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한 가지 상황, 백 가지 생각 (1)
미술관과 문화 재단을 운영하는 윤정숙은 오랜만에 사무실을 찾아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귀환을 예당미술관의 부관장이자 윤정숙의 최측근인 김예신이 가장 반기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들어오셨네요?”
“자식 일인데 열 일 제쳐 두고 와야지.”
“이사님은 어쩌실 거예요? 회장님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준호가 인도에 가는 건 나도 어쩌지 못해. 그러게 멍청한 짓을 저질렀어. 누나나 동생을 경계할 게 아니라 형을 경계했어야지. 뭐 제 딴엔 작은 고비부터 넘기려 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누나나 동생의 마음까지 잃고 속내만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사님은 완전히 포기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하잖아. 일단 잘 달래서 인도로 보내야지. 저도 거기 가서 보면 생각이 많아질 거야. 저도 부족한 점이 뭔지 깨닫겠지.”
“이사님이 이사장님의 의중을 조금만 더 헤아렸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요.”
“자식 일이라는 게 내 맘대로 되나. 태어나길 그릇이 작게 태어난 것을. 그나저나 못 본 사이에 우리 막내가 딴사람이 됐지 뭐야.”
“그래요? 드라마 쓰신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내가 보기엔 이번 일 큰 그림 그린 게 막내 같거든.”
“한동안 걱정이 많으시더니 얼굴 좋아지신 게 그 이유였군요.”
“원래 야생마를 길들이면 천 리를 가는 명마를 얻는 법이야. 내 스타일 알잖아.”
미소 짓는 윤정숙을 보며 김예신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정말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게요?”
“아직은 아니야. 앞으로 그 애가 어떻게 하는지 봐서. 그나저나 이번에 나가서 수확이 괜찮았어. 예신 씨가 보기엔 어때?”
“좋은 작가들로 잘 구해 오셨던데요. 사모님들 취향에 딱 맞는 것들이더라구요. 역시 이사장님 안목은 탁월하세요.”
“그래, 한동안 쉬었으니 일해야지. 일단 신인 작가들 좀 키워 봐. 기획 전시가 좋겠지? 신인들 이름값 좀 올리려면 예신 씨가 솜씨 좀 부려야겠어.”
“맘에 드시도록 제대로 꾸며 볼게요.”
“그래, 신인 작가가 유명 작가가 돼야 그림값도 올라가는 거 아니겠어? 참, 따로 체크해 놓은 건 카탈로그 만들어서 사모님들께 연락드려. 아마 다들 내가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렸을 거야.”
“네, 준비하겠습니다.”
“작품은 언제나 돈이 되지. 돈은 돈을 부르고 말이야.”
윤정숙은 기대감에 미소를 지었다.
* * *
더워지는 날씨에 입맛을 잃은 도은철은 밥차 대신 시원한 냉면이라도 먹으려 식당에 나왔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꼭 누가 흘겨보는 기분이었는데…….’
괜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환대를 받던 그였다. 식당이라도 가면 아주머니들이 서비스라며 아껴 먹는 반찬을 내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최근엔 그런 게 전부 사라졌다.
그 모든 게 드라마 속에서 사실은 최우진을 뒤에서 압박하고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했던 게 그로 밝혀지고부터였다.
순직한 경찰 아버지를 둔 최우진은 아버지가 남겨 둔 사건 기록지를 토대로 소설을 쓴다. 그러다 사건 기록에서 이상한 사건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함께 일하는 팀원들과 모의해 사건을 조작했던 것.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한 가족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라도 밝히려 하지만 이 사건에 얽힌 수많은 이들 탓에 결국 최우진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 아버지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오랫동안 최우진을 돌봐 준 정보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도은철이 맡은 정보현은 출세를 위해 과거 사건을 덮는 것은 물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도은철의 재발견이라며 그의 연기가 인정받고 차기작 제안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어쩐지 정작 본인은 심란하기만 했다. 매니저는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이 굴고 있었다.
“아, 형님! 어제 방송에서 형님이 최우진한테 박규영을 죽이고 싶지 않으면 직접 쏘라고 했을 때 정말 소름. 진짜 끝내줬지 말입니다.”
“그러냐?”
“요즘처럼 전화 많이 받는 적 처음입니다. 이러다 올해의 악역상, 발암유발자로 등극하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그건 또 뭐냐?”
“인터넷에 드라마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름 상을 주는 건데 어쨌든 그만큼 형님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서 넌 좋으냐?”
“좋다마다요. 형님의 활약은 곧 저의 자랑 아닙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항상 지금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형님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어디 속이라도 안 좋으신 겁니까?”
“됐다.”
딱히 나쁠 건 없었다. 배우가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는 것만큼 뿌듯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후 제안 들어오는 것도 죄다 악역에 광고는 얼마 되지 않는 것까지 다 끊겨 버렸으니 실속이 있는 일인지 솔직히 그로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 고명희가 이쪽에서 거의 내쳐지다시피 했던 일이 경우의 손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에, 안 그래도 사서 걱정인 그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너, 민 작가에 대해서 얼마나 아냐?”
“민 작가요? 새명 아들에 이번에 처음 드라마 쓴다는 것 정도?”
“너도 아는 게 별로 없구만.”
“솔직히 민 작가가 자기 얘기는 거의 안 하더라구요. 회식 때도 주로 듣기만 하거든요. 근데 민 작가는 왜요?”
“그냥 좀 찜찜해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거 민 작가 아니에요?”
“응? 어디?”
매니저의 말마따나 저쪽에서 민 작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차피 식당 안이라 보이지도 않을 텐데 몸을 숨기자 매니저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형님?”
