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2화 (42/250)
  • #42. 한 가지 상황, 백 가지 생각 (2)

    “어쩌자고 또 여긴 온 거야?”

    무작정 걷다 보니 이수현의 가게 앞이었다. 그와의 만남 이후 경우는 종종 이수현의 가게를 찾았지만 차마 안에 들어가진 못하고 돌아선 게 여러번이었다.

    누가 볼 세라 돌아서는데 마침 가게에서 나온 이수현의 목소리가 경우의 뒤통수를 쳤다.

    “여기까지 왔으면 들어오지 왜 그냥 가는데?”

    그 말에 경우가 천천히 돌아서며 어색하게 웃었다.

    “잘 있었냐?”

    “들어와. 라면 끓여 줄 테니까. 참고로 우리집 라면값이 좀 비싸.”

    이수현을 따라 경우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예전 민경우의 기억이 떠올랐다.

    집을 싫어했던 경우는 이수현이 살고 있는 허름한 집에 자주 놀러 가 그가 끓여 주는 라면을 먹곤 했었다.

    마침 이수현이 내놓은 라면 국물을 맛본 순간, 오랜 시간 방황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때?”

    “그대로네. 옛날 먹었던 그 맛이야.”

    “그럼 안 되는데. 그때보다 실력이 늘었는데 당근 더 맛있어야지. 내가 지금 여기에 얼마나 사활을 걸고 있는데.”

    자존심이 상한 듯한 그의 모습에 경우는 피식 웃음이 났다. 경직되어 있던 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사장님, 여기 땡초라-.”

    들어서던 순간 경우와 딱 마주친 김강철이 슬금슬금 뒷걸음질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 모습을 놓쳤을 리 없는 경우가 손짓을 하며 그를 불렀다.

    “일로 와, 일로 와. 이게 어딜 튈라고!”

    도망칠 시기를 놓쳐 버린 김강철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도련님은 여기 어쩐 일이실까?”

    “라면 가게에 라면 먹으러 왔지 왜 왔겠냐. 근데 너는 여기 단골인 모양이다.”

    “아니야. 나 여기 몇 번 안 왔어.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아주 가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데 하필 수업이 끝나 가게로 들어온 송성희가 김강철을 보고 알은체를 하고 말았다.

    “사장 오빠. 치즈 라면 두 개요. 어? 사장 오빠 친구도 있었네? 안녕하세요.”

    “어어, 그래, 안녕.”

    “어쭈? 손님들도 알 정도로 단골인 모양인데? 거짓말하기는.”

    하필 자신을 알아보는 손님이 있을 줄이야. 되는 일이 없다며 탄식하고 있는 마당에 호기심이 인 송성희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이 오빠도 여기 사장 오빠 친구예요?”

    “오……빠?”

    “아저씨라니까!”

    “우와, 대박! 친구도 잘생겼어. 여기 물이 완전 좋지 않아?”

    옆에 서 있던 안다혜가 송성희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경우는 세대 차이의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쓰읍. 어린 게 어른들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쏘리. 기분 상했다면 미안요. 그냥 입시 스트레스가 너무 극심해서 그런 거라 이해하세요. 다들 겪어 보셨을 거 아니에요.”

    하지만 세 사람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축구를 그만둔 후 대학이 의미 없어진 이수현이나 돈으로 졸업장만 겨우 딴 경우, 대충 성적 맞춰서 4년제에 들어간 김강철까지.

    그런 상황을 알지 못한 송성희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에 의아할 뿐이었다.

    “뭐지? 이 뜨듯 미지근한 반응은? 하나도 공감을 못 하겠다는 얼굴이네.”

    “난 네가 그렇게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줄 몰랐다. 어때, 친구? 이 친구 공부는 좀 하나?”

    “그, 글쎄요.”

    “야, 너 왜 웃어? 그러니까 내가 꼭 못하는 거 같잖아.”

    “아니, 나는…… 사장님이 물어봐 주니까 그냥 기분이 좋아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말 걸어 주면 기분 좋잖아.”

    수줍은 듯 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안다혜였다.

