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끝은 새로운 시작 (3)
박종연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여기서 내 다음 영화를 제작했으면 해서.”
“예? 저희 제작사에서요?”
“드라마만 제작하는 줄 알았더니 영화도 제작한다며. <아침이 오기까지>가 여기서 제작한 거라며.”
“그야 그렇지만.”
“왜? 싫어? 설마하니 날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그럴 리가요. 대감독님이 직접 찾아오셨는데 저희야 땡큐죠. 근데 감독님 정도면 제작하겠다고 나서는 회사가 줄을 설 것 같은데 의아해서 그렇죠.”
“하긴. 내가 좀 잘났어야지.”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가 없네요. 어쨌든 이유나 좀 들어 보죠.”
“그 전에 너한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서.”
“뭔데요?”
“네가 쓴 대본 있잖아. 아카데미 공모전에 낸 그 대본.”
“<시체가 나타났다>요?”
“어, 그거. 그걸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예? 그게 무슨. 말도 안돼요. 그건 70분짜리 단막극이라고요. 거기다 제 마음에도 안 차는데.”
“그래서 내가 각색을 좀 해 볼까 해.”
“가, 각색이라니…….”
어안이 벙벙한 경우를 향해 박종연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내가 그동안 슬럼프였거든.”
슬럼프라는 말에 경우는 괜히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게 창작자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 주는지 잘 알고 있거니와 고명희와의 일도 있었으니 슬럼프라면 아주 지긋지긋했다.
“한동안은 아예 몇 줄도 못 썼다. 사람들이 나한테 거는 기대, 관심이 너무 부담스럽더라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진짜 고민 많았지.”
“그렇다는 건 지금은 극복하셨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하여간 날카롭기는. 그래, 요즘 네 드라마 보면서 생각이 많아졌어. 그러다 아카데미에서 봤던 그 대본이 자꾸 생각나더라. 지금 드라마하고 분위기가 완전 다르잖아.”
“그렇죠. 그건 좀 어설픈 삼류 코미디잖아요.”
“뭘 그렇게까지. 어쨌든 난 그 작품의 발전 가능성을 봤어. 그래서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다. 너만 오케이 한다면 바로 각색을 할까 해.”
“도대체 그 대본 어디가 좋았다는 거예요? 솔직히 그땐 제가 좀 치기 어린 감이 좀 없지 않았죠. 전 괜히 냈다 싶었거든요. 솔직히 그거 좀 어이없잖아요.”
“그래서 좋아. 예측 가능한 게 하나도 없어. 완전 뒤죽박죽이야. 영화 촬영용 소품 시체를 진짜 시체로 착각하는 건 그렇다 쳐. 근데 소 뒷걸음질 치다가 진짜 살인범을 잡는단 말이지.”
“잘난 게 없는 사람도 한 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그 계기로 삶이 변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네 얘기냐?”
묘하게 날카로운 박종연에 시선에 경우는 짐짓 모른 척했다.
“아무튼 주인공 엉뚱한 짓 할 때마다 얼마나 피식거렸다고. 그걸 생각하니까 내 어깨에 들어간 뽕이 빠지더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잊었던 마음도 찾았고 말이야.”
“제가 여기서 거절하면 제작도 당연히 여기서 안 하시는 거죠.”
“당연하지. 제작 정도는 해야 네가 그 대본을 넘겨줄 것 같아서 여기까지 왔구만.”
“하아.”
안 그래도 안청모에게 보여 줄 대본을 쓰면서 경우는 그 대본 때문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끼곤 했다. 기성 작가들에게 날리는 재기 발랄한 도전장이었으나 지나고 보니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종연이 각색하고 싶다니 난감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보다 회사 일이 더 중요했다. 그는 이제 딸린 식구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으니까.
“좋습니다. 까짓것 넘기죠.”
“아, 역시 우리 경우, 시원시원해서 좋다니까.”
“당장 계약서 작성부터 하시죠.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어차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타공인 대감독인 박종연이 있는데 그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싶었다. 개판 오분 전 그 대본을 박종연이라면 마법을 부려 새롭게 탈바꿈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경우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쨌든 흥행성과 예술성을 모두 다 갖춘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는데 여기서 차 버리면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지.
