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되로 주고 말로 받기 (2)
“오빠, 오빠, 그게 정말이에요?”
바쁜 등교 시간, 밥을 굶고 학교에 가는 학생들이 라면보다는 좀 더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신메뉴를 개발하느라 수현은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열어 놓은 가게 안으로 성희가 들어와 나불대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수줍어 말도 못 건네는 아이들 사이에 저세상 친밀감을 자랑하며 이것저것 물어대는 통에 성희는 수현에게 조금 귀찮은 존재였다.
얼굴을 한껏 들이밀며 눈을 깜빡이는 그녀를 보자 수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빠 아니고 아저씨!”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가 나이가 몇인데 너 같은 핏덩이한테 오빠는 좀 아니지 않냐?”
“다른 아저씨들은 오빠 소리 못 들어서 안달인데 오빠는 왜 그래요?”
“별종이라 그런다. 떫냐? 그럼 오지 말든가.”
“헐. 손님은 왕이라고 그랬는데 정말 손님한테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건 내 맘이지. 어떤 마음으로 손님을 대하느냐는 가게 주인인 내가 정하는 거다. 손님인 네가 나한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
“확 불매 운동 해 버릴까 보다.”
“너의 패기를 응원하마.”
“아, 진짜 짜증나. 어떻게 한마디를 안 져요? 됐어요. 나, 아저씨 미워할 거야!”
“그거야 네 맘이고. 할 일 없으면 얼른 가서 공부나 해. 여기 들락거리는 것보다 그게 네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
“생긴 것만 오빠지 완전 꼰대! 우리 엄마랑 아빠하고 완전 똑같애! 아저씨 잘생겼다는 거 취소! 아저씨 못생겼어요!”
그러더니 성희는 정말 쌩하니 가 버렸다. 씩씩대며 돌아가는 성희의 모습에 수현을 피식 웃고 말았다. 저렇게 가 버려도 또 언제 그랬냐 싶게 달려올 정도로 성격이 좋은 아이임을 알기에 수현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넌 안 가? 왜 그러고 있어?”
성희와 항상 붙어 다니던 단짝 다혜가 뿔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뚫어져라 수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전 아저씨 잘생겼다고 생각해요.”
“나도 알아.”
“…….”
“농담이야, 그렇게 볼 거 뭐 있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뭐가? 뭐가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실은 아까 성희한테 들었는데요. 아, 성희는 제 친구 이름이에요. 아까 가 버린.”
“그래, 알았어. 그런데?”
“걔네 오빠가 무슨 기사를 읽었다고. 아저씨 축구 선수였다면서요? 인터넷에 아저씨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고 하던데요. 정말 축구 선수였어요?”
“선수라기보다는…… 어릴 때 잠깐 했지. 근데 그런 기사가 나왔어? 내 사진도 같이?”
“아저씨 옛날 사진이었대요. 걔네 오빠가 축구 덕후라 컴퓨터로 맨날 그런 것만 본다고 성희랑 자주 싸우거든요. 근데 아저씨 사진이 있어서 놀랐대요. 사진이 지금이랑 너무 똑같아서 처음엔 아저씨가 축구 선수를 한다는 얘긴 줄 알았대요.”
“그래?”
갑자기 기사가 났다는 말에 의아한 수현은 가게 한쪽에 놓아둔 컴퓨터로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없는데? 정말 그런 기사가 났어?”
“어? 이상하다. 거짓말 아니에요. 분명 성희가 봤다고 그랬어요. 안 그러면 우리가 아저씨 축구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래, 오해 안 하니까 걱정 마. 근데, 혹시 무슨 기사였는지 알아? 어떤 내용인지 말이야.”
“글쎄요…… 제가 거기까지는 잘 못 들어서요. 죄송해요.”
“아니야, 알려 줘서 고마워. 참, 이것 좀 먹어 볼래? 내가 요즘 개발하는 신메뉴거든.”
수현은 만들고 있던 토스트를 다혜에게 건넸다.
“우와,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하나 더 줄 테니까 아까 그 친구한테 전해 주고. 학교 늦겠다. 너도 어서 가야지.”
