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6화 (36/250)
  • #36. 위험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5)

    청모는 나란히 앉은 지선과 경우를 보고서야 두 사람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는 생각에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 무서운 여자가 다름 아닌 경우의 누나였다니…….

    그런 청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선이 입을 열었다.

    “그날은 제가 실례가 많았죠? 제대로 사과했어야 했는데 어찌나 빨리 가 버리시던지. 어쨌든 죄송했습니다.”

    “아,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누나 또 무슨 사고 쳤어?”

    “얘는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사고나 치고 다니는 줄 알겠다.”

    “아니긴.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는 건 당연하지. 난 가끔 누나 그 성질 머리 때문에 기사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었어. 안 좋은 쪽으로.”

    순간 정적이 흐르자 경우가 돌아보니 미소 짓는 지선이 눈으로 신나게 욕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중에 큰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크흠.

    살아남기 위해선 재빨리 화제 전환이 필요했다.

    “근데 형님은 무슨 일이세요?”

    “어? 뭐 별거는 아니고. 계속 민 작가 인터뷰 요청이 오고 있거든. 처음엔 민 작가 말대로 인터뷰를 다 거절했는데 솔직히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인터뷰를 거절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그렇잖아. 인터뷰를 하게 되면 기자들이 가만있겠어? 당연히 내가 누구네 집 자식인지 알 거 아니야. 드라마만 집중해도 모자라다고. 신변잡기처럼 어쩌고 저쩌고가 되면 드라마보단 다른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올 거야.”

    “하긴. 방귀만 뀌어도 요란한 집구석이니까.”

    역시 첫인상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어휘를 구사한다는 생각에 청모는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그거야 초반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은 이제 드라마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까 인터뷰 정도 응하면 괜찮지 않을까? 사전에 질문지를 받고 하면 되는 거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경우도 내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지금 시청률이 1위를 달리고 있지만 SBC 드라마도 바짝 따라오는 중이거든요. 솔직히 감독님이나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전 노이즈 마케팅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르물은 아무래도 다른 드라마에 비해 유입이 떨어지니까요.”

    “왜죠?”

    “진입 장벽이 있거든요.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쫓는데 잠깐 한눈팔면 시청자 입장에선 무슨 소리 하나 싶을 수 있어요. 집중하지 않으면 따라오기가 힘들거든요. 처음부터 보던 시청자라면 그렇지 않은데 사이사이 떡밥도 있고 중요 메시지도 있으니까 중간에 합류하긴 쉽지 않죠.”

    “일일극이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것도 그래서야. 어제 안 봐도 오늘 보는데 아무 무리가 없어야 하거든. 그래야 그 정도 시청률이 유지되는 거고.”

    “안 그래도 먹고살기 바쁜데 드라마 보는 데까지 머리 쓰고 싶지 않다는 거죠.”

    “드라마도 쉽지 않네.”

    “먹고사는 데 쉬운 일이 어디있어. 다 어렵지.”

    “어이구, 우리 막내 이렇게 보니까 참 많이 컸다.”

    “고등학교 때부터 이 키였거든.”

    늘 어른스러워 보이던 경우도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막냇동생이었다. 청모는 그렇게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그렇게 진입이 어렵다면 인터뷰로 되겠어요?”

    “대본은 워낙 좋으니까요. 호기심을 끌고 와서 일단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다면 계속 보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작가님한텐 미안하지만 전 여기서 시청률을 더 확 끌어올릴 수 있다면 뭐가 되었든 하고 싶은 거고요.”

    “근데 우리 콧대 높은 동생님은 인터뷰가 마음에 안 드는 거고?”

    “그렇다기보다 하게 되면 아무래도 나한테 집중되는 게 부담스럽다는 거지. 드라마에 온전히 집중해 줬으면 싶거든.”

    “그럼 경우만 인터뷰를 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 팀 전체를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는 건요? 그럼 경우에게만 집중되지도 않을 뿐더러 드라마 팀 전체가 주목을 받지 않을까요?”

