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7화 (37/250)
  • #37. 되로 주고 말로 받기 (1)

    이놈의 학교, 등교가 좀 늦었다고 불러다가 일장 연설을 할 게 뭐냐며 민경우는 투덜거렸다. 아버지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학부모 면담 후 담임의 고나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들어 기분도 좋지 않은 상황에 경우는 어차피 하나 마나한 공부, 수업이나 째자며 잠긴 교문을 대신해 담벼락 주위를 살피던 중이었다.

    “하여간 귀찮게 왜 교문을 잠가 놓는 거야?”

    담벼락을 쓰다듬던 그의 머리 위로 가방이 툭 떨어진 건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경우가 뒤로 나자빠졌다.

    “으아악, 뭐야?”

    일어서던 그는 위에서 내려온 발길질에 한 번 더 나자빠지고 말았다.

    “오우씨, 미안하다.”

    “하! 미안?”

    “내가 지금 사정이 좀 급하거든. 그러니까 이만.”

    가려는 녀석을 붙잡은 건 민경우였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그만이냐?”

    “안 죽었잖아. 오버하기는. 왜? 어디 다쳤어? 머리도 멀쩡하고 팔, 다리 멀쩡하네. 괜찮은 거 같은데 내가 좀 바빠서. 이제 나 가도 되지?”

    학교 선생들조차 그의 얼굴만 봐도 슬금슬금 피했다. 그런데 일개 학생이 발길질을 해 놓고도 그냥 가려는 모습에 민경우는 어이가 없었다.

    “야, 너 나 몰라?”

    “풉, 이 새끼 웃긴 놈이네. 연예인이냐? 아니면 뭐, 어느 나라 왕자라도 돼?”

    그의 얼굴이 명함이고 신분증이었다. 그런데 외계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알아서 기어야 할 놈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모습에 다소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널 알아야 할 이유가 있어? 자의식 쩌네.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세상이 널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에서 보면 너나 나나 먼지 한 톨일 뿐이야.”

    “그거야 너같이 가진 건 쥐뿔도 없는 놈들이 하는 개똥 같은 소리지.”

    “뭐?”

    “하긴, 너 같은 그지 새끼들이 뭘 알겠어. 쥐구멍에 볕들 날만 기다리면서 뻔하게 살다 죽겠지. 근데 난 너랑은 달라. 세상은 내 위주로 돌아가고 있거든. 그러니까 내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라.”

    “…….”

    “또 혹시 아냐? 내 앞에서 꼬리라도 흔들면 내가 귀여워해 줄지. 그지 새끼가 귀여워 봐야 역겨울 뿐이겠지만.”

    “아하, 어느 잘사는 집 도련님이신 모양이네. 아이고, 몰라 봐서 미안함다. 이야, 역시 돈이 좋아. 다들 공부할 시간에 농땡이나 치고.”

    “그러는 지는.”

    “먹고살기 바쁜 나랑 네가 같냐? 같을 수가 없다고 한 건 너야. 그새 까먹은 걸 보니 머리는 좀 나쁜가 보네.”

    “그렇지. 안 봐도 뻔한 불쌍한 그지 새끼 인생.”

    “그래, 맞아. 나 가난해. 근데 그게 뭐? 너 같은 도련님은 평생 모르겠지, 성취감이라는 거. 네 손으론 아무것도 못 하잖아. 나한텐 부자 부모 만나서 그 능력 등에 지고 어깨 힘 주고 다니는 어린애로밖에는 안 보여.”

    “그게 어때서? 남들은 못 가져서 안달인데.”

    “그래서 좋겠다고. 근데 너네 부모님도 그렇게 생각하셔? 내가 볼 땐 아닌 거 같은데. 너 같은 게 내 자식이면 난 좀 부끄러울 것 같다.”

    하필 그날 아침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잔소리를 해 대던 말을 떠올린 민경우는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덕분에 그의 주먹이 녀석을 향해 날아갔다.

    “뭘 안다고 지껄여!”

