠?”

“저기, 내가 누군지는 알지?”

“그럼요. MBS의 황 CP님 모를 사람이 어디 있나요.”

약간 비꼬는 말이었으나 황성준은 모르는지 웃고 있었다.

“차기작 아직 정하지 않았으면 나랑 같이했으면 하는데.”

“어쩌죠?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요.”

“설마 벌써 SBC랑 하기로 한 거야? 그런 거야?”

“황 CP님? 혹시 박종연 감독님을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대한민국 사람 중에 박종연 감독님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우리 MBS에서 박 감독님 영화도 특별 편성했지 않은가.”

“그랬죠, 참. 그럼 이야기가 잘될 거 같네요.”

“뭐가 말이야?”

“다음 작업은 박종연 감독님하고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고는 쿨 하게 돌아섰다. 그와는 다른 레벨이니 들러붙지 말라는 듯이.

알아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성준의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지 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그와 함께 일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경우는 생각했다.

경우는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중 안청모를 찾을 수 있었다. 얼마나 바쁜지 경우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가 붙잡았다.

“오, 민 작가. 아참, 내가 연락 안 줬지. 미안. 보다시피 내가 요즘 좀 바빠서.”

“무슨 일 있습니까?”

“공모전 때문에. 그래서 완전 비상이다. 나 요거 잠깐만 하면 짬 나니까 기다려 줄래?”

“네. 1층 카페에서 커피나 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오십쇼.”

“땡큐.”

생각해 보니 늘 이맘때가 되면 방송국 공모전이 시작되곤 했다. 그도 회사 일이다 뭐다 바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그만 잊고 말았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자 안청모가 뒤늦게 나타났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요. 저도 지난번에 들어 놓고 공모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그거야 관심 있는 지망생들이나 꿰고 있지, 기성 작가가 신경 쓸 필요 있냐.”

“저도 기성 작갑니까?”

“당연하지. 넌 공모전에 내도 자격 미달이라 탈락이야.”

그 말이 생각보다 좋아 경우는 그만 웃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진작 너한테 연락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얼굴 보니까 잘됐다. 네가 나한테 보여 준 그 단막극, 나 하고 싶어. 지금까지 본 대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데. 어때?”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야 고맙죠.”

“뭐냐, 대본 줄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보라고 주더니 요놈 의도는 따로 있었네.”

“당연하죠. 작가가 그냥 글 쓰나요. 다 방송 노리고 쓰는 거지. 아무튼 전 형님이 아무 연락도 말씀도 안 하셔서 영 아닌가 보다 싶었어요.”

“무슨. 완전 재미있어. 솔직히 미니 시리즈하고 단막극은 좀 결이 다르잖아. 이제 미니 시리즈 끝나서 좀 걱정했거든. 근데 기우였다. 솔직히 네가 준 대본 보고 자괴감이 쪼금 들 정도였으니까.”

“네? 아니, 왜요?”

“경력 많은 작가님들도 작품 하나 끝나면 완전 방전돼. 근데 넌 나이도 어린 게 미니 시리즈 끝나자마자 단막극까지 써 왔으니.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네 나이 때 뭘 했나 싶더라고. 아니,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

그거야 당연히 10년의 시간을 거슬러 넘어왔으니까 그런 거지.

경우는 그저 웃고 말았다.

“어쨌든 공모전 때문에 그럼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바쁘신 거예요?”

“드라마국에서 1년 중 가장 큰 행사잖아. 다들 정신없지. 우리야 1차 심사만 한다지만 2차, 3차, 최종심까지 해야 하는 PD님들도 계시니까. 원래 윗사람들이 바쁘면 우리 같은 말단은 죽어 나는 거야.”

“그럼 촬영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겠네요.”

“어, 일정이 좀 미뤄졌어. 공모전 1차 심사 끝나고 나면 작년 공모전에 상 받았던 작품 7편 있거든. 거기다 한 3편 더 해서 제작 들어갈 거야. 방송할 때 되면 공모전 최종 발표도 하겠지. 그럼 자연히 관심도 갈 테고. 어쨌든 내가 침 발라 놨으니까 다른 데 주지 마. 알지?”

“아유, 그럼요. 근데 형님도 심사를 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1차는 사실 별거 없어. 해마다 한 4, 5천 편 정도 들어오거든.”

