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5화 (45/250)
  • #45. 한 가지 상황, 백 가지 생각 (5)

    찰칵, 찰칵.

    카메라의 셔터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누르는 족족 이수현을 담은 사진이 컴퓨터 화면 위로 나타났다.

    처음엔 영 어색해하던 그도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러워졌다.

    모델 일이 처음인 이수현을 위해 김강철은 물론 경우까지 일일 매니저로 나섰다. 두 사람은 이수현의 사진을 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맨 얼굴일 때도 빛이 나더니 확실히 전문가의 손길을 받은 그의 모습은 신이 조각해 놓은 듯 완벽함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가장 즐거워하는 건 작가였다.

    “모델이 사진빨을 잘 받네. 본바탕이 좋기도 하지만 소화력도 괜찮고 생각보다 표현력도 좋아요. 진짜 처음 맞아요?”

    “다 작가님 덕분이죠. 작가님이 워낙 잘 찍어 주시니까 모델이 덕을 봅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 정도면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제가 얼마 전에 이해진 씨랑 같이 작업했는데 두 사람 붙여 놔도 수현 씨 전혀 밀리지 않겠어요.”

    이해진이라면 베테랑 모델로 광고주들의 사랑을 받는 모델 중 하나였다.

    “아유, 참 과찬이십니다. 어쨌든 우리 수현 씨 뜨면 다 작가님 덕으로 알겠습니다.”

    “될성부를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앞으로 분명 성공할 수현 씨 데뷔작을 제가 찍을 수 있게 되어 오히려 행운이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브랜딩에 사용될 A컷 사진을 고르기 위해 모두 고심했다. 여기서 선택된 사진들이 민지선의 결재를 거쳐 백화점에도 걸리고 신문 광고는 물론 인터넷 배너에도 사용될 예정이었다.

    어떤 사진이 선택되느냐에 따라 남성복 브랜드의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었으니 그만큼 선택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처음엔 자신에게 그런 끼가 없다며 거절하던 이수현도 결국 두 사람의 설득에 못 이겨 모델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분간 그의 매니저를 맡게 된 김강철은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를 잘못 둔 덕에 팔자에 없는 야근을 하게 생겼어.”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신난 거 아니냐?”

    “신나기는. 내가 언제? 나는 다 회사를 생각해서 열심히 한 것밖에 없어.”

    “그래, 회사 생각해서 컨셉 회의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그렇게 회사 일에 관심이 많은 줄은 처음 알았다.”

    “그래서? 꼽냐?”

    “누가 그렇대. 보기 좋다는 거지.”

    “하여간 쓸데없는 소리, 됐고. 야, 이 사진 어떠냐? 역시 수현이는 앞치마를 할 때가 참 잘 어울린다니까.”

    투덜대면서도 곧장 일에 열중하는 모습에 경우는 그만 웃고 말았다.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았나 생각하는 그때 경우의 상념을 깨기라도 하는 듯 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민경웁니다.”

    “네, 대표님.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혹시 시간 되시면 제가 이따 찾아뵈도 될까요?”

    경우는 그가 세운 계획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었다.

    * * *

    경우는 수현의 촬영을 마치자마자 ‘스튜디오 글로리’로 향했다. 마침 김종수 대표가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던 터라 경우는 주인 없는 대표실에 홀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을 닮아 넓지 않은 소박한 대표실 한쪽엔 각종 차와 커피는 물론 다기 세트까지 정리된 바테이블이 있었다. 평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김 대표가 직접 마련한 것으로 소탈하고 정이 많은 그의 성격이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대표실을 구경하고 있는데 마침 김 대표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유, 민 작가님, 오래 기다리셨죠? 바쁘신 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쁘긴요. 촬영도 다 끝나서 요즘 시간이 남아 돕니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구요. 오히려 대표님이 바쁘신 것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날 올 걸 그랬습니다.”

    “아유, 무슨 말씀을요. 일단 자리에 좀 앉아 계세요.”

    김종수는 경우와 마실 차를 직접 준비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를 차를 내밀자 경우가 운을 뗐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아침이 오기까지>가 벌써 480만을 넘었다구요.”

    <아침이 오기까지>는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의 뒤를 쫓는 범죄 액션극으로, 청불 등급을 받은 꽤 잔인한 영화였음에도 개봉 일주일만에 관객 200만 명을 돌파해 흥행 몰이를 하고 있었다.

    청불 등급을 받은 지라 처음엔 우려도 많았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관객이 늘었고 이미 손익분기점도 넘은 상태. 최근 흥행 속도가 더뎌지고 있었지만 500만을 넘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만약 500만을 넘는다면 역대 청불 영화 2위는 차지할 수 있을 거란 전망이었다.

    덕분에 <스테이>라는 드라마에 이어 영화까지 흥행이 이어지고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에 대한 관심은 물론 회사의 가치 또한 상승하는 중이었다.

    이전 생에서의 ‘스튜디오 글로리’가 첫 드라마 제작 후 송사에 휘말렸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그 역시 경우의 투자가 이끌어 낸 결과였기에 경우는 그 누구보다 기뻐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드라마와 영화를 계속해서 제작할 수 있음을 기뻐하는 것은 물론 가장 큰 투자자인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 늘어나는 것 또한 기쁜 일이었다.

