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7화 (47/250)
  • #47. 끝은 새로운 시작 (2)

    “누나!”

    갑자기 사무실로 들이닥친 경우의 모습에 민지선은 의아했다.

    “여긴 웬일이야? 참, 드라마는 잘 끝났다지.”

    “뭐야? 마지막 회 안 본 거야?”

    “안 본 게 아니라 못 본 거지. 그나저나 잘됐다. 나 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뭐야? 무슨 일인데 얼른 털어놓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처럼 보이는 건데?”

    그러자 경우의 앞에 마주 앉은 민지선이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내가 어딜 갔다 왔는지 알아?”

    “어디?”

    “인천!”

    “인천……? 설마 누나 공항 갔어? 형 배웅하러?”

    “응.”

    “형이 뭐라 안 해? 아니, 그보다 형이 가만있었어?”

    “배알이 꼴리는 게 눈에 선한데 꾹 참는 거 있지. 사실 나만 있었던 게 아니거든.”

    “그럼? 설마 어머니도 나오신 거야?”

    “그럴 리가 있니. 정현 오빠랑 새언니가 나왔지.”

    “엥?”

    “진짜 얼굴 볼만하더라. 솔직히 준호가 싫어하는 사람 꼽으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왔으니. 아니다, 요즘은 경우 네가 1등이던가?”

    “아무렴 누나만 할까.”

    “어쨌든 너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딱 좋았을 텐데.”

    “윽, 완전 사악해.”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태연한 척하는데 그 마음이 완전히 감춰져야 말이지. 덕분에 참 좋은 구경했다.”

    “하여간 형도 참 독해.”

    “우리 집안 사람들 중에 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

    “그중 제일은 누나지.”

    “너도 만만치 않거든.”

    “내가 무슨.”

    “근데 준호 그놈, 어쩐지 시간이 다 됐는데도 안 들어가고 있길래 나는 처음에 너 기다리는 줄 알았잖아.”

    “나를? 왜?”

    “왜긴,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을 수도 있지.”

    “누나!”

    “근데, 혹시라도 아버지나 어머니 오시지 않는지 기다리는 눈치더라고. 생각이 있으면 그러지 않는다는 걸 잘 알 텐데 말이야.”

    “그 얘기 들으니까 조금 불쌍하긴 하네.”

    “불쌍하긴, 개뿔. 얼마나 꼴 보기 싫었는지 가라면서 등 떠밀더라. 그러더니 어쩐 일로 준호 그 자식이 인사한답시고 내 어깨를 잡고 끌어안는 거 있지.”

    “형이?”

    “그래. 난 처음에 얘가 집 떠나서 멀리 나가느라 마음이 많이 여려졌구나, 착각할 뻔했다니까.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럼?”

    “다른 사람 못 듣게 귓속말을 하더라고. 너한테도 전해 달래. 자기 돌아오면 당한 건 갚아 줄 거라고. 각오하래.”

    “그래서 누나는 뭐라고 했는데?”

    “응원하겠다고 했지. 지가 아무리 와신상담한다고 해도 그동안 내가 놀고 있을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피차일반이야.”

    하지만 민지선의 생각과 달리 민준호는 마냥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김예신의 전화를 미리 받은 상태였다. 김예신을 만나고 있는 것을 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가지 않고 버티고 있던 그들을 겨우 보냈다. 세 사람이 공항을 떠난 후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김예신은 윤정숙을 대신해 민준호에게 편지를 건네줬다. 인도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편지를 읽은 민준호가 어떤 각오를 다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던 민지선이 경우를 잠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누나가 나를 좀 도와줘야 할 일이 생겼어.”

    “도와줘야 할 일……? 경우 설마…… 너 사고 쳤니? 이번엔 또 뭐야? 혹시 사람 때렸어? 그래서 뒤처리라도 하게?”

    “아니, 누난 나를 뭘로 보고.”

    “그렇잖아. 드라마도 다 끝난 마당에 그런 부탁은 당연히 아닐 테고.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설마 도박은 아니지?”