    “배우들 인터뷰도 이미 다 했고 우리 드라마 시작 전에 메이킹이네 미리보기네 할 거 다 했단 말이지. 그런 거 안 통해. 그러니까 형님이 저런 의견을 내는 거지.”

    “음,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좋은 일을 하면 어때? 가령 봉사 활동이라든가 그런 거 있잖아. 어차피 한 팀이니까 다 같이하면서 드라마 이야기는 안 해도 어차피 무슨 드라마 출연하는 건지는 다 알 거 아니야.”

    지선의 말에 경우는 무언가 번뜩 떠올랐다.

    “시청률 공약!”

    “시청률 공약?”

    흥행하는 드라마에 공식 코스처럼 따라붙는 게 시청률 공약이었다.

    “지금 우리 드라마 시청률이 얼마죠?”

    “28퍼센트.”

    “그럼 30퍼센트를 넘으면 누나 말대로 봉사 활동을 하겠다, 뭐 그런 건 어때요? 장기 기증이란 소재를 쓰니까 이왕이면 병원이나 장애인 시설 같은 곳에서 하는 걸로요. 드라마 팀의 선한 영향력, 그런 식으로 기사를 내기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일정 때문에 촉박하려나?”

    경우의 말에 머리를 굴린 청모가 잠시 생각 후 입을 열었다.

    “하루 정도라면 뺄 수도 있을 것 같아. 원치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원하는 사람들 위주로 하면 촬영 일정에 지장을 주지도 않을 거고.”

    “어차피 배우들은 거의 다 참여하지 않겠어요? 좋은 일 하는 건데 얼굴 알릴 수 있는 기회잖아요.”

    “그렇긴 하지. 어쨌든 일정 조율은 내가 해 볼게.”

    “근데 병원이면 환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으려나? 괜히 시끄러워질 수 있다고 병원에서 협조를 안 해 주면 어쩌죠?”

    “그런 거라면 외삼촌한테 부탁하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프로그램만 잘 짜면 환자나 보호자도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않을 거야.”

    생각해 보니 외갓집인 유진 그룹 산하에 병원이 있었으니.

    “기자도 내가 섭외해 줄게. 우리 광고 받는 신문사 몇 있으니까 모아서 기사 쓰게 하면 곤란한 질문 빼고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 줄 거야.”

    “그럼 제가 가서 PD님이랑 주연 배우들과 상의를 해 보겠습니다. 다들 괜찮게 생각할 겁니다.”

    “다 정해지면 경우 통해서 알려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울 테니까.”

    “고마워, 누나.”

    “당연한 걸 가지고.”

    수줍게 미소 짓는 지선의 모습에 청모는 처음 봤던 인상과 달리 그녀가 평범한 누나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청모의 시선을 느낀 지선이 살짝 미소를 짓자 청모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어쨌든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의견을 전한 청모는 은기는 물론 주연 배우 재환과 예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시청률 공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전에 조율한 대로 MBS의 연예 정보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통해 시청률 공약을 내걸었다. 얼마 후 약속했던 대로 시청률이 30퍼센트를 돌파했다.

    청모는 일정을 빼기 위해 안 그래도 바쁜 몸을 더욱 놀려야 했다. 그래도 이 모든 게 드라마를 위해서였으니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마침내 유진 그룹 산하 종합 병원의 어린이 병동에 드라마 <셀룰러 메모리> 팀이 나타났다.

    혹시라도 드라마를 위한 쇼라고 보일 것을 우려, 특히나 아픈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일일이 취지를 설명하고 사전 동의를 얻었다.

    거기다 힘든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들이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프로그램까지 미리 준비해 온 덕에 반대는 없었다.

    병원 측에서도 어린 환자들이 더욱 즐겁게 생활할 수 있도록 평소에도 적용 가능한 프로그램을 짜는 데 도움을 준 덕분이었다. 어쨌든 철저한 준비 덕에 봉사 활동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사전 교육을 받은 기자들 역시 최대한 자제하며 취재를 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배우들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사이 경우가 늦은 점심을 먹는 아이를 돕고 있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맛이 없어? 안 먹혀?”

