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9화 (39/250)
  • #39. 되로 주고 말로 받기 (3)

    인도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인도 정부 고위 관리 방문에 맞춰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에서 미팅을 가졌던 준호는 만남이 끝나자 곧장 스위트룸으로 향했다.

    준호는 들어서자마자 초조한 마음에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런 그의 앞에는 굳은 얼굴의 경 실장이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조태식의 행방이 묘연하다?”

    “죄송합니다. 조태식한테 사람을 붙여 놓긴 했는데…….”

    “그 사람도 소식이 없다고요?”

    “사람을 풀어서 찾고 있으니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잖습니까. 그때 작업했던 다른 신문사들도 있잖아요. 그쪽과 다시 접촉해 보세요.”

    “그러려고 했는데 하나같이 다 어렵다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사를 해 봤더니 누군가가 벌써 손을 쓴 모양입니다.”

    “손을 쓰다니요?”

    “그 신문사들 모두 누군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인상착의가 같은 게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찾아온 이후 다들 말을 바꾸는 게-.”

    “그건 이미 우리 작업을 눈치챘다는 거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합니까?”

    “죄송합니다.”

    “그 죄송, 죄송, 죄송 소리 좀 그만하세요!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데요? 설마 박 실장입니까?”

    “아닙니다. 남자였습니다. 짧은 머리에 눈썹 위에 기다란 상처가 있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경우가 데리고 다니던 그 놈?”

    “김강철 대리입니다.”

    “하!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번번이 막고 있는 게 경우다, 이 말입니까? 하하하, 하하, 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호가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경우한테 당했다는 사실에 그는 실성한 사람마냥 웃어 버렸다.

    “말도 안 돼요. 경우가? 그 자식,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놈이라고요.”

    “두 분 사이가 어땠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최근 민경우 씨의 행보가 여느 때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 탓에 회장님의 인식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애써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경 실장의 지적은 틀린 게 없었다.

    확실히 최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가 원했던 자신의 말만 잘 듣는 착한 동생은 어디에도 없었고 형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는 동생만 있을 뿐이었다.

    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사님?”

    “아무래도 경우를 만나 봐야겠어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말 안 듣는 강아지는 버릇을 고쳐야죠. 경 실장은 조태식이 행방 찾아서 내 앞으로 데리고 오세요.”

    “김강철이 데리고 있으면 어쩌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손아귀에 있어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네, 이사님.”

    방을 나가는 경 실장을 보며 준호는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열다섯 살 무렵, 공부하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간식을 가지러 가던 중 거실에 어머니와 외삼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내용이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준호는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나, 준호 아직 어려. 어린애한테 후계자니 뭐니 너무 부담 주지 마. 저 나이에는 놀기도 하고 견문도 넓히고 그래야지. 하루 종일 후계자 수업이다 뭐다, 난 준호가 불행하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돼.’

    ‘그럼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거니? 너처럼 아무것도 안 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여자들 만나고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 거야?’

    ‘누나 말을 해도 꼭.’

    ‘저마다 사는 모습이 다르듯이 각자가 느끼는 행복도 달라. 준호, 힘들어도 그 애가 원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창업주이신 아버님이 지목한 후계자야.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는 게 그 아이한텐 더 불행할 뿐이야.’

    ‘그건 강요지. 누나의 욕심이고.’

    ‘그래, 맞아. 내 욕심이야. 그래서? 내 아들로 태어났고 남들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가졌으면 준호도 나를 위해서 하나쯤은 희생해야 하지 않겠니?’

    ‘누나 욕심은 누나가 해결해. 준호한테 강요하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서지 마.’

    ‘내가 모르긴 뭘 몰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여자하고 같은 사는 기분, 네가 아니?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은 사람한테는 상대가 안 돼. 그 사람은 죽었으니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 두고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현이 보면서 그 여자 그리워하고 있는 네 매형 볼 때마다 내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야, 그걸 안다고?’

    ‘어차피 사랑해서 한 결혼 아니잖아.’

