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3화 (43/250)
  • #43. 한 가지 상황, 백 가지 생각 (3)

    아버지인 민홍준이 불 같은 뜨거운 성질의 사람이었다면 어머니 윤정숙은 얼음 같은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흔히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따뜻한 기억이 민경우에겐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섭고 눈치 보기에 바빴던 기억만 떠오를 뿐이었다.

    한 번은 민경우가 생일이라고 친구들에게 받아온 선물을 자랑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학교에 다녀온 사이 그 선물이 모조리 사라진 일이 있었다. 온 집안을 뒤지며 선물을 찾던 그에게 집안일을 돌봐 주시는 함양댁 아주머니로부터 어머니가 모두 버렸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울면서 이유를 묻는 민경우에게 그런 조잡한 물건은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이 없다며 필요한 게 있으면 사 줄 테니 말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는 그를 한번 다독여 주지도, 아팠을 때 밤을 새워 간호해 주지도 않았다. 민경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은 윤정숙의 비서이거나 함양댁 아주머니였다. 그래서 민경우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욱 어려워했다.

    지금도 자신의 속을 낱낱이 들여다볼 듯한 어머니의 시선에 경우는 태연한 척을 하려 무척 애를 쓰고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며 차를 마신 경우가 운을 띄웠다.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찾아 주셔서 감사해요. 점심까지 준비해 주실 줄을 생각도 못했어요.”

    “그래도 아들이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그냥 빈손으로 갈 순 없잖니.”

    “다들 고마워 하고 있을 거예요. 대신 감사드려요.”

    “엄마와 아들 사이에 별말을 다하는구나. 확실히 우리 아들, 철들었어.”

    “뭘요. 그나저나 많이 바쁘신 거 아니에요. 듣기론 기획 전시 준비하고 있다고 하던데.”

    “내가 바쁠 게 뭐 있니, 난 결재만 해 주면 되는 거란다. 그보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래, 용건이 있지 않고서야 여기까지 납실 리 없었다. 경우가 고등학교 시절 병원에서 퇴원하고 외갓집으로 갔을 때 어머니와 단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한 뒤론 단둘이 앉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일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건 핑계였고 이곳까지 그녀가 직접 찾아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입을 통해 무슨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지 경우는 긴장하고 있었다.

    “방송 일은 언제까지 할 거니?”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쓰고 있다는 드라마, 이제 종영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다? 마지막 회 원고까지 다 넘긴 걸로 아는데 내 말이 틀리니?”

    “아닙니다.”

    “네가 방송 일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뭐 어쨌든 방송 일도 한번 해 봤으니 그 정도면 되었다 싶은데. 이제 회사로 돌아왔으면 하는구나.”

    “저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드라마가 제 천직이에요.”

    “좋아하는 일만 할 순 없어. 애초 건설 쪽에 네 자리를 마련했다고 들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만 전부 다 해결되고 너도 안정을 찾은 거 같으니 제자리를 찾아야지?”

    “회사에 들어가는 게 제자리를 찾는 건가요?”

    “준호도 인도로 나간 마당에 준호의 빈자리를 네가 채워야지.”

    “그건 형이 싫어할 것 같은데요. 어머니도 들어서 아실 거 아니에요. 결국 형을 쫓아낸 건 전데 제가 형의 자리를 채운다면 다른 누구보다 형이 싫어하지 않겠어요?”

    “준호가 걱정된다면 그럴 거 없다. 내 말이라면 준호도 납득할 거다.”

    “싫습니다. 가고 싶지 않아요.”

    “좋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어. 새명의 일원으로 태어난 이상 너도 네 소임을 다해야지.”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선택만 하라는 건가?

    민준호도 그렇지만 어머니를 실제로 마주한 경우는 커다란 벽 앞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도 결국 답은 하나였으니 이대로 가다간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무작정 주장할 수도 없는 게 계속 거부했다간 이후 윤정숙이 취할 행동이 뻔했다. 자신의 힘과 재력을 이용해 경우의 일을 막을 게 분명했다.

    새명을 향한 그녀의 집요함은 이미 민경우의 기억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

    어쨌든 일생일대에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경우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마침내 빠져나갈 방법을 떠올렸다.

    “어머니 뜻 잘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건설 쪽 일을 시작하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아요.”

    “그래서? 설마 지선이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마세요. 그건 아니니까.”

    윤정숙을 안심시킨 경우가 살짝 미소 지었다.

    * * *

    촬영을 준비하던 도은철은 평소보다 더한 긴장감에 다리까지 떨었다. 촬영도 촬영이었지만 오늘 촬영분이 방송되고 나면 이제 자신의 이미지는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못 하겠다 생떼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 도은철의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저, 형님. 이제 곧 촬영 들어간다는데요.”

    “그래, 알았다.”

    매니저의 말에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리겠다는 듯 두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매니저가 놀라 봤지만 태연히 세트장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그저 촬영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넘기고 말았다.

    * * *

    어둡고 습한 창고 안.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던 정보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두 손이 뒤로 묶여 있는 탓이었다. 납치를 당한 것 같은데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거기다.

    “아, 머리야.”

    머리가 너무 묵직했다. 꼭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맞아. 거기서-.”

    “정신이 좀 들어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정보현이 잔뜩 경계한 채 돌아봤다. 어둠 속에 가려진 한쪽 구석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자 속에 가려진 여자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자 보현은 그만 놀라고 말았다.

    “다, 당신…….”

    위궤양에 시달리는 정보현이 거의 매일같이 들르는 경찰서 앞 내과의 여의사, 차이현이었다.

    “차 선생? 차 선생이 왜? 저기 차 선생.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야기부터 합시다. 이것 좀 풀어 줘요.”