“네, 고맙습니다. 저는 친구들한테 아저씨 가게 홍보할게요.”
돌아서는 다혜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지만 수현은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10년 만에 경우를 만나고 온 바로 다음날, 수현은 기사가 나왔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무척 신경 쓰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 * *
막 출근을 하던 준호는 자리에 앉자마자 기대감에 손가락 스트레칭을 했다.
기사를 본 사람들이 경우의 과거를 문제 삼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승승장구하던 경우의 드라마는 시청률 하락을 겪게 될 것이고 결국 하차 요구, 그의 몰락을 초래할 게 분명했다.
경우의 몰락은 곧 지선의 몰락이었으니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걸리적거리는 이들을 치워 버릴 생각에 준호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수백만 원짜리 최신형 컴퓨터가 빠르게 부팅되고 인터넷 접속을 시작한 순간, 준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준호는 키폰을 눌렀다.
“경 실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경 실장이 들어오자 준호는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내가 지시한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겁니까?”
“네?”
“돈을 먹였으면 돈 먹은 값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기사 제대로 올라간 것 맞습니까? 도대체가 왜 아무 반응이 없냐고!”
“분명 제가 조태식, 그 사람이 올린 기사를 확인했습니다.”
“무슨 기사요? 경우가 기부한 거? 아니면 봉사 활동해서 사람들 호감 산 거?”
“아닙니다. 분명 말씀하신 대로-.”
“내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는 겁니까? 이리 와서 확인해 봐요. 조태식 그 인간이 무슨 기사를 어떻게 썼는지!”
인터넷 창에는 준호가 말한 대로 경우나 그의 드라마팀에 대한 호평 가득한 기사가 일색을 이루고 있었다.
[<셀룰러 메모리> 팀 어린이 병동 방문, 환아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
[시청률 공약 달성, 훈훈한 모습]
[승승장구 <셀룰러 메모리> 팀 시청률 굳히기 돌입]
[어린 환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한 <셀룰러 메모리>팀]
[어린이 희귀 질환에 관심을 부탁한 배우 우재환]
당황한 경 실장은 ‘ch.팩트’ 사이트에 접속했다. 조태식이 운영하는 ‘ch.팩트’가 너무 소규모라 소식이 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하지만 ‘ch.팩트’ 사이트의 그 어디에도 그가 확인했던 ‘축구 유망주 이수현 사고의 전말’이라든가 ‘인기 드라마 작가의 실체’에 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셀룰러 메모리>의 작가 민경우가 팀의 이름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거액을 기부했다는 사실만 나올 뿐이었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신 겁니까? 확실하다고 했잖습니까!”
분명 확인까지 했던 사안이 이렇게 덮일 줄은 생각도 못한 경 실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혹시 회장님이 나서신 건-.”
“그럴 리 없어요. 아침에 아버지 뵀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셨단 말입니다.”
“회장님이 직접 나서지 않으셨어도 손 실장님이 있지 않습니까.”
“벌써 손석중 그 인간이 손을 썼다?”
손석중은 민홍준 회장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새명에 관한 기사를 그가 모두 확인하고 관리한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보다 기사의 양이 많습니다. 이건 스캔들이 벌어졌을 때 다른 기사로 덮는 수준입니다.”
확실히 연예 면을 <셀룰러 메모리>가 대다수 차지할 정도로 기사가 많기는 했다. 모두 새명에 우호적인 신문사에서 올린 기사들이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준호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조태식, 그 인간부터 만나 보세요. 정말 손석중이 손을 쓴 거라면 그 편이 더 빠를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시한 돈의 절반만 줬으니 돈맛을 본 조태식이 남은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물러날 리 없었다. 어디선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을 거라 위안하며 ‘ch.팩트’ 사무실로 찾아갔다.
