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4화 (44/250)
  • #44. 한 가지 상황, 백 가지 생각 (4)

    차이현이 기절한 사이 이번엔 그가 차이현의 손목을 묶었다.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를 향해 정보현은 비꼬듯이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속담이 있어. 뭔 줄 알아?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범인을 마주했을 땐 무조건 수그리고 들어가는 거다, 상대가 방심하도록. 그렇게 째려볼 게 아니라.”

    자신을 노려보는 차이현의 뺨을 보현은 후려쳤다. 반동에 비틀거린 그녀의 입이 찢어지고 피가 터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정보현이 미소 지었다.

    “따라해 봐. 살려 주세요.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그래야 동정심이라도 생기지. 너처럼 빈틈도 생길 거고. 근데 난 아냐. 그런 건 너 같은 멍청한 것들이나 하는 거지.”

    이번엔 반대쪽 뺨을 후려쳤다. 손이 아프다는 듯 잠시 찡그린 정보현이 손을 털었다.

    “인간을 동정하면 안 돼. 그러니까 결국 네 애비처럼 당하는 거야.”

    “주동자가 너구나. 최진만이 아니라.”

    굽히지 않는 차이현의 서슬에 정보현은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정보현이 광기에 휩싸여 있는 바로 그 순간 창고의 문이 열렸다. 놀란 정보현이 돌아보는데…….

    “컷!”

    마침내 김은기의 싸인이 떨어졌다.

    진이 빠진 도은철은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은철과 김예진의 열연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제법 긴 신을 NG 한 번 없이 원 테이크로 끝이 났다.

    기운이 다 빠져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그의 앞에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김예진이었다.

    “일어나시죠, 선배님.”

    김예진의 손을 잡은 도은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세게 때렸지. 미안하다, 예진아.”

    “맞은 사람은 난데, 선배님은 왜 그렇게 울상이에요. 아프다는 말도 못 하게.”

    “미안해서 그러지.”

    “별일이네. 사과를 다 하시고.”

    “내가 그렇게 철면핀 줄 아냐? 나도 알고 보면 여린 남자야.”

    “저 괜찮아요. 단번에 끝내시려고 세게 치신 거잖아요. NG라도 났으면 모를까 한 번에 끝났으니 제가 더 고맙죠. 전 몇 대 더 맞을 각오도 했거든요.”

    맞아서 그새 얼굴이 부었음에도 웃어 주는 그녀의 모습에 도은철은 조금 안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쪽에서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경우가 눈에 들어왔다. 경우를 보자 마자 화가 빡 솟아난 도은철이 씩씩대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거, 작가님! 정말 너무한 거 아니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여린 여자를 때리게 만들어요?”

    “죄송합니다. 악랄한 정보현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적잖은 연기 인생에 누구 뺨을 이렇게 때려 보긴 처음이야. 이러다가 연관 검색어에 폭행남이라고 뜨는 건 아닌지 몰라.”

    “풉.”

    김예진의 웃음에 도은철이 눈을 흘겼다.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럼 웃지 울어요?”

    “됐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냐.”

    “그나저나 선배님 이번에 다시 봤습니다.”

    경우에 말에 도은철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봤다.

    “연기를 잘하시는 줄 알았지만 이렇게 진심이신 줄 몰랐거든요. 전 선배님이 적당히 현상 유지만 하면 된다는 마인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습으로 그동안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송했습니다. 쉽지 않은 씬이었는데 오늘 정말 멋졌습니다.”

    경우가 사과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남아 있던 다른 배우들과 스탭들도 그의 열연에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선배님, 정말 멋있었습니다.”

    “완전 나쁜 놈 같았어요.”

    “진짜 죽여줬습니다.”

    “멋있어요!”

    “사람 때리고 칭찬받기는 내 처음이네.”

    괜한 쑥스러움에 도은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엔 혹시라도 자신이 실수해 NG를 내면 맞아야 하는 김예진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느 순간 그는 온전히 정보현이라는 인물에 몰입해 있었다.