    이후 엎치락뒤치락 싸움판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 그 상대가 수현이었다. 두 사람은 그 일 이후 절친이 되었지만 민경우는 자존심 탓에 그날 일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기억에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여간 뭔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흑역사요, 손발이 절로 오그라들 지경이니.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지 경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그러다 자신을 보고 있는 수현의 시선을 느끼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 옛날 생각이 좀 나서.”

    “그래?”

    “어떻게 지내?”

    “라면 가게 하고 있어. 장사가 제법 잘돼. 몇 년만 더 일하면 건물 하나 더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해외파 선수를 키워 보겠다고 후원에 나선 모 기업에 발탁된 축구 유망주였다. 예정대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면 지난 월드컵에서 국가 대표가 되어 큰 활약을 펼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꿈을 향해 한없이 날아오르던 녀석이 먹고사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 경우는 어쩐지 좀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아니,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맞았다.

    “미안……하다.”

    “뭐가? 아니, 이제 와서?”

    “너무 늦었지? 미안해. 용서해 주길 바라서 하는 말이 아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 땐 이미 정신 병원이었다. 사과를 할 틈도 뭣도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 병원을 나온 뒤에라도 수현을 찾아가 사과했어야 하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민경우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너무 늦었네.”

    “…….”

    말 한마디론 천 냥 빚을 갚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한 번이 안 된다면 수십 번, 수천 번, 진심을 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 일부러 너 잊고 살았어. 넌 내 치부니까. 내 잘못으로 네 미래를 망쳤으니까. 그때 내가 그런 생각만 하지 않았더라도-.”

    “너 원망 많이 했다.”

    “……당연하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기다렸는데 너 병원에 한 번도 안 오더라.”

    “그, 그건…….”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넌 끝내 안 나타나더라고. 그래서 처음엔 미웠고 나중엔 화가 났어. 다리가 망가져서 축구를 못한다는 것도 그랬지만 친구도 잃어버렸으니까.”

    “…….”

    “그래서 네가 지금에 와서 이런다고 진심으로 느끼지 않았을 거야. 그냥 내 얼굴 보니까 하느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을 테지.”

    “그래, 당연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지.”

    “뭐래. 너 지금 내 얘기 제대로 안 듣지?”

    “어?”

    “그랬을 거라는 건 지금은 아니라는 거잖아.”

    “뭐?”

    수현이 하는 소리를 들으며 경우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얼마 전에 필규 삼촌 만났어. 네가 요즘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취재 차 역산 경찰서를 갔다가 만난 노필규 경사로부터 수현의 이야기를 들은 경우는 이후 생각이 많아졌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고 해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해서 경우는 노필규를 다시 찾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런 그에게 노필규는 이렇게 말했다.

    ‘제대로 사과한 적 있습니까? 없죠? 그럼 사과부터 하세요. 용서받겠다는 마음은 버리시구요. 피해자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백 번이든 천 번이든 하는 게 사과입니다. 작가님한테 필요한 건 용서가 아니라 사과 같군요.’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우는 이후 노필규의 말대로 학창 시절 민경우가 괴롭혔던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사과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사과하려 했다.

    그 사실을 수현이 알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원래 오지랖이 넓잖냐. 그래서 필규 삼촌한테 네 이야기 듣자마자 정훈이 찾아갔다. 걔가 그러다라. 졸업해서 더는 네 얼굴을 볼 일이 없었는데도 힘들었다고. 근데 네가 찾아온 덕에 조금은 치유받는 것 같았대. 진심으로 사과를 받는 게 어떤 건지 처음으로 느꼈다나 봐.”

    “그나마 다행이네. 나한텐 그런 말 안 하더니.”

    “그래서 기다렸다. 나한텐 언제 올까 하고 말이야.”

    “……가려고 했었어. 가려고 했었는데…….”

    “알아. 그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건지. 솔직히 너 옛날부터 백 말고는 깡도 뭣도 아무것도 없었잖아.”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줄곧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더니 그 모습에 수현은 어쩐지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함께 웃고 놀고 걱정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시절로.

    만약 노필규로부터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삼촌이 그러시던데. 너 드라마 작가라며?”

    “어…….”

    “이제보니 강철이 그 자식은 그런 말도 안 해 주고.”

    “강철이 만나?”