“야, 얼른 가자. 대기해야지.”
“아직 시간 충분합니다. 그러지 말고 뭐 하는지만 슬쩍 보고 오죠. 혹시 여자 만나나?”
미행이라도 하는 듯 앞장서는 매니저 탓에 도은철은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어느 카페로 들어간 경우가 누군가를 만나 악수를 청하자 매니저가 놀란 듯 외쳤다.
“어? 저 사람!”
“누구? 보여?”
“SBC 강진일 CP요.”
“강진일이? 그 사람이 왜 민 작가를 만나? 경쟁작 하고 있지 않아?”
“그러게요. 스파인가?”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됐으니까 얼른 가자.”
“무슨 이야기하는지만 살짝 듣고 올까요?”
“됐으니까 가자고!”
도은철은 호기심 많은 매니저를 겨우 끌고 세트장으로 향했다.
마침 세트장에는 경우가 마지막 회 대본을 탈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중이었다.
“야, 이제 정말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네요.”
“무슨 소리야. 대본이 다 나왔다는 거지 아직 촬영은 많이 남았는데.”
“그래도 작가님이 손 터셨으니 앞으로 방송국엔 안 오시겠죠?”
“아쉽냐? 아예 안 볼 사람도 아니고 같이 또 작업할 날도 있겠지.”
“근데 마지막 회 어떻게 끝날까요? 그 억울하게 누명 쓴 사형수 자식이 정말 차이현일까요?”
“나중에 대본 나오면 보지 뭘 물어?”
“궁금하니까 그러죠.”
“그나저나 작가님 그러면 벌써 퇴근하셨나? 항상 인사는 꼬박꼬박 하시더니…….”
대기하고 있던 배우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들어선 도은철의 매니저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작가님 요 앞에서 SBC 강진일 CP 만나고 있던데요?”
그의 말에 주변은 찬물을 뿌린 듯 고요해졌다. 자신을 향한 이들의 시선에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눈치 없는 그를 향해 도은철이 냅다 뒤통수를 갈겼다.
“아, 왜요?”
“눈치는 밥 말아 먹었냐? 넌 그냥 일로 와.”
도은철은 매니저의 귀를 잡고 그를 끌고 갔다.
그때 강진일과 만나고 있던 경우가 귀를 긁적였다.
“누가 내 이야기하나?”
“네?”
“아, 아닙니다. 어디까지 얘기했죠? 계속하시죠.”
경우의 말에 강진일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작가님의 차기작을 저희 방송국에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네? 아직 드라마가 끝난 것도 아니고 차기작을 논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요. 명실상부 드라마 한 편으로 스타 작가가 되셨는데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야죠.”
“스타 작가라니…… 말도 안 됩니다.”
“아직 실감을 못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셀룰러 메모리>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호평을 받고 있지만 가장 주목 받는 건 역시 드라마를 쓰신 작가님 아니겠습니까? 저희 SBC는 이번 드라마의 성공에 작가님의 능력이 가장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죠.”
“저희 드라마나 절 좋게 봐 주신 걸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제가 다작을 한 작가도 아니고 이제 딱 한 작품을 했을 뿐입니다. 솔직히 그런 말 있잖아요. 첫작이 막작이다.”
드라마 작가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많이 도전하는 방법이 바로 공모전이었다. 해마다 공모전에 지원하는 드라마 작품 수만 해도 수천 편.
결국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만 당선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해서 지망생들은 심혈을 기울여 대본을 쓰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쏟아 부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쥐어짜서 쓴 첫작인 탓에 차기작은 첫작만 못하다는 징크스도 존재했다.
그러니 데뷔작보다 못한 차기작, 혹은 데뷔작이자 유일한 흥행작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방송가에서 사라지는 작가들도 허다했다.
물론 그 모든 징크스를 깨 버리는 넘사벽의 실력을 가진 이들도 분명 존재했지만.
어쨌든 경우는 지금 그런 점을 꼽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선 딱히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같은 시간대를 두고 드라마로 경쟁을 하는 처지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 적은 아닙니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죠. 그러니 작가님에 대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책 한 권 수정이 가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어쨌든 저희도 알아볼 만큼 알아봤습니다. 그러니 작가님의 능력,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두고 기우라고 하죠. 그리고 저희도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이 한 작품만 하고 끝낼 사람인지 아닌지는 보면 압니다.”
“…….”
“작가님만 오케이 하신다면 작가님이 원하는 감독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건 물론 원하시는 시기의 편성도 가능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SBC에도 이름난 PD 많습니다.”
자신을 향해 이렇게까지 말하는 강진일의 모습에 경우도 조금은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셀룰러 메모리>가 끝난 것도 아니었으니.
그런 경우의 마음을 읽은 강진일이 그의 숨통을 트여 주었다.
“뭐 아직은 망설여지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좋은 대답 주셨으면 좋겠군요.”
계속 드라마 작가로 일할 작정이었지만 생각보다 이른 차기작 제안에 경우는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이야 선택지가 없었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지만 사실 방송국마다 선호하는 드라마의 방향이 조금씩은 다른 탓에 이번엔 고민이 되었다.
공영 방송인 KBC가 보수적이며 가족 중심이었다면 MBS는 참신한 시도로 트렌드를 이끌어 가려는 경향이 있었고 SBC는 시청률 우선 주의라 자극적인 소재가 많이 쓰였다.
강진일과 헤어진 후 방송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원고도 넘기고 온 마당에 돌아가 봐야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 경우는 생각을 정리할 겸 무작정 걸었다.
자신도 모르게 정처 없이 걷던 경우가 맛있는 냄새에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너와 함께 라면.’
다름 아닌 이수현의 가게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