    이렇게 연기에 진심인 적이 있었던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도은철은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경우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 참…….”

    복잡 미묘한 감정이 그를 감쌌다.

    그런 그를 보던 경우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대론 안 되겠어요. 마지막 회 대본, 선배님 나오는 부분을 좀 수정했으면 해요.”

    그러자 놀란 건 김은기였다.

    “아니, 작가님. 마지막 회 대본 괜찮던데 그대로 가시지 무슨 수정을 또 하시겠다고 그러세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 보니 이대로 끝을 내기가 너무 아쉬워요. 선배님,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자신의 손을 붙잡으며 간청하는 경우의 모습에 도은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김은기에게 동의를 구했다.

    “작가님이 이렇게 원하는데요, 감독님? 저는 기다릴 준비됐습니다.”

    “나참, 다들 이렇게 드라마를 위해서 뜻을 모으시는데 저라고 별수 있나요.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다음 촬영 시작되기 전까지 수정 끝내겠습니다.”

    서둘러 수정을 끝내겠다며 발걸음을 재촉한 경우를 보며 김은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작가님도 못 말린다니까.”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도은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몇 번 더 찍고 촬영이 끝나자 도은철이 지친 몸을 이끌고 대기실로 향했다. 막 세트장을 벗어난 그때 그 앞을 서성이던 황성준이 그를 보고 다급하게 다가왔다.

    “촬영 끝났어?”

    “형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같은 방송국에서 내가 어디 못 올 데라도 왔나?”

    “본인이 맡은 드라마 아니면 관심도 없으신 양반이니 그렇죠. 별일 아니면 다음에 봅시다. 제가 지금 좀 피곤해서.”

    그냥 가려던 도은철을 황성준이 붙잡았다.

    “저, 저기 혹시 민 작가 어디 있는지 아나?”

    “민 작가는 왜요?”

    “자네도 알잖아. SBC에서 민 작가 차기작 하려고 접촉한 거. 우리 방송국에서 발굴한 대박 작가를 SBC에 뺏길 수는 없잖아.”

    “그래서 차기작 제안하시려고요? 현석이한테 맡기게?”

    “응? 그야…….”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형님. 잘나간다 싶은 사람한테 빨대 꽂는 거 좀 그만해요.”

    “뭐야?”

    “행여나 민 작가가 차기작 같이하자고 하면 좋다고 하겠어요? 지난번 소문, 민 작가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하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힘 쏟을 시간에 실력 있는 작가도 찾고 배우도 찾고 그러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쏘아붙인 도은철이 성큼성큼 앞서가자 얼빠진 황성준이 이내 투덜대며 입을 열었다.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마침 수정을 끝내고 의견을 물으려 향하던 경우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세트장 안 김은기에게로 향했다.

    다음 씬 촬영을 위해 스탭들이 촬영 준비를 하는 사이 앉아 있던 은기에게 경우가 다가갔다.

    “감독님.”

    “네, 설마 벌써 수정 끝내셨어요?”

    “대충은요. 어쨌든 감독님 의견을 좀 물어야 할 것 같아서.”

    경우는 수정된 A4지 한 장을 김은기에게 건넸다.

    “이거 완전 쪽대본이네. 책 대본으로 시작해서 쪽대본으로 받는 거 우리도 하네요.”

    김은기의 농담에 경우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김은기는 경우가 건넨 쪽대본을 집중해 읽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확실히 이쪽이 더 임팩트는 있네요.”

    “네, 아까 선배님 연기를 보니까 정보현은 이런 식으로 최후를 맞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고생하셨어요.”

    “저야, 뭘. PD님이 더 고생이시죠.”

    “우리 유종의 미를 거둬야죠.”

    “네.”

    그렇게 <셀룰러 메모리>는 마지막 회 촬영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 * *

    밤새워 마지막 회 촬영까지 지켜본 뒤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경우는 녹초가 되었다. 피곤한 만큼 쓰러져 잠들 만도 한데 경우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았다. 이제 막 한 작품을 끝낸 탓에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망이 어느 때보다도 높아져 있는 탓이었다.

