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40화 (40/250)

#40. 되로 주고 말로 받기 (4)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뺨을 만졌다. 한 번 맞아 본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준호가 지금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멍한 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준호는 민 회장의 뒤에 선 지선의 모습을 그제야 확인했다. 자신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준호는 이를 부득 갈았다.

“난 형제간에 싸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때론 그게 좋은 경쟁을 유도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넌 선을 넘었어!”

“아버지-.”

“새명을 건드리는 짓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뭔가 오해가 있는-.”

“오해? 아직도 할 말이 많은 모양이구나. 그럼 삼자대면을 해야지. 들어오라고 해!”

혹시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준호의 머릿속은 그동안 준비해 둔 그가 해야 할 말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최지열 상무, 그리고 또 한 사람 경 실장이었다.

경 실장이 왜?

얼어붙은 준호의 모습을 확인한 경 실장은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민 회장 앞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게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이사님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민지선 대표님이 썸 어패럴을 인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승진 대표가 그런 사람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이사님은 모두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지시를 내리셨고…….”

최지열과 경 실장의 진술에 사색이 된 준호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아시잖아요. 이거 다 누나가 꾸민 일이에요.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할아버지한테 지분을 상속받지 못해서 누나가 절 질투했어요. 이건 누나가 저한테 앙갚음하려는 거라고요.”

“…….”

“누나가 회사가 욕심 나서 이 사람들을 다 포섭하고 저한테 누명을 씌우려는 거예요. 제발 믿어 주세요.”

바로 그때였다.

‘수현이는 나한테 가장 친한 친구였어. 나를 나로 봐 주는 유일한 친구였다고. 그런데 형이 그랬지. 사실은 그게 아니다, 다 너를 속이고 있다, 네가 새명 그룹 아들이니까 네 옆에 붙어 있는 거다, 수현이를 의심하게 만들었잖아. 형만 아니었어도 그때 내가 그런 실수……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해. 그렇다고 네가 한 짓이 내가 한 게 되지는 않겠지만. 순진한 우리 동생, 걘 돈 때문에 네 옆에 있었던 거야. 결국 아버지한테 한몫 챙겼잖아.’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네. 형이 처음으로 불쌍해졌어.’

‘불쌍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강철이라고 했나? 네 옆에 붙어 있는 애. 걔도 결국 똑같아!’

‘형!’

‘조용히 말해. 귀 안 먹었어. 순진한 내 동생, 다른 사람 말 믿지 마. 내 말을 믿으라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잖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걔들 보단 형을 믿어야지. 가족들 생각은 안 해? 아버진? 더는 실망시키면 안 되잖아.’

경우가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그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여과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식을 벗은 준호의 민낯이 그렇게 드러났다.

“어머, 내 휴대폰이 어디 갔나 했더니 네가 가져간 거였니?”

지선은 태연하게 경우에게서 자신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룸으로 들어오기 전 지선에게 빌려 그들이 나눈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했던 거였다.

그러게, 언제 어디서건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니깐.

“오늘 인도 고위 관료와 미팅 있었다는 보고받았다. 준호 넌 당분간 인도로 나가 있거라. 도로든 공항이든 뭐가 되었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네 손으로 직접 해.”

“아, 아버지!”

“두말하지 마. 더는…… 날 실망시키지도 말고. 내 아들이니까 이 정도 선에서 끝나는 거야. 가서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반성해야 할 거다.”

돌아서는 민 회장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준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태가 그렇게 끝나자 하나둘 밖으로 빠져나갔다. 영혼이 빠져나간 채 빈 껍데기만 서 있던 준호를 보던 경우가 룸을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입을 열었다.

“형 말이 맞았어. 아버진 자식인 나보다도 새명이 더 중요하신 분이라는 거 말이야.”

경우의 말에 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근데 그건 형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난 나만 그런 거라고 생각해서 우울했었거든. 근데 그게 아닌 걸 알아 버렸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다. 다 형 덕분이야.”

“민경우, 너 이 자식!”

“흥분하지 마. 겨우 그깟 일로 흥분하면 사람이 너무…… 추해 보이잖아.”