    “못써. 저런 얼굴에 홀라당 넘어가면 안 돼. 솔직히 여기 사장 오빠, 성격은 영 아니잖니. 완전 독설가, 틈만 나면 공부나 하라는 잔소리만 하고. 저런 얼굴에 속으면 안 돼. 얼굴이 다가 아니야.”

    “그래도 남자 친구가 저렇게 생겼으면 좋을 것 같은데. 대학가서 저렇게 잘생긴 남자 친구 만났으면 좋겠다.”

    둘의 대화에 이수현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런 친구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송성희의 말에 꽂힌 경우는 누나인 민지선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기존에 익숙했던 모델들 말고 좀 새로운 얼굴이면서 이 사람이 내 남자 친구였으면 좋겠다 싶은. 한마디로 여심을 자극할 만한 사람!’

    경우는 천천히 이수현을 살펴봤다.

    잘생긴 얼굴, 운동을 그만뒀음에도 타고나길 건장하게 타고난 피지컬하며 요리 솜씨까지 뛰어난, 한마디로 누나 지선이 말한 조건이 다 들어맞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찾았다.”

    “?”

    어리둥절한 그를 보며 경우가 씩 웃었다.

    * * *

    “그래서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현이 걔를 우리 남성복 브랜드 모델로 쓰자고?”

    “누나 눈높이에 맞는 모델 못 구해서 아직도 런칭을 못 했다며? 아니야?”

    “그거야…… 근데 본인이 할 의지는 있고?”

    “설득해야지.”

    “그렇게까지 해서 걔를 모델로 써야 해?”

    “누나, 생각을 좀 해 봐. 새명 가지고 싶다며. 근데 가지기 쉽지 않잖아. 그렇다고 포기할 거야?”

    “그건 아니지.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건 손에 넣어야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엄청난 대화에 옆에서 잠자코 있던 김강철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김강철을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수현이가 바로 누나가 찾던 모델이라니까. 멀리서 찾을 거 뭐 있어. 누나만 오케이 한다면 설득은 우리가 해 볼게.”

    “그래도 솔직히 난 좀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현이면 우리 쪽 리스크가 크지 않아?”

    “걔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 밝혔을 겁니다. 하지만 뒤통수 치고 그럴 놈은 아닙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김강철까지 나서자 민지선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이거 둘이서 똘똘 뭉쳐서는. 꼭 걔 모델 못 만들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누나가 못 봐서 그래. 그동안은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딱 누나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모델 조건을 갖추고 있다니까.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좀 찍어올걸 그랬네.”

    “사진이라면 나한테 있어.”

    김강철의 말에 놀란 경우가 물었다.

    “야, 넌 언제 그런 걸 다 찍었냐?”

    “전에. 연예인 제의받는 거 보고 나서 혹시 몰라서 몰래 찍어 뒀지. 대놓고 찍으면 수현이가 질색팔색할 것 같아서 몰래 찍느라 혼났다.”

    “연예인 제의를 받을 정도야?”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서 종종 찾아오는 모양이더라구요.”

    김강철이 휴대폰을 내밀자 민지선이 화면 속 이수현의 모습에 집중했다. 몰래 찍은 사진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자연스러운 모습이 이수현의 현실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었다.

    “요즘은 앞치마도 되게 스타일리시하게 나온다. 이거 어디서 샀다니?”

    “누나는 지금 어디에 꽂힌 거야?”

    “얘가 뭘 모르네. 너 여자들이 앞치마를 예쁜 거 살 때가 언젠 줄 알아?”

    “언젠데?”

    “결혼할 때 신혼 살림 장만하면서. 평소엔 귀찮아서 앞치마 같은 거 안 하지. 근데 신혼이니까 요리하는 모습도 남편한테 예뻐 보이고 싶단 말이야. 그래서 화사한 색에 프릴 달리고 아기자기한 거 산다구. 그런 앞치마를 남편이 자기 대신 하고 요리를 하면 어떻겠니? 없던 귀여움도 생기는 거란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걸 꼭 해 봐야 아니? 뭐 그렇다는 거지. 근데 이 앞치마는 어두운 색에다 심플한 게 꼭 미대생이 그림 그리는 것 같잖아. 아니다, 그냥 이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다. 확실히 작품이네. 이렇게 보니까 귀여움보다는 뭐랄까…….”