    SBC의 강진일을 만난 이후 차기작을 조금씩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조금 전 촬영을 마친 후 김은기와 안청모가 나눈 대화를 우연히 듣고 난 뒤부터 더욱 그랬다. 경우는 두 사람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 드라마 끝나면 너도 이제 입봉해야지.’

    ‘예? 제, 제가요?’

    ‘그만하면 배울 만큼 배웠고 단막극 연출할 실력은 되잖아.’

    ‘저 단막극 연출하는 겁니까? 언제요?’

    ‘곧 있으면 공모전 공고할 거다. 공모전 홍보도 할 겸 작년 공모전 당선작 제작에 들어가야지. 이건 국장님도 약속한 거니까 작품 선택부터 잘해 봐. 이번에 너 말고 입봉하는 PD들도 있으니까 작품 선점 잘해. 괜히 맘에 드는 거 뺏기지 말고.’

    ‘꼭 당선작에서만 골라야 하는 건 아니죠?’

    ‘왜? 아참, 너 작년 공모전 예심 봤지? 그때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도 찍어 놓은 거야? 그랬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건 아니고요. 당선작 중에 딱히 끌리는 게 없어서요. 어차피 데이터베이스에 다 저장되어 있을 텐데 운 없어서 떨어진 작품 중에 진주가 있을지 누가 압니까?’

    ‘하여간 욕심도 많은 자식. 진주 찾다 골병든다. 뭐, 어차피 네 고생이지 내 고생이냐. 열심히 해 봐. 모르는 거 있으면 웬만하면 알아서 하고.’

    ‘아, 선배!’

    “단막극이라…….”

    솔직히 경우는 사실 미니 시리즈보다 단막극이 더 어려웠다. 그도 공모전 당선을 꿈꾸며 단막극을 열심히 쓸 때가 있었다. 시간을 겨우 쪼개 공부해야 했기에 남들처럼 스터디에 참여하지 못했다.

    해서 차선책으로 겨우 알음알음 알게 된 사람들에게 감평을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니 좀 산만해요.’

    좋은 대답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기에 단막극으로는 공모전을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쪽으론 영 아닌가 싶어 좌절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내일 프로덕션’에서 주최한 미니 시리즈 공모전을 알게 되었고, 이왕지사 호흡이 긴 미니 시리즈를 써 보자 싶어 낸 게 결국 고명희한테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후로도 단막극은 써 본 적이 없었다. 굳이 필요도 없었고.

    아카데미 공모전에 재기 발랄한 작품을 써내긴 했지만 B급 감성 가득 넣은 문제작이었고, 대본에 자신 없어 때려 넣은 기발한 발상이 운 좋게 박종연 같은 대 감독의 눈에 들었을 뿐 절대로 방송에 적합한 대본은 아니었다.

    솔직히 미니 시리즈와 달리 경우는 자신이 쓴 단막극에는 자신이 없었다.

    넘지 못한 벽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 시도해 보고 싶단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서 경우는 생각날 때마다 기록해 놓은 아이디어 노트를 펼쳤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살펴보던 중 마침내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남편 살인 사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남의 30평대 아파트에서 살던 여자는 남편의 사업 실패 후 이사를 전전하다 결국 서울 외곽의 재개발 직전의 허름한 동네로 이사를 온다.

    피해 의식과 망상에 사로잡힌 여자는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적응을 힘들어하고 가뜩이나 남편은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첫사랑 준기를 만나고 그가 동네 개원의로 살아가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를 만나며 다시금 행복에 젖어 가는 그때 남편이 걸림돌처럼 느껴진 그녀는 남편이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소원을 신이 들어준 건지 남편은 안방에서 번개탄을 피운 채 자살을 하고 만다. 하지만 경찰은 자살이 아닌 타살로 확신하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아내를 지목한다.

    그러나 진범은 따로 있었으니…….

    그렇게 아이디어를 잡은 경우는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시놉시스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