경우는 김기영이 미리 준비해 둔 가계약서를 작성하고 세부적인 사항을 조율한 뒤에 김기영을 대동해 정식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기로 했다.
“하여간 철두철미한 놈. 뭘 이렇게까지.”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는 다르니까요. 당분간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오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앞으로 보여 줄 너의 능력을 기대하마.”
박종연이 돌아가고 소식을 전하자 김종수는 물론 제작사 식구들 너 나 할 것 없이 기뻐했다.
“이러다가 대표님 LA 가서 레드카펫 밟는 거 아니에요?”
박민정의 말에 경우는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그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대표님, 꿈은 크게 가지라면서요. 대표님만 봐도 그렇잖아요. 이런 모습 상상이나 하셨어요?”
“그거야…….”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LA라니.
꿈 두 번만 크게 가졌다간 난리 나겠네.
어쨌든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니 별로 한 일도 없지만 진이 빠진 것 같아 경우는 축 늘어져 있었다. 기다리는 안청모에게선 소식도 없고 엉뚱한 데서 일이 터지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벌여 놓은 일이 산더미, 겨우 몸을 일으키자 전화가 울렸다. 김강철이었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전화야?”
심드렁하게 전화를 받은 것과 달리 저쪽에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수현이가…… 수현이가…….]
“무슨 일인데?”
그러더니 끊겨 버린 전화.
다시 걸어 봤지만 김강철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경우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오만 가지 생각이 난 경우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이수현이 있는 라면 가게로 향했다. 거기 말고는 달리 갈 곳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정신없이 달려간 라면 가게 앞엔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게 다 뭔가 싶어 천천히 가게 안으로 들어간 순간 심드렁한 얼굴의 이수현이 그를 맞았다.
“왔냐?”
“어, 어떻게 된 거야?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일이야 많지. 일단 설거지나 좀 해라.”
그러고 보니 개수대 안에 산처럼 쌓인 라면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경우가 슬며시 뒷걸음질 치려 하는 순간 서빙을 하던 김강철이 뒤를 막아섰다.
“어딜 도망가려고.”
그 순간 경우를 향해 날아오는 앞치마. 어쩔 수 없이 앞치마를 받은 경우가 재차 물었다.
“진짜 나보고 하라고?”
“그럼 내가 하리? 쟤가 하리? 눈이 있으면 좀 봐라. 여기서 한가한 사람 너뿐이네.”
“아니, 그래도 이건-.”
“일단 입 닥치고 설거지나 해. 다 우리가 자초한 일인데 어쩌냐? 괜찮다는 사람 억지로 떠밀었으니까 당분간은 장단 맞춰 줘야지.”
“둘이서 뭐라고 쑥덕대는 거야?”
“아니야. 해, 한다고. 그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경우는 일단 앞치마부터 둘렀다. 라면 끓여 대느라 정신없는 이수현은 물론 서빙하느라 김강철 역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손님에 더 이상 라면을 담아낼 그릇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좁지 않은 가게 안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도 대기줄은 줄어들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경우는 라면이 다 떨어지기 전까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쨌거나 김강철의 말대로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으니 경우는 쌓여 있는 그릇들을 빠르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어제, 새명패션의 새로운 남성복 브랜드 L’amour가 런칭했다.
런칭이 미뤄진 만큼 모델이 정해지자마자 민지선은 L’amour를 띄우기 위해 물량전으로 대신했다. 해서 백화점 외벽의 현수막은 물론 지하철, 버스 광고까지 이수현의 얼굴이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안 그래도 유명한 이수현은 광고 덕에 그의 얼굴을 보겠다며 주변 학교는 물론 멀리서까지 찾아오는 진풍경을 연출하고야 말았다.
라면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장사를 끝낸 세 사람은 가게 문을 닫은 채 패잔병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야, 이거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는 아니겠지?”
“왜 아냐?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 이러지 않을까?”
“난 못 해. 더는 못 해. 야, 수현아. 이러지 말고 사람을 쓰자.”
“사람?”
“그래, 너 앞으로 더 유명해질 수 있는데 이젠 이렇게 하던 대로 일 못 해. 그러니까 알바생을 고용하는 거야. 아니다. 정식 직원으로 하자. 장사가 이렇게 잘되는데 뭐든 되겠지.”
“요즘에 인터넷으로 구인 구직 많이 하니까 일단 거기나 좀 올려 봐.”