살짝 미소 지은 경우가 산뜻한 얼굴로 호텔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준호는 소리를 지르며 손에 잡히는 게 뭐가 되었든 다 던져 부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준호는 생각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자고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으니.

“이대로 죽을 순 없어!”

준호는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가 운영하고 있는 예당미술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머니 어디 계신지 알아요? 어머니한테 전화해야겠어요.”

그리고 이틀 후,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으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의 급한 전화를 받은 윤정숙이 마침내 귀국했다.

* * *

“우리 막냇동생 생각보다 무서워. 경 실장까지 끌어들일 줄이야.”

“밖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결국 내부 고발자를 이길 순 없는 법이야.”

“근데 경 실장 의외네. 그렇게 돌아설 줄은 몰랐는데.”

“형이 최지열한테 한 짓이 있는데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충성해서 뭐 하겠어? 경 실장도 실속을 생각한 거야.”

“하긴 그 정도 돈이면 충성보단 실속이지. 난 네가 그렇게 통이 큰 줄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눈엣가시 같던 형을 내쫓은 소감이 어때?”

“소감은 무슨. 솔직히 기분은 좀 별로네.”

“그래서 높은 자리가 어려운 법이란다. 정에 이끌리지 말고 사람을 쳐내야 할 때는 가차 없이 쳐야 하거든. 그게 혈육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지선의 얼굴이 경우의 눈에는 무척 쓸쓸해 보였다.

“나하고는 안 맞아. 난 드라마만 쓰면서 살래.”

“다행이네. 막냇동생하고도 척을 지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누나!”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참, 윤경화 씨는 어떻게 됐어? 그래도 이번 일의 일등공신인데.”

경우의 말대로 신문사의 직원을 포섭해 놓은 덕분에 기사 문제는 잘 해결이 되었다. 어쨌든 협조를 해 준 덕분에 윤경화가 더는 ‘ch.팩트’에서 일할 수 없는 건 자명했다.

“우리 홍보팀에 입사하기로 했어. 보니까 스펙도 괜찮고 실무 경험도 있어서 빠르게 적응할 것 같더라고.”

“다행이네.”

모든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지선과 경우의 휴대폰의 거의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네? 어머니가요?”

같은 내용의 전화를 받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날 저녁, 윤정숙은 오랜만의 귀환에 가족들 모두를 불러들였다. 물론 준호를 제외하고.

며칠 전 화기애애했던 식사 시간과는 달리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에 경우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역시나 민 회장이었다.

“당신이 어쩐 일이야? 1년에 절반은 외국에서 보내는 사람이.”

“내가 내 집에 오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혹시 준호 일이라면 그만둬. 이번엔 준호 잘못이 커.”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다 큰 자식이라고 하지만 잘못을 했을 때는 따끔하게 가르쳐야죠. 걱정 마세요. 저도 아닌 일에 무조건 밀어붙이지 않아요.”

“그렇담 다행이고.”

“참, 듣자 하니 경우가 드라마를 쓰고 있다고?”

“네, 엄마. 경우가 생각보다 일을 잘 하고 있어요.”

“경우한테 물었는데 지선이 왜 네가 대답해?”

“그, 그게……. 죄송합니다.”

“그래, 끼어들 때와 끼어들지 말아야 할 때를 분간해야 하는 법이란다.”

“네, 엄마.”

“어쨌든 우리 아들이 드디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니 한번 보고 싶구나. 내가 촬영장에 찾아가도 되겠니?”

“……그러세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아들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를 경우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다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 어쩐지 전신에 기가 빨린 듯한 예원은 털썩 소파에 앉아 정현을 향해 물었다.

“어머님 갑자기 왜 들어오신 걸까요?”

“당신 어머님 말씀 못 들었어? 집이니까 오셨다잖아.”

“혹시 준호 도련님 때문은 아니시겠죠?”

“당신도 참. 준호가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머니도 어쩌지 못하실 거야.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해.”

“전요, 솔직히 어머니 신경 쓰여요. 아버님보다도 훨씬 어렵다구요.”

“어머니가 좀 다가가기 힘든 분인 건 사실이지. 그렇지만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어머니가 회사에 그렇게 영향력이 큰 분도 아니고.”