    “그게 아니라 아저씨랑 헤어질 생각을 하니까 슬퍼요.”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 아저씨 더 있다가 갈 거야.”

    “그게 아니라…… 오늘 지나면 다시는 못 만나잖아요.”

    병원에서 지내면서 수많은 이별을 겪으면서도 이별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가 경우는 안쓰러웠다.

    “나 또 와도 돼? 나는 또 내가 오는 거 싫어할까 봐.”

    “싫지 않아요. 평소에 우리만 있으면 조금 심심하거든요. 재미있게 웃고 놀다 보면 아픈 것도 잊어버려요. 근데 하루뿐이라…….”

    “알았어. 아저씨가 사람들 데리고 자주 놀러 올게. 약속.”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있는데 아이가 누군가를 보더니 일어나 그쪽으로 달려갔다.

    “형!”

    반가워하는 모습에 친형이라 생각했던 경우는 돌아본 순간 그만 익숙한 얼굴에 놀라고 말았다.

    “수, 수현아…….”

    “오랜만이다.”

    사고가 일어나고 거의 10년 만이었다. 의외로 담담한 수현과 달리 10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의 모습에 경우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강철은 지선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경 실장이 수현이 행방을 찾는다고?”

    “네.”

    “진짜 가지 가지 한다. 안 그래도 그 자식,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더니. 그렇다고 하나뿐인 동생을 건드려? 어쩌나 두고 볼 심산이었는데 정말 안 되겠구만.”

    “근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경우도 민 이사님 신경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건 좀 의외네. 일이야 많지. 바람 잘 날 없는 집구석이잖아. 집안 치부라서 내 입으로 김 대리한테 말하기 좀 그렇네. 경우한테 물어봐. 대답해 줄 거야.”

    “아닙니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괜히 알았다가 긁어 부스럼만 될까 싶어 강철은 서둘러 태세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된 거 수현이 문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차라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게 어때?”

    “두 사람을요?”

    “두 사람 원래 친했잖아. 강철이 너보다 우리 경우하고 더 친한 게 수현이였던 걸로 아는데.”

    “…….”

    “그 아인 어때? 잘 지내?”

    “그게…….”

    “알아. 아버지가 살펴보라고 했을 거 아니야. 우리 아버지 어떤 분이신지 내가 참 잘 알지.”

    그날 수현이 물었을 때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강철은 오래전 민 회장으로부터 당부받은 일이 있었다.

    ‘한번씩 잊지 말고 그 아이 찾아가.’

    ‘감시를 하라는 말씀이신 가요?’

    ‘그럴 필요까지 뭐 있어.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 안부도 묻고. 그럼 그 아이가 알아서 생각할 거야. 우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그거면 충분해. 내 시선이 닿는다고 생각하면 지레 겁먹을 테니까 말이야.’

    역시나 민 회장의 생각대로 수현은 민 회장과 새명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많은 걸 지선이 알고 있었고 또 경우를 보살피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강철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잘 있습니다.”

    “마침 시청률 공약한다고 하니까 그 기회를 이용해서 만나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핑계 대기 딱 좋잖아.”

    “괜찮을까요?”

    “그 아이한테 못 할 짓이려나? 내가 너무 내 동생만 생각한 거니?”

    “그게 아니라…… 수현인 괜찮을 겁니다. 문제는 경우죠.”

    “경우? 괜찮아. 지가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죄를 지었으면 해결하는 것도 본인의 몫이지. 그게 경우가 넘어야 할 산이고 업보라면 피하게 둘 수만은 없어. 그리고 말이야.”

    “?”

    “난 이번 일을 경우가 어떻게 해결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 녀석, 곁으로만 달라진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달라진 건지 알고 싶거든.”

    믿는 척했을 뿐 경우를 온전히 믿고 있지 않았던 건가?

    언제고 드러날 문제였다면 이 기회에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철은 다시 만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 슬쩍 자리를 옮겼다.

    “저기 괜찮으면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그러자.”

    그렇게 두 사람이 휴게실로 자리를 옮기는 사이 취재를 하던 기자 하나가 앳된 수현과 경우의 사진을 비교하며 그들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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