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끝은 새로운 시작 (1)
<셀룰러 메모리>가 방송되기 한 시간 전.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갈빗집으로 <셀룰러 메모리> 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방송을 함께 보며 회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치솟는 드라마의 인기 탓에 소식을 듣고 몰려온 기자들이 회식에 참석하는 배우들의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식당 안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인사를 나누는 등 소란스러웠다. 단 며칠뿐이었지만 마치 오랜만에 만났다는 듯이 무척 반가워했다.
편집을 맡은 연출부만이 피곤에 쩔어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왔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며칠간 이어진 지옥의 스케줄을 끝내고 쉰 덕분인지 얼굴이 보기 좋게 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의 인사가 마침내 끝이 나고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셀룰러 메모리> 마지막 회가 방송되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TV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정복을 입은 순경의 부축을 받은 정보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짙은 피로감이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과장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니까 그러네. 조금 놀란 것뿐이야. 잠시 쉬면 괜찮아질 걸세.”
“그래도 병원에는 가 보셔야 하는 게-.”
“그 여의사, 유치장에 있나?”
“네.”
“알았네. 수고하게.”
축객령에 순경은 하는 수 없이 경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야 홀로 남은 정보현은 자신의 자리로 가 깊숙이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눈을 뜬 그는 서랍 속 숨겨두었던 대포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야. 처리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차이현. 여기 유치장에 있으니까 오늘 밤 안으로 확실히 입막음해.”
전화를 끊은 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내려 창문을 모두 가려 버렸다. 그러고는 창문 바로 앞 낮은 책장 위에 놓아둔 화분 하나를 들었다. 화분 아래 숨겨 놓은 USB를 집어 든 정보현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이것만 없애면 모든 게 끝이야!”
정보현은 책상을 뒤져 얼마 전 선물 받은 손잡이가 뭉툭한 장식용 봉투 칼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USB를 마구 내리쳤다. 작은 USB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되었다고 생각한 정보현이 부서진 조각을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 * *
밤이 깊은 시각, 유치장을 지키고 선 순경이 꾸벅꾸벅 졸다 고개가 떨어지자 화들짝 놀라 깨고 말았다.
“이상하게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졸리지?”
스트레칭을 해 봤지만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순경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유치장 안에 있는 건 젊은 여자뿐. 취객도 하나 보이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설마하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화장실에 가서 세수나 하고 와야겠다.”
그렇게 순경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검은 그림자가 유치장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이미 주머니에 챙겨 온 열쇠로 유치장 안 철창의 문을 연 그림자는 한쪽 구석 잠든 채 누워 있는 여자를 향해 서서히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스카프를 꺼내 양손에 단단히 돌려 감은 그림자가 서서히 여자에게 다가가는 순간.
“너였냐?”
들리는 건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
놀란 그림자를 향해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박규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어두컴컴한 유치장 안 불이 모두 켜지고 박규영을 강아지마냥 따라 다니던 이순호 순경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정보현은 책장 안쪽에 숨겨 둔 버본 위스키를 꺼내며 콧노래를 불렀다. 컵에 위스키를 따르고는 단숨에 들이키자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불타는 듯 화끈한 맛에 취기가 확 오르는 것 같았다. 만족감에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전화벨이 울리고, 생각 없이 전화기를 들어 본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최우진.
“어떤 새끼가 장난질이야!”
정보현은 전화를 끊어 버리지만 잠시 후 전화는 다시 울렸다.
아무래도 불길한 생각에 그는 전화를 받기로 결심한다.
“너, 누구야! 누군데 죽은 사람 전화로 전화를 걸어?”
그러자 들리는 건 심한 잡음과 함께 낮은 한 남자의 목소리.
[아저씨.]
“아저씨? 너 누구야? 누군데 이런 되지도 않는 장난질이야.”
[아저씨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하셨잖아요…….]
“뭐?”
순간 떠오르는 과거 기억.
그것은 최우진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아저씨, 혹시 기억해요? 20년 전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그 아이, 죽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너만큼이나 컸을 텐데. 할 수 있다면 기억에서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야.’
‘왜요? 황남도가 진범이 아니라서?’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 다 알고 있어요. 범인은 황남도가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그런 거죠? 좌천되실까 봐 아버지가 그렇게 하신 거죠?’
‘…….’
‘아니라고 하셔도 소용없어요. 이미 증거도 모았어요. 잘못이 있다면 늦었어도 바로잡아야 해요.’
‘그만둬. 거기에 연루된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미안하지만 황남도 그 사람은 죽고 없어. 하지만 그 일이 알려지면 다치게 될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나는 네가 입 다물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없어요.’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만약 네가 그걸 밝힌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입 다물어야 해. 그래야 네가 안전해.’
흥분한 정보현은 방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최우진은…… 최우진은 죽었어.”
[아저씨.]
“아니라고! 난 아니라고!”
바닥에 휴대폰을 내던진 정보현은 발로 밟아 휴대폰을 결국 부수고 말았다. 하지만 곧이어 울리는 내선 전화. 전화선을 다 뽑고 내던지지만 이후로도 어디선가 계속해서 전화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귀를 감싸 쥐고 소리를 막아 보려 하지만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보현은 점점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흔들리면서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와, 나오라고! 할 말이 있으면 나와서 해!”
“최우진은 죽었어. 죽었다고!”
“내가 죽였어. 내 손으로 죽였단 말이야!”
“나와, 이 따위 장난질 치지 말고 나와!”