“내가, 내가 할게.”
김강철이 인터넷 구인 구직에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올리는 사이 가게 안을 둘러본 경우가 입을 열었다.
“이건 예상을 완전 뛰어넘는 수준인데? 좀 유명세를 타기는 할 거라 생각했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이게 다 대표님 때문이야.”
“우리 누나? 누나가 왜?”
새 브랜드 홍보를 하면서 모델 인터뷰도 같이 진행했는데 그 자리에서 이수현이 전문 모델이 아닌 라면 가게 사장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친근한 이미지를 노린 거였고 예상은 먹혀들어 갔다.
모델하면 차갑고 멀게만 느껴지는 이미지였다면 학교 앞 라면 가게 사장은 어딘가 친근하고 다가가기 쉬운 이미지라 남친 컨셉이 잘 맞았던 것.
그 결과 라면 가게는 폭발적으로 손님이 증가했다.
“그래서 브랜드 매출은 어때?”
“듣자하니 다른 브랜드 첫날 매상의 한 다섯 배?”
“뭐야, 그럼 성공한 거네. 빚을 갚을 건 내가 아니라 누나였구만.”
어쨌거나 새 브랜드의 성공은 기쁜 일이지만 다시 다가올 앞날에 경우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첫날 이 정도면 앞으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릴지도 몰라. 아예 장사 접을 거 아니면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지.”
“특단의 조치?”
“하루 팔 양을 정하는 거지. 장사 잘되는 어떤 해장국집도 하루 딱 500그릇만 팔고 장사 그만하거든.”
“그거 좋겠다. 그렇게 하자. 돈을 더 벌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거니까 라면 장인처럼 보이려나?”
“그럼 먼 데서 오는 사람들은 기다리지도 못하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헛걸음하게 만들 순 없잖아.”
“그럼 예약제도 일부 도입하는 거야. 전화로 하면 하루 종일 전화만 오니까 인터넷으로 예약 신청을 받는 거지.”
“올, 민경우. 지금 딱 사업가 마인드였어. 이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건가? 좋아. 인터넷 찾아보면 예약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 있을 거야. 내가 한번 알아볼게.”
자신이 하는 일 외엔 별 관심이 없는 이수현을 대신해 두 친구가 발 벗고 나섰다.
사실 일을 벌였으니 수습을 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김강철이 자신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사이 인터넷 검색을 한 경우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근데, 이건 뭐냐?”
경우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아졌다.
* * *
김예신은 윤정숙이 보고서를 읽는 동안 자신이 조사한 내용들을 말하고 있었다.
“정규직 직원만 총 19명의 소규모 제작사입니다. 회사에 들어간 투자금에 65퍼센트가 민 작가님이 투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퍼센트가 임원이 출자한 돈이고 나머진 외부 투자입니다. 최근 제작한 영화까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해 회사 가치가 상승 중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멍가게에 경우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거네.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아무리 구멍가게라고 해도 말이야, 내 아들 주머니 사정을 내가 잘 알거든.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몇 달 전에 민지선 대표님 통장에서 거액이 인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돈이 결국 지선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잠시 생각하던 윤정숙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빙긋이 웃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운이 있지. 누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고 누구는 숨만 쉬어도 다 잘되고. 될놈은 결국 된다는 말 괜히 있는 말이 아니거든. 그럼 우리 막내는 어느 쪽이려나.”
“그 말씀은……?”
“둘 사이에 어떤 금전적인 거래가 오갔는지 알 것 같아.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예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일단은 지켜보자고. 괜히 내 뜻 밀어붙이면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그럼 건설사 주식 매입하던 건 어떻게 할까요?”
“당분간 보류. 우선은 현금으로 쟁여 두는 게 더 좋겠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손석중한테 전화 넣어 줘.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걱정 어린 김예신의 얼굴에 윤정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그냥 밥만 먹을 거야. 밥만. 자주 만나야 없던 정이라도 생길 거 아냐. 일단 경계심부터 풀어야지. 그래야 낙숫물에 바위가 뚫리는 거 아니겠어.”
“네. 전화 넣겠습니다.”
“어떻게든 버티는 쪽이 이기는 거야. 내가 제일 잘하는 게 바로 그거고.”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될 거라며 윤정숙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