“그렇게나 많아요?”

“갈수록 더 늘어난다. 나 같은 쫄병이 한 25명은 붙어서 1차 심사 봐. 각자 100편에서 150편 정도 배당받는데 그중에서 한 8~10편 정도 추려 내. 글자 크기, 줄 간격, 대본 형식, 이런 거 조금이라도 어기면 알짤 없이 탈락이지.”

“꽤 까다롭네요.”

“생각을 해 봐. 해마다 들어오는 대본은 산인데 그중에서 옥석을 가려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래서 형식을 까다롭게 보는 거야. 그런 성의도 보이지 못한 사람하고는 일할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가려내도 많을 것 같은데요. 중노동이 따로 없겠네요.”

“다 보고 나면 완전 토 나올 것 같아. 한동안은 글자도 보기 싫어져. 그래도 그중에서 재미있는 것도 있으니까 나름 버티는 거지.”

“공모전 상상만 해 봤지, 직접 해 본 적이 없어서 딴 세계 이야기 듣는 것 같아요.”

“하긴 넌 특별 케이스긴 해.”

“저, 그럼요. 혹시 형님 심사하실 때 저도 조금 보면 안 돼요? 궁금해서.”

“야, 안 돼. 우리는 심사도 작가들 빼고 다 PD님들이 한다고.”

“그래요? 아쉽다. 아니, 저희 제작사에도 공모전을 해서 작가를 뽑을까 하거든요.”

“그래?”

“뭐 아직까진 제 생각뿐이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는지 보면 저희 공모전 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었거든요.”

“진짜 별거 없는데. 알았어. 원래는 안 되는 건데 탈락작만 살짝 보여 줄게. 그 정도만 봐도 감은 올 거다. 어쨌든 이야기는 소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그것도 유념하고.”

“어쨌든 고맙습니다.”

“알면 나한테 잘해. 내가 이렇게 신경 써 주는데 말이야.”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공모전 접수 기간이 끝이 나자 경우는 안청모의 부름에 다시 한번 방송국을 찾았다. 작은 회의실 하나를 차지한 안청모는 테이블 위에 쌓인 대본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게 내가 봐야 할 양이다.”

“생각보다 많진 않네요. 전 산처럼 쌓여 있을 줄 알았거든요.”

“이게 자기 일 아니라고 막 말하지. 어떻게 이게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어.”

“금방 하겠네요. 파이팅!”

“그래, 열 내 봐야 뭐 하겠냐. 일이나 하자, 일이나.”

안청모는 대본을 하나씩 집어 들고 보기 시작했다. 곧바로 아니다 싶은 건 테이블 아래로 던져 버렸다. 경우는 그런 대본들을 모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탈락된 작품들을 보다 보니 기준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심사에 작가를 배제한다고 하더니 작가와 PD의 차이가 조금은 보이는 듯도 싶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대본의 1/3이 정리 되었을 무렵 안청모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아, 피곤해.”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오늘 하루 안으로 다 못 해. 그래도 1년 준비해서 응모했을 텐데 대충 볼 수는 없잖아.”

“세상 모든 심사위원들이 형님 같았으면 좋겠네요.”

“아무렴.”

“그래서 따로 놓은 거 보니까 이게 1차 통과된 건가 봐요?”

“응. 어느 정도 형식도 잘 갖췄고 기승전결도 나름 잘돼 있어. 이 중에서 최종에 뽑힐 작품이 있는지 모르겠다.”

살펴보니 4편이었다.

어떤 이야기일지 상상하며 제목만 보던 그때 경우는 아주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신도현.

첫 미니 시리즈가 대박을 터트린 후 발표한 드라마마다 폐인을 생성하는 천재 중의 천재.

경우 역시 이전 생에 그의 드라마를 수 차례 정주행 하는 것은 물론 대본집까지 사서 책이 닳도록 볼 정도로 그의 드라마를 좋아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작가에 대해선 이름 석 자만 제외하곤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이름도 본명이 아닌 필명이라는 소문.

그래서 더 그에 대해 궁금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뭐 하는 사람인지.

경우는 그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었다. 불세출의 작가라 불릴 만한 그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으니. 어쩌면 이번에는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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