하지만 굳게 잠긴 문을 보며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시나 싶어 깡패 짓을 일삼는 사촌 동생에게 조태식의 감시를 지시했지만 그도 연락두절. ‘ch.팩트’ 사무실에서 아까부터 울리고 있는 전화벨 소리가 마치 사촌 동생의 것인 것 같아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각, 전주 대비 상승한 시청률 덕분에 2위를 차지한 SBC 드라마와 더욱 격차가 벌어지자 <셀룰러 메모리> 팀은 자축을 벌이고 있었다. 경우가 쏘는 간식차 덕분에 촬영 중 휴식 시간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다 올해 전체 시청률 1위 달성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좋은 일도 하고 시청률도 올라가고. 일이야 재미도 있지만 힘든 점도 많은데 이렇게 즐겁게 일하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아.”
“맨날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봉사 활동 같은 거 꿈도 못 꿨는데 생각보다 즐거워서 다음에 또 가 보려구요.”
“그래, 이런 일은 오래 지속하는 게 좋지.”
“이왕이면 그런 모임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뜨사모 어때요? 뜨끈한 사람들의 모임이요.”
“누나, 보기보다 마음이 뜨끈하시군요.”
“내가 뭐? 어째 수혁이 네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다?”
“아유, 그럴 리가요.”
“너 되게 능글맞아졌어.”
마치 남매 같은 예진과 재환의 아웅다웅을 지켜보던 청모가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경우한테 물었다.
“그나저나 작가님, 기부는 또 언제 그렇게 하셨대요?”
“맞아요. 그렇게 좋은 일이 있었으면 저희한테 말씀을 하시고 하시죠.”
“얼마 안 되지만 저도 좀 보탰을 거예요.”
“여러분들 모두 참여하셨습니다.”
“예? 난 아닌데.”
“지난번 시청률 내기하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제가 1등해서 가져갔잖아요. 거기다 제가 조금 보탠 것뿐입니다.”
“작가님! 정말 뜨거운 사람은 여기 있었네. 이럴 게 아니라 오늘 우리 회식이라도 하죠. PD님이 쏘시는 걸로.”
“옳소! 옳소!”
“난 또 왜 끌어들여?”
“죄송하지만 제가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는 좀 빠지겠습니다.”
“예? 작가님 때문에 하겠다는 건데 주인공이 빠지시면 어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중요한 선약이 잡혀 있어서요.”
“하는 수 없죠. 회식은 다음에 해요.”
“아니, 저 빼고 하시라니까요.”
“작가님 없이 무슨 재미로요. 안 해, 안 해.”
청모의 투정 어린 소리에 살며시 미소 짓던 경우는 배우들과 스탭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철이 뒷자리에 문을 열어 주자 경우가 올라탔다. 차 문이 닫히는 순간 경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어디로 갈까?”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로.”
“정말 괜찮겠어?”
“우리 형님한테 속담 하나 알려 주려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 거 말이야.”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경우의 모습에 강철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며칠 전, 강철을 통해 경 실장이 수현을 찾고 있음을 알게 된 지선은 경우를 불러 사실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본인만 모르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혹시 연관이 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철은 경우의 신상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사라진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각하게 생각하던 지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그 기사도 준호 쪽에서 손을 쓴 것 같은데. 이 자식, 완전 머리 썼네. 어차피 메이저 신문사에 내 봤자 손 실장이 알아서 처리할 걸 안 거지. 그래서 영세한 업체를 통해 간을 본 거고.”
“그럼 수현이 일이 기사로 나올 수 있다는 거야?”
“왜? 걱정돼?”
“내 걱정 보다는 수현이가 또 휘말릴까 그게 걱정이지. 잘 지내고 있다는데 괜히 들쑤시고 싶지 않아. 안 그래도 미안한데.”
“그럼 기사를 막아. 이미 기사가 퍼진 뒤에 수습하려면 늦어. 사람들은 나쁜 것만 기억하거든. 그게 진짜든 아니든. 퍼지는 건 순식간이지만 수습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니?”
한참을 고민하던 경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누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알아?”
“누군데?”
“가장 가까이에서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내 편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람.”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강철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왜 나를 봐?”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그리고 어제, 경우를 비롯한 드라마 팀원들이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철은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ch.팩트’의 조태식을 제외한 유일한 직원, 윤경화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지금 대표님이 기사 작성해서 올리라고 문자를 보냈거든요.]
자고로 끈끈하지 못한 의리는 돈 앞에서 신기루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