    ‘그래. 사랑해서 한 결혼 아니지. 근데 그럼 나한테 뭐가 남는데? 마음 하나 가지지 못했는데 내가 낳은 자식한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야?’

    ‘누나…….’

    ‘네 매형이 나를 그 여자 생각했던 것의 10분의 1만큼이라도 생각했다면 나도 이러진 않았을 거야. 근데 그 여자가 남김없이 다 가져가 버렸어. 회사까지 그 여자 아들이 차지하는 꼴, 나는 못 봐.’

    ‘그럼 준호는? 솔직히 준호는 사업하고 맞지 않아. 걔는 예술적인 감성이 풍부한 애야. 정 누나 욕심을 채우고 싶다면 차라리 지선이 낫지 않아? 지선이 누나를 닮아서 똑부러지잖아.’

    ‘나라고 그런 생각 안 해 봤겠니? 나도 준호보단 지선이가 더 낫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선인 안 돼.’

    ‘왜? 딸이라서? 하여간 사돈어른도 참 고집불통이야. 능력만 있으면 됐지, 아들이건 딸이건 무슨 상관이야.’

    ‘아버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어. 지선이가 시집가게 되면 지선이가 낳은 자식은 민씨 성을 따르지 않아. 지 아빠 성을 따르지. 새명의 주인이 민씨가 아닌 다른 성씨가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하니?’

    ‘그게 어때서?’

    ‘너도 유진 그룹에 윤씨 집안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거 원하지 않잖아.’

    ‘회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맡는 거야.’

    ‘위선 떨지 마. 너도 막내만 아니었으면 오빠 밀어내고 그 자리, 차지하고 싶은 마음 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난 아냐. 누나가 잘못 알았어.’

    ‘그래. 그렇다고 해 두자.’

    ‘어쨌든 준호 너무 닦달하지 마. 누나 때문에 안 그래도 어린 게 가뜩이나 말랐어.’

    ‘준호 내 자식이야. 아무렴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내 자식 걱정 덜할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준호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경우가 컸다면 모를까.’

    ‘설마 누나 경우한테도 준호한테 하듯이 할 작정이야?’

    ‘카드는 여럿 있는 게 낫잖아. 준호든 경우든 가능성만 보이면 난 그 아이한테 내 모든 것을 걸 거야.’

    ‘누나 정말…….’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은 그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가족사를 이해할 만큼 머리가 클 때까지 새명의 후계자는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하나뿐인 동생이 자신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준호의 충격은 상상했던 것보다 컸다. 그에게 있어서 새명은 그의 전부였고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의 것을 동생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준호는 동생을 자신의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만두어서는 안 되는 대상, 경계해야 하는 존재.

    그때 그가 찾은 한 권의 책.

    준호는 그 책을 읽고 생각했다. 경우를 자신의 말 한마디에 절절 매는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들기로.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고 완전히 아버지의 눈 밖에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띵동.

    초인종 소리에 준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경우였다.

    “뭐야,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어?”

    “왔냐? 들어와.”

    “어쩐 일이야? 형이 나를 다 부르고.”

    “형, 동생이 오붓하게 술 한잔할 수도 있는 거지. 일단 앉아. 너도 한잔해야지.”

    “됐어. 저녁에 일해야 해.”

    “퇴근했으면 쉬는 거지 일은 무슨.”

    “높은 자리에 앉은 이사님은 모르시겠지만 프리랜서는 먹고사느라 퇴근이 따로 없답니다. 낮이고 밤이고 일해야 먹고살아요.”

    “그래, 하는 일은 어때? 지난번엔 제대로 이야기도 못 해 봤는데. 재미는 있어?”

    “형이 어쩐 일이야? 나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난 언제나 너한테 관심이 많았지.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됐으니까 용건만 말해.”

    “우리 동생, 많이 변했네. 옛날엔 내 말이면 껌벅 죽었는데 말이야.”

    “그러게. 난 형이 참 좋았거든. 형은 언제나 내 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난 네 편이야.”

    “그래? 근데 그 말이 왜 진심처럼 안 느껴지지?”