    “축하는 제가 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셀룰러 메모리> 연일 기록 행진이라면서요. 이대로 가면 마지막 회 시청률 40퍼센트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하던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저 혼자 한 일인가요. 다들 열심히 해 준 덕분이죠.”

    “어쨌든 대본이 좋으니 그 정도 결과도 얻는 거 아닙니까.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 건가요?”

    “대표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저한테요?”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공동 대표직을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네? 공동 대표요?”

    “당황스러우시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투자 했으니 회사를 내놓으라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거 전혀 아닙니다. 경영엔 일절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작가님, 저 오해하지 않습니다. 작가님을 제가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납득하지 못할 황당한 요구를 하실 분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감사합니다.”

    김 대표 덕분에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경우는 어머니 윤정숙과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럼 작가님은 새명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신 건가요? 드라마 작가로 계속 일하고 싶으신 거구요?”

    “네.”

    “그러니 명목상으로라도 대표직이 필요하다?”

    “우선 그렇게라도 시간을 좀 벌려는 거죠. 건설은 아무것도 모르니 그나마 잘 아는 드라마 쪽에서 일을 도우면서 회사 경영하는 법을 배운다면 훗날 회사에 들어가도 도움이 되지 않겠냐 하는 핑계를 댈 생각인데…….”

    “그럼 어머니는 수긍하셨습니까?”

    “절반 정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예 안 된다고 못 박지는 않으셨으니 그나마 괜찮다고 보는 거죠.”

    경우의 이야기를 들은 김 대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우는 궁지에 몰렸던 상황이라 벗어나기만 하면 괜찮겠지 생각해 질렀던 거였는데 김 대표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거였다. 일단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가 거절할 경우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기에 경우는 조금 초조해졌다.

    “이것 참.”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드렸네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몸을 경우 쪽으로 내민 김 대표가 미소 지었다.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을 작가님이 대신 해 주시니…….”

    “네?”

    “실은 제가 대표직을 물러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너무 놀라지 마세요. 대표직만 내려놓는다는 거지 회사를 아예 그만둔다는 건 아니니까.”

    “그럼……?”

    “작가님, 제가 잘 다니던 SBC를 박차고 나온 이유, 아십니까?”

    “…….”

    “시청률만 생각하는 자극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정말 사람 사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때려치우고 나와 제작사를 차렸는데…… 막상 대표 자리에 앉고 보니 신경 써야 할 것,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더라구요.”

    “아무래도 대표 자리가 그렇죠.”

    “처음엔 회사가 아직 자리를 못 잡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알겠더라구요. 저는 대표를 할 그릇이 못 됩니다.”

    “대표님……”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작가님께 상의드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신 말씀해 주시니 솔직히 한시름 놓았다고 할까요.”

    “하, 하지만…….”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나 이 PD, 영훈이, 은호, 드라마 말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뜻을 모아 회사를 차리긴 했지만 다들 자리엔 욕심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전 생에서도 소송을 끝낸 후 김 대표는 대표직을 물러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대표 자리가 그의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 친구들 제가 힘들어하는 거 다 압니다. 그래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더군요. 다들 그 밥에 그 나물이거든요. 좋은 드라마 만들고 싶다는 거. 그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대표님 드라마를 제가 좋아하죠.”

    “처음엔 작가님 뒤에 새명이 있으니 전문 경영인을 모시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요. 이렇게 된 거 우선 작가님이 맡아 보시는 거 어떻겠습니까?”

    “절 뭘 믿어서요.”

    “바로 이런 점이요. 적어도 작가님이라면 우리 회사 망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까? 하하하.”

    걱정 없다는 듯 김 대표는 호탕하게 웃었다.

    “무책임한 거 아니냐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드라마도 잘되고 영화도 잘되고. 들어오는 돈의 규모가 달라지더라구요. 사람 냄새 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제가 대본을 보면서 시청률을 따지고 시나리오 보면서 손익분기점을 논하고 있더라구요.”

    “그게 현실이니까요.”

    “네. 꿈을 쫓아 나왔는데 꿈이 더 멀리 달아났습니다.”

    “…….”

    “작가님,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꿈을 쫓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좀 도와주시죠.”

    부탁을 하러 와서 오히려 부탁을 받아 버린 상황에 경우는 어쩔 줄 몰랐다.

    * * *

    박종연은 약속도 취소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셀룰러 메모리>의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 드라마에 조금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날 자신이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더라면, 우연히 만난 경우를 김동권과의 식사 자리에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이 결과를 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덕으로 <셀룰러 메모리>가 방송될 수 있었고 이렇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뿌듯한 기분도 들었다.

    거기다 매회 새롭게 이어지는 전개에 자극을 받은 그 역시 최근엔 시놉시스를 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힌 슬럼프에서 비로서 벗어난 것이다.

    처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것처럼 마지막까지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 것인지 종연은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온 그는 소파에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TV에선 이제 막 <셀룰러 메모리>의 마지막 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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