    “누나! 아니, 이 누나가 진짜!”

    “농담이야, 농담. 누나가 동생 두고 농담도 못 하니. 그래, 뭘 도와주면 되는 건데?”

    잠시 눈을 흘긴 경우는 ‘스튜디오 글로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거 완전히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네. 그래서?”

    “처음엔 나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김 대표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마음에 남더라고.”

    “뭐라고 했는데?”

    “죽는 순간까지 꿈을 쫓는 사람이고 싶대.”

    “참 낭만적이시네. 그쪽 일하는 사람들은 다 그러니?”

    “그럴 리가. 어쨌든 오죽했으면 나한테 그런 말을 다 하나 싶었어. 날 뭘 보고 그렇게 믿어 주나 싶기도 하고.”

    “아서라. 사업은 아무나 하니.”

    “그러니까 좀 도와줘.”

    그러더니 경우는 민지선을 향해 은근하게 미소 지었다.

    “너 그 얼굴 뭐냐? 역겨우니까 당장 거둬 주겠니?”

    “소중한 동생한테 역겹다니…….”

    “바빠 죽겠는 사람한테 찾아와서는 짐을 떠맡기려는데 그럼 귀엽겠니?”

    “아,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망하지만 않으면 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건데 그게 세상 어려운 거야. 너 하루에도 구멍가게가 몇 개나 생겨나고 몇 개나 망하는지 알아?”

    “그래서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평소와 다른 경우의 생떼에 민지선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일을 벌린 동생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경우를 돕는 게 곧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걸 습득한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동생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우리 회사 회계사 한 명 붙여 줄게.”

    “회계사?”

    “회사 굴러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글쎄?”

    “돈이야, 돈. 돈이 어디에 얼마가 들어갔고 얼마를 벌어들였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돈의 흐름이 보이지. 그리고 회사에 난 구멍도 보이고. 그것만 잘 살펴도 망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겠지. 뭐 쪽박 날 드라마 몇 편 연달아 제작하면 그마저도 못 버티겠지만.”

    “누난 말을 해도. 뭐, 어차피 그럴 일은 없으니까 안심해.”

    묘하게 자신만만한 경우의 얼굴에 민지선은 의아했지만 어쨌든 이왕 돕기로 한 거 좀 더 제대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 친구 기영이 알지? 전에 봤잖아. 변호사.”

    “아, 그 누나랑 같은 학교 다녔다던.”

    경우는 새명물산의 지분을 넘기면서 만났던 김기영 변호사를 떠올렸다.

    “그래, 그 친구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도움받아. 지난번에 드라마 PPL 때문에 보니까 계약서도 많고 그러던데 원래 뭐든 법을 잘 알아야 뒤통수 당하지 않으니까.”

    “역시 누나 최고!”

    “짜게 굴지 말고 돈은 넉넉하게 줘. 누나 체면도 있지 짜게 굴지 말란 말이야.”

    “그런 건 걱정 마. 누나, 정말 고마워.”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갚아.”

    “당연하지. 이자에 이자까지 쳐서 갚을 테니까 걱정 마. 알잖아. 나 현금은 엄청 많은 거.”

    “그래, 그게 다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돈인지는 알고 있지?”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늘 누나한테 고마워하고 있다니까.”

    경우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민지선은 모를 테지만 지분을 담보로 그녀가 넘겨준 돈은 이미 임석주를 통해 빠르게 불어나고 있었으니, 자신이 준 돈이 얼마나 불었는지 알면 그녀는 기함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기영을 만난 경우는 지금의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규모가 작아 소속 변호사가 없었던 ‘스튜디오 글로리’에 전담 법률 자문을 맡기로 한 김기영과 함께 경우는 회사로 향했다.

    대표직만 넘기면 끝나는 일이라 생각했던 김준수 대표는 경우가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나타나자 사뭇 긴장했지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구멍가게가 제대로 된 회사의 모습을 갖추는 것 같아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경우는 김준수와 함께 회사를 세운 이세길, 김영훈, 오은호까지 불러 작은 회의를 진행했다.