    “요섹남?”

    “응?”

    “섹시하다고.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 몰라?”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 괜찮네. 그런 식이면 컨셉을 잡기도 쉽겠어.”

    앞으로 몇 년 후 요리 방송이 대거 쏟아지면서 요리하는 남자들이 주목받는 시대가 온다.

    요리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 남자들의 잔근육을 보며 여자들이 열광했더랬지.

    아무튼 경우의 요섹남 발언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눈높이에 맞는 이수현의 비주얼 탓이었는지 줄곧 부정적이기만 하던 민지선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좋아. 일단 그쪽 의견도 한번 물어봐. 우리 주장만 밀어붙일 수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예전 일은-.”

    “그건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두 친구가 똘똘 뭉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통에 민지선도 더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경우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 * *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셀룰러 메모리> 야외 세트장 바로 옆, 간이 천막 아래에선 현란한 요리 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촬영을 기다리는 이들도 촬영을 준비하던 이들도 막간을 이용해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의 메인 쉐프가 펼치는 요리 쇼에 모두들 눈길을 빼앗겼다.

    거기다 그 옆에서 연주되는 관혁악 4중주까지.

    장소는 허름한 천막 아래였지만 여느 호텔 뷔페 못지않았다.

    메인 쉐프의 시각을 사로잡는 화려한 솜씨는 물론,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에 다들 홀린 듯 끌려와 입맛을 다시는 중이었다.

    “이게 다 뭐래요?”

    “작가님 어머님이 오셨다는데?”

    “작가님 어머니요? 그럼 새명 그룹 회장 사모님? 어디, 어디 계신데요?”

    “어디 계시 건 뭐 하려고?”

    “인사라도 드려야죠.”

    “우리 같은 나부랭이가 인사는 뭐 하게. 경호원들한테 제지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그나저나 재벌 그룹 사모님은 확실히 스케일이 다르긴 하네요. 와, 나 이런 거 처음 봐.”

    “나도.”

    “사진 잔뜩 찍어서 자랑해야지.”

    마침내 준비가 끝나 식사 시간이 시작되자 촬영장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둘 접시를 들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안청모의 이끌림에 할 수 없이 뒷 자리에 선 김은기는 어쩐지 평소와 다른 이런 분위기가 어색해하기만 했다.

    “나는 이런 고급 음식은 입에 안 맞는다니까.”

    “그래서 지금 어디 식당이라도 가시게요? 여기 식당 멀어서 늘 밥차 오던 거 잊었어요?”

    “…….”

    “하여간 유난 떨지 말고 좀 드세요. 맞거나 안 맞거나 지금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을 지경이구만. 음식 가지고 차별하는 거 아닙니다.”

    “내가 언제 차별이라고 했냐?”

    “그게 아니면 뭔데요? 선배 아까부터 뱃속에서 전쟁 났는데 모른 척할 거예요? 됐으니까 뭐라도 먹읍시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어야죠.”

    안청모가 접시 하나를 들어 김은기에게 내밀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받아들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본 김은기가 안청모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작가님은 어디 계시냐? 아까부터 안 보이네.”

    “아, 어머님 모셔다 드린다고 가셨어요. 그나저나 작가님, 어머니랑 참 안 닮은 거 같죠.”

    “어딜, 완전히 판박이더만.”

    “무슨 소리예요. 아까 어머님이랑 악수하면서 선배 손 덜덜 떠는 거 다 봤거든요. 포스가 장난 아니시더만. 그런 여장부 근래에 본 적이 없네요. 순하디 순한 우리 작가님이랑은 완전 딴판. 그럼 작가님은 아버님 닮으셨나?”

    “얘가 뭘 모르네. 작가님 겉으론 순한 것 같아도 자기 의견 밀어붙일 땐 조근조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시는 분이야.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고.”

    “그런가?”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지만 어쨌든 눈앞의 음식에 집중한 안청모는 한입 가득 느껴지는 행복함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게 <셀룰러 메모리>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점심을 영접하고 있는 그때 경우는 촬영장의 멀지 않은 카페에서 어머니와 마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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