    “우리 라면 가게 가끔 와서 먹고 가거든. 그 자식, 너에 대해선 한마디도 안 하데. 내가 물으면 조금 대답해 주는 게 전부라 그래서 얼마 전에야 알았어. 그때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

    “언제 한번 라면 먹으러 와. 나 맛있게 잘 끓여.”

    “저기, 수현아…….”

    “너를 용서하고 말고, 그건 지금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온전히 네 탓도 아니잖아……. 여기까지 오는 것만 해도 너무 오래 걸렸으니까…… 앞으로 얼굴은 보고 살자. 나도 묵혀 둔 과거처럼 찝찝하게 남기고 싶지 않거든.”

    “미안해…… 고맙고. 나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너는…….”

    “그거야 모르지. 유학을 갔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유럽 얘들 다 호날두게? 유럽 리그 들어갔어도 벤치만 지키고 있다가 그냥저냥 이름 없는 선수로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야.”

    “아냐, 넌 분명-.”

    “사람 일, 장담하는 거 아냐. 네가 볼 때 지금의 내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나름 만족하면서 살아. 적어도 잘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은 없으니까. 항상 나쁘기만 하면 어떻게 사냐. 안 좋은 날이 가면 좋은 날도 오는 거지.”

    “…….”

    “난 가 보지 않은 길을 두고 후회하는 짓은 안 하기로 했어. 그냥 오늘 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수현이가 참 커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존재, 친구로서 존경했지만 그래서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던 질투의 대상.

    여전한 그의 모습에 경우는 민경우의 복잡했던 심정이 조금은 이해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회포를 풀고 있는 사이 몰래 숨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태식의 손놀림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금테 안경의 남자는 보이는 것 만큼 깐깐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 남자가 내민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 태식이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굽니까?”

    “10년 전, 축구 유망주가 나타났다며 떠들썩했던 일, 기억하십니까?”

    “알죠. 프랑스 월드컵 때 오렌지 군단에 5대0으로 패하고 이런 식으로 월드컵 준비 어떻게 하냐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잖아요. 외국 선수들과 겨뤄도 밀리지 않는 선수를 키워야 한다고…… 어? 이 사람, 그때 그…….”

    “맞습니다. 이수현 선수. 갑작스러운 사고로 결국 축구를 그만두게 되었지요.”

    “축구 팬들 뿐만 아니라 연예인 뺨치게 잘생겨서 여성 팬들도 많이 아쉬워했었죠. 근데 갑자기 그때의 일은 왜 꺼내시는 겁니까?”

    “그때 이수현 선수가 축구를 그만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습니까?”

    “네? 글쎄요.”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예?”

    “그리고 그 일에 새명이 연관되어 있고요.”

    “새, 새명이라면…… 혹시 새명 그룹?”

    갑자기 등장한 새명의 이름에 태식이 머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자가 내민 몇 개의 단어들로 어렵지 않은 사실 하나를 유추할 수 있었다.

    “혹시 새명 그룹 민홍준 회장의 자식이 학교 폭력으로 축구 유망주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이겁니까?”

    “조금 더 취재를 해 보시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알게 되실 겁니다.”

    먹고 싶지만 삼키기엔 너무 큰 먹이였다.

    “미안하지만 새명의 일이라면 기사를 쓸 수 없습니다.”

    “왜요? 겁나고 두려우십니까?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 하나 있는 직원의 월급, 은행에 잡혀 있는 대출금과 이자가 더 두려운 거 아니고요?”

    “그, 그거야……”

    “기자님은 아직 먹고살 만하신 모양입니다. 저라면 새명의 압박보다 주머니 사정이 더 무서울 것 같은데. 혹시 압니까, 새명에 거슬릴 만한 기사를 올렸다가 새명에서 기사를 내리는 조건으로 무언가를 내걸지 말입니다.”

    “…….”

    “기자님,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죠. 기자님이 이 상황을 이용해 보세요. 기자님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입니다. 기자님은 지금 펜을 들고 있잖습니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두 사람의 대화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태식은 결국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는 온갖 자극적인 문구들로 점철된 기사를 올리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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