    “우선 대표직은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공동 대표를 유지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민 작가님.”

    “대표님. 회사엔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계시잖습니까. 어떻게 보면 저는 굴러들어 온 돌인데 투자 좀 했다고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빼면 직원들의 사기에도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건 민 작가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대표님. 우리야 사정을 다 안다고 해도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대표가 대표직을 물러나면 한마디로 좌천하는 걸로 보일 텐데 이러다 겨우 모은 인재 다 빠져나갑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자신의 뜻을 알아주니 경우는 다행으로 여겼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게 인지상정. 경우는 여기에 쐐기를 박기로 했다.

    “저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할 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으로 하죠. 앞으로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돈 때문에 돈이 없어서 좋은 드라마, 영화를 못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소규모의 제작사에서 가장 신경 쓰는 건 역시 자금력.

    투자를 받아 드라마 제작에 나서지만, 그 탓에 투자자들의 입맛에 맞는 스토리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누구보다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그 소식은 무엇보다도 빠르게 직원들에게 알려졌고 새로운 대표의 취임을 모두가 반기게 되었다.

    젊고 누구보다 이쪽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돈까지 많은 사람이 대표가 된다는 걸 굳이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셀룰러 메모리>를 집필한 민경우 작가가 ‘스튜디오 글로리’의 공동 대표가 되었다는 소식은 은밀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어쨌든 경우가 새 대표로 취임하고 나서부터 ‘스튜디오 글로리’에는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김종수를 필두로 ‘스튜디오 글로리’의 작가진은 물론 경우까지 참석한 회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내년 상반기 편성을 노린 드라마 회의였다. 그동안 기획 작가인 박민정과 이시연이 새로 짠 기획안은 물론 다른 작가들 또한 편성을 받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스테이>를 쓴 오가진 작가를 제외하면 사실상 기성 작가는 하나도 없는 신인들이었다. 해서 회의는 자꾸만 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돈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현실적으로 제작 가능해야죠. 현 시점에서 이런 고난이도 SF는 제작이 아예 불가능해요. 우리가 파라마운트는 아니잖아요.”

    “나는 박 작가가 낸 이 작품이 개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민 대표 생각은 어때요?”

    “예. 저도 이 작품 괜찮게 봤어요. 조금만 더 손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 박 작가. 다 괜찮은데 솔직히 이대론 주인공에게 공감하기가 조금 어려워. 주인공에 대한 서사를 조금 더 실어 줬으면 좋겠어.”

    “네, 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때 사무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알바생 모기범이 똑똑 노크를 하고 회의실의 안으로 들어왔다.

    회의 시간엔 방해받는 걸 누구보다 싫어한 김종수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무슨 일이야?”

    “저기……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누군데?”

    “저, 그게…….”

    모기범의 반응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나가 볼 테니까 회의 계속 진행하시죠.”

    “아닙니다. 대충 할 말은 다 끝낸 것 같은데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죠.”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나와보니 그들은 찾은 손님은 다름 아닌 박종연이었다.

    “감독님!”

    놀란 경우가 다가가자 박종연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경우뿐만 아니라 김종수까지도 박종연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팬 사인회에 버금가는 인사를 나누고서야 겨우 경우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갖출 것만 갖춘 실용적인 방안을 슬쩍 둘러본 박종연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경우, 너 아주 출세했구나.”

    “출세는요.”

    “하긴, 어떻게 보면 소박한 건가?”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의외의 얼굴을 이곳에서 만나자 경우는 무엇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근데 어쩐 일이세요.”

    “야, 드라마 끝났으면 네가 날 먼저 찾았어야지 나를 오게 만들어. 그래도 내가 은인인 것 같은데.”

    “죄송해요. 그러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많았어요. 어느 정도 정리되면 찾아가려고 했죠.”

    “됐다. 엎드려 절 받기지. 어쨌거나 드라마 잘 봤다.”

    “고맙습니다. 근데 정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너하고 상의할 일이 있어서.”

    경우를 바라보는 박종연의 눈빛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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