    “싫은데요? 내가 왜 그래야 하죠?”

    “저기…… 차 선생이 잘 몰라서 그러는지 몰라도 나 경찰이에요. 까딱 잘못했다간 차 선생 가중 처벌받아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풀어 주면 이번 일 내가 문제 삼지 않도록 할게요.”

    “이것봐요, 정보현 수사과장님. 그쪽이 경찰인 건 내가 더 잘 알아. 근데 당신은 왜 여기 와 있는 건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에요?”

    “…….”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슨 죄를 지었는가? 왜요? 모르겠어요?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님 너무 많아서 하나만 고를 수 없는 건가?”

    “이봐, 차 선생. 뭔가 오해가-.”

    “오해? 하! 오해? 좋아요, 좋아. 그럼 이렇게 말씀드리죠. 황남도라고 하면 알겠어요?”

    차이현의 입을 통해 황남도의 이름을 들은 정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기억은 하는 모양이네요.”

    “너, 뭐야? 도대체 누구야?”

    “1997년 9월, 어린이 유괴 사건이 일어나죠. 다급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유괴범의 전화를 받으며 협상을 이어 가지만 돈 5천만 원을 결국 유괴범에게 강탈당하고 아이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옵니다. 기억나죠?”

    “…….”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은 공개 수사를 시작하죠 근데 범인의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비난하죠. 유괴범 하나 잡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이라고 말이에요. 그러다 기적적으로 범인을 잡아냅니다. 그 사람이 바로 황남도죠.”

    “…….”

    “그런데 황남도는 진짜 범인이 아니었어요. 전과가 있기는 했지만 사람 등이나 치지,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칠 정도로 악랄한 사람은 아니였거든. 그는 제법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알았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황남도는 확실한 범인이에요. 자기 입으로 실토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온갖 고문과 강압에 자백 안 하고 어떻게 버텨? 소중한 딸을 미끼로 협박까지 했잖아, 당신들. 자백하지 않으면 딸이 죽는다. 차갑게 죽어 버린 그 아이처럼!”

    “…….”

    “황남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그 역시 평범한 가장이었거든.”

    “서, 설마…….”

    “그래, 내가 바로 그 황남도의 딸이야. 당신들 때문에 난 아버지도 잃고 살던 곳에서 내쫓기듯 도망쳤어. 이름도 바꾸고 과거는 다 잊고 살아야만 했지. 과거를 버린다는 게 어떤 건 줄 알아? 자기 근본을 버리는 것과 같아.”

    “차 선생이 황남도 딸이었다니 유감이네요. 하지만 황남도가 범인인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차 선생이 어려서 믿고 싶지 않겠지만-.”

    “하하하. 이 지경이 됐는데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시겠다? 남의 일이라고 벌써 잊어버리신 모양입니다, 그때 저 협박하셨잖아요.”

    협박이란 말에 정보현은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 아이가 유괴되었던 그날, 아버지는 나랑 같이 있었어. 다음 날, 학교에 준비물로 가져가야 할 방패연을 만들고 있었거든. 우리 아버지, 손재주가 형편없어서 그날 날려 먹은 연이 다섯 개가 넘어. 오후 내내 나랑 연을 만드느라고 아버진 나갈 시간도 없었다고!”

    “…….”

    “내가 아무리 목에 피가 나오게 말해도 당신들은 듣는 척도 안 했지. 가족이라고 아직 어린애라는 이유로 말이야. 내가 사람들한테 말하니까 당신이 그랬어. 한 번만 그딴 식으로 입 놀리면 아버지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이야!”

    “…….”

    “그때 당신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그러니까 오해라는 헛소리는 더는 하지 마세요. 수사과장님. 난 물러날 생각 없으니까.”

    “그, 그래요. 미안합니다. 지금 생각이 나네요. 하지만 내 탓이 아니에요, 차 선생. 차 선생도 알아봤을 거 아냐. 그때 최진만 반장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나 같은 일개 나부랭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요. 몆 년 살다 나올 줄 알았지 사형까지 당할 줄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김반수를 죽여? 자기 개나 다름없는 사람을?”

    “그, 그걸 어떻게…….”

    “뭐, 당신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내 손으로 처리하려 했지만. 덕분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어.”

    “그, 그럼…… 정택이와 인석이를 죽인 게 바로…….”

    “그래, 나야. 근데 당신 그것도 모르고 최우진을 의심하고 그를 죽였지. 모든 죄를 그 사람한테 덮어씌워서까지 말이야. 이야, 그래도 아버지가 받아야 할 벌을 아들이 대신 받았네?”

    “사, 살려줘. 내가 다 잘못했어.”

    “우리 아버지도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근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잖아!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께 빌어. 그럼 알아? 혹시 살아날지?”

    “제, 제발…… 지금이라도 모든 걸 바로잡을게. 그때 누명 씌워서 그랬다는 거, 내 입으로 다 밝힐게. 그러니 부탁이야!”

    “너무 늦었어.”

    “다음달에 딸이…… 딸이 애를 낳아. 딸이 무사히 애를 낳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엄마도 없는데 아빠라도 옆에 있어 줘야 하잖아, 응? 그러니 제발…….”

    애절한 정보현의 말에 차이현은 멈칫했다. 처음으로 1등을 했을 때, 의대에 합격했을 때, 인생의 기쁜 순간 아버지의 빈자리 탓에 쓸쓸했던 그녀의 과거가 떠오른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보현의 계략이었다. 이현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동안 그는 묶여 있던 손목의 끈을 풀어냈다. 그리고 차이현이 정에 끌려 멈칫하는 사이 정보현은 그의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의자를 집어 그녀를 향해 던졌다.

    쓰러진 그녀를 향해 정보현은 말했다.

    “그러게 방심하면 당하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