    “…….”

    “정말 날 아꼈으면 그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가만히 있는 사람 왜 건드려? 기어이 내가 형한테 칼끝이라도 겨눠야 직성이 풀리겠어?”

    “우리 동생,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시네. 그래, 아닌 척하지만 넌 언제고 나한테 덤벼들 놈이었어.”

    “핑계 대지 마. 형이야 말로 아무도 믿지 못하잖아. 그래서 모두 자기 손아귀에 두고 마음대로 하려고 하잖아.”

    “…….”

    “형이 믿는 사람이 있기는 해? 경 실장은 믿나? 뒤에서 수작 부릴지 어떻게 알아? 조태식, 경 실장이 나하고 편 먹고 빼돌린 거란 생각은 안 해?”

    “역시 조태식 빼돌린 게 너구나. 무슨 수작질이야?”

    “무슨 짓이긴. 형이 나한테 했던 짓이지. 그러게 왜 나를 괴물이 되게 만들었어? 왜!”

    “형은 네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수현이는 나한테 가장 친한 친구였어. 나를 나로 봐 주는 유일한 친구였다고. 그런데 형이 그랬지. 사실은 그게 아니다, 다 너를 속이고 있다, 네가 새명 그룹 아들이니까 네 옆에 붙어 있는 거다, 수현이를 의심하게 만들었잖아. 형만 아니었어도 그때 내가 그런 실수…… 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해. 그렇다고 네가 한 짓이 내가 한 게 되지는 않겠지만. 순진한 우리 동생, 걘 돈 때문에 네 옆에 있었던 거야. 결국 아버지한테 한몫 챙겼잖아.”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네. 형이 처음으로 불쌍해졌어.”

    “불쌍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강철이라고 했나? 네 옆에 붙어 있는 애. 걔도 결국 똑같아!”

    “형!”

    “조용히 말해. 귀 안 먹었어. 순진한 내 동생, 다른 사람 말 믿지 마. 내 말을 믿으라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잖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걔들 보단 형을 믿어야지. 가족들 생각은 안 해? 아버진? 더는 실망시키면 안 되잖아.”

    “형은 결국 어떻게 해도 어쩔 수 없구나.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무슨 말이야? 뭘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러게. 그 불쌍한 애를 왜 또 건드려? 가만뒀어야지.”

    경우는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동안 날 생각한 형의 마음이 자극해서 말이야, 나도 형을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그러고는 휴대폰을 준호에게 내밀자 화면 속 동영상에서 조태식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돈을 준다기에 그만. 월세에, 직원 월급에, 들어갈 돈은 많은데 신문사는 문을 닫게 생겼으니. 그래서 정말 어쩔 수 없이 돈 욕심에 그만…….’

    ‘지금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 최대한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거라고.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 이름이요? 알죠. 알다마다요. 새명건설에 경두열 실장이라고 하던데…….’

    경 실장의 이름이 나오자 경우는 동영상을 꺼 버렸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 협박하는 거야? 내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협박은 지금 형이 하는 거지. 그리고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주는 건데 형, 협박은 약점을 잡은 쪽이 하는 거야. 잡힌 쪽이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 믿고 있나 본데, 아버지가 널 믿어 주실까? 아버지 너 안 믿어. 네가 한 짓이 있는데 요즘 조금 잘나간다고 아버지가 널 믿어 주실 거라 착각하지 마.”

    “상관 없어. 어차피 내 목적은 하나니까.”

    “……목적?”

    “형을 무너뜨리는 거. 형이 그토록 바라는 새명의 후계자 자리, 절대 앉지 못하게 하는 거! 그러게 내가 싫으면 차라리 나한테 해코지를 하지 그랬어. 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까지 건드려선.”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경 실장이 온 거라 생각한 준호는 어떻게든 저 휴대폰을 빼앗아서라도 이 위기를 모면하자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하지만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민 회장이었다.

    “아, 아버지.”

    준호는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 경우가요, 글쎄.”

    하지만 민 회장은 그대로 준호의 따귀를 갈겼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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