“그렇지만 아버지 말씀에 새명의 실세는 어머님이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장인어른이?”

“네. 어머니가 저렇게 보여도 이사진들 꽉 쥐고 있다고 조심하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장인어른까지 걱정 끼쳐서 죄송하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 나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앞날을 대비해서 지금 이사진들 포섭 중이야. 확실한 후계자가 되려면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얘기 안 했잖아요.”

“당신까지 걱정시킬 거 뭐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해. 정 어려우면 그때 가서 말할게. 그럼 장인어른 힘 좀 빌려 보지 뭐. 괜찮지?”

“그럼요, 아버지는 제가 원하면 뭐든 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걱정 마. 어차피 어머니 얼마 안 있다가 또 외국으로 나가실 거야. 쓸데없는 데 신경 쓸 시간에 아버지 신경이나 써 드려. 며느리가 당신 하난데 이 틈에 점수 많이 따야지.”

“그래야겠네요.”

“두고 봐. 새명은 반드시 내 것이 될 테니까.”

정현은 예원의 옆에 앉아 불안해하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이.

* * *

홍세환이 띄워 놓은 연예 기사란엔 수목극과 관련된 헤드라인이 가득했다.

[수목극 춘추 전국 시대, 막 내리나]

[시청률 1위 탈환한 ‘셀룰러 메모리’ 굳히기 돌입]

[무명 신인 우재환의 대발견]

[배우들의 호연과 탄탄한 대본으로 시청자들 호평]

[SBC의 ‘사랑, 또 사랑’ 시청률 또 하락]

다음 페이지를 넘겨서도 온통 ‘셀룰러 메모리’에 대한 헤드라인에 홍세환의 얼굴이 구겨졌다. 세환은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강진일 CP 내 방으로 좀 오라고 해.”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강진일은 방 안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느꼈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홍세환이 이렇게 된 것은 단 하나, 역시 시청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던 가운데 세환이 입을 열었다.

“진일아.”

“네, 형님.”

“도대체 수목극 어떻게 된 거냐? 분명 우리가 시청률 1위였던 걸로 아는데?”

애초 <사냥개>가 예정대로 방송되었다면 방송 3사의 수목극이 동시에 출격할 판이었다. 하지만 <사냥개>의 제작 중단으로 은기에게 3주간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셀룰러 메모리>의 방송이 미뤄졌고 SBC나 KBC는 먼저 새 드라마 방송을 시작했다.

그 결과 SBC의 <사랑, 또 사랑>이 시청률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셀룰러 메모리>가 방송되고 강범석으로 바람몰이를 시작한 이후 무섭게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시청률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잠깐 엎치락뒤치락하기는 했으나 최근 시청률은 더욱 격차가 벌어지며 더 이상의 역전을 노리기 힘들게 되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죄송합니다.”

“내가 그런 말 듣자고 지금 이러는 거 아니잖아. 분명 먼저 시작했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어. 서주혁과 대본의 조화가 좋다고 난리도 아니었잖냐.”

“…….”

“그래서? 반등될 기미는 없는 거야?”

“냉정하게 보자면 그렇습니다. 우리 드라마는 갈등이 거의 해결된 상태고 곧 종영만을 남겨 두고 있기 때문에…….”

눈치를 보던 강진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솔직히 말해. 너도 그쪽 드라마 봤지?”

“……네.”

“그럼 하나만 더 묻자. 넌 저쪽 드라마 성공 요인이 뭐라고 보냐?”

“주연 배우가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연출도 괜찮다는 평이 있지만 탄탄한 대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유는?”

“장르물의 특성상 시청자들과의 두뇌 싸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시청자들은 보는 내내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방식으로 사건이 벌어졌는지 추리하죠. 만약 그 추리가 자신의 예상과 맞아떨어진다면 보지 않습니다. 시시하다는 거죠.”

“근데 그 드라마는 아니다?”

“네, 매회 예측 불가능한 전개에 복선도 적절하게 들어갔고 무엇보다 다음 편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모든 건 단연 대본의 힘입니다.”

“그렇다는 거지. 그럼 두말할 거 뭐 있냐, 그 작가 잡아. 차기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SBC에서 할 수 있도록 반드시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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