* * *
노트북으로 방 안에 몰래 설치해 둔 CCTV를 본 한수혁은 조금 전 유치장에서 만난 차이현이 할 말을 떠올렸다.
‘내가 그 인간한테 아모바르비탈을 주사했지. 혹시나 중간에 깨어날까 평소보다 더 넣긴 했는데. 걱정 마. 그렇다고 별 탈은 없을 테니까. 대신 체내에 성분이 남은 상태에서 술이라도 마신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네.’
‘선생님.’
‘그렇게 부르지 마. 난 더 이상 네 상담의도 뭣도 아닌 범죄자일 뿐이니까.’
씁쓸한 표정의 한수혁은 미쳐 날뛰는 정보현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았다. 그러고는 방 안 어딘가 숨겨 두었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던 전화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전화벨 소리가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듯 정보현은 여전히 미쳐 날뛰고 있었다.
한수혁은 노트북을 덮어 버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박규영이 다가왔다.
“이제 어쩔 거냐?”
“인과응보. 작가님이었다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죠.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감옥으로 가야죠. 죽은 사람의 기억이 다른 사람한테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모른 죄인의 패착이죠.”
굳어 있던 한수혁이 비로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기쁨과 슬픔의 그 중간 어디쯤이었다.
* * *
드라마가 끝이 나고 이젠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다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배우들은 어느새 경우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들 술 기운이 돌았는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경우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근데, 작가님 그 말 사실이예요?”
“뭐가요?”
“다음 드라마 SBC랑 벌써 계약했다면서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다 들었다고요. SBC 강진일이 만난 이야기. 아니, 서운하다는 게 아니라 다음 드라마 하려면 바쁘겠구나, 그럼 우리 정말 연락하기도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술주정을 빙자해 하소연을 하고 있는 모습에 경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강진일 CP 만난 건 사실인데요. 그쪽에서 보자고 해서 만난 거지 아직 뭘 하겠다고 확정한 건 없어요.”
“그래요? 그래도 잘나가네. 드라마 이제 막 끝났는데 벌써 러브콜도 받고.”
“그러는 형님도 시놉시스 받은 거 여럿 된다면서요.”
“그거야-.”
“참, 그보다 저 드라마 제작사에 들어가기로 했어요.”
“예? 갑자기 웬 제작사?”
“안정적으로 드라마를 쓰려면 제작사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하긴. 소속되어 있는 게 좋긴 하죠. 하여간 재능이 있는 사람을 가만두질 않아. 그래서 어디로 가기로 했는데요?”
그런데 주변에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안청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데 청모 형님 어디 가셨어요?”
“응? 조금 전에 찬바람 쐰다고 밖으로 나가는 것 같던데요.”
그 말에 경우는 안청모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 식당 앞 의자에 안청모가 홀로 앉아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어? 그냥. 너무 마신 거 같아서 좀 깰려고. 그나저나 SBC랑 드라마 한다며?”
“아이, 무슨 헛소문이……. 아니에요, 그런 거.”
“그래?”
“네. 그냥 ‘스튜디오 글로리’에 합류하기로 했어요.”
“엥? ‘유니온 스튜디오’도 아니고?”
“갑자기 ‘유니온 스튜디오’는 왜요?”
“업계 최고잖아. 너처럼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면 그런 데서 못 데려가서 안달인 줄 알았지.”
“연락 한 번 온 적이 없는데 무슨요. 뭐 왔다고 해도 제가 거절했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곳은 저랑 안 맞아요.”
“안 맞기는.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어쨌든 제작사 들어갔으면 바빠지겠네.”
“아무래도 이 일 저 일 일이 많으니까 그렇겠죠. 근데 저보다 형님이 더 바빠지는 거 아니에요? 형님도 곧 입봉 하신다면서요? 지난번에 PD님이랑 하는 소리 다 들었구만.”
“그랬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골치다.”
“왜요? 좋아서 춤바람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처음이야 그랬지. 근데 내 마음에 딱 드는 대본 찾는 게 쉬운 게 아니네. 지금 작년부터 해서 역대 공모전 제출한 데이터베이스까지 뒤져 보고 있는 중인데 딱히 이거라고 끌리는 게 없어. 시놉시스만 봐도 감이 딱 오는 그런 거 있잖아. 아, 내가 너무 눈이 높은 건가?”
시무룩한 안청모의 얼굴에 어쩌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경우는 가방 속에 챙겨온 대본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응? 이게 뭐야?”
“아, 제가…… 심심해서 단막극을 좀 써 봤는데요. 한번 봐 보시라구요.”
“어? 너 설마…….”
“아이,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심심풀이로 써 본 거에요. 제가 사실 단막극은 쥐약이라. 그냥 연출자의 시선으로 봐주시라 이거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러자 살짝 미소 짓는 안청모가 경우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동안은 작가와 조연출이라는 직함 탓에 사람들 앞에서 거리감을 두었다면 지금은 마치 처음 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나 대본을 건네주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알았어. 부담 없이 보면 되는 거지.”
“네, 아니 그렇다고 여기서 보시라는 게 아니고요.”
“원래 부침개도 지져서 그 자리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는 법이야. 대본을 받았으면 바로 읽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대본이 부침개는 아니잖아요.”
경우가 아무리 뭐라 해도 안청모는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조명 삼아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술도 마셨는데 글이 눈에 들어올까 싶었지만 그도 역시 어쩔 수 없는 드라마 중독자임을 경우는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