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5화 (35/250)

#35. 위험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4)

준호가 썸 어패럴의 한승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비슷한 또래의 정하중공업의 상무를 통해서였다.

술자리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우연히 나온 말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아내가 외국 갈 때마다 그 도시 특이한 디자인의 물건을 하나씩 사는데 말이야. 지난번에 스톡홀름에 갔을 때였나? 소호에서 재미난 디자인의 가방을 샀거든.”

“근데?”

“그거랑 똑같은 걸 우리나라에서 디자이너 제품이라고 비싸게 팔더라고 하더라니까. 이름이 뭐더라. 썸인가, 쌈인가? 하여간 사람들이 영악해서 말이야. 돈을 참 쉽게 벌어. 누구는 모래바람 마시면서 사업 따내려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는데 말이야.”

준호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흘려 넘겼다. 딱히 관심사도 아니었고 어차피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편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주신이 잘나가는 인터넷 쇼핑몰을 인수하고 매출이 상승했다는 소식을 듣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었다. 준호는 이후 썸 어패럴과 한승진 대표의 뒷조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만약 주신의 외연 확장에 자극을 받은 지선이 썸 어패럴을 인수하기만 한다면 최후 승자는 자신이 될 거란 생각이 든 거였다.

해서 준호는 새명유통에 지선의 대표직을 못마땅해하는 인물인 최지열을 찾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를 통해 지선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든 뒤 썸 어패럴을 인수한다면 그 뒤 한승진의 비리를 터뜨리며 새명유통을 흔들어 지선을 무너뜨릴 계획이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수습과 동시에 자신의 경영 능력을 보여 주리라 결심한 일들이,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경우를 통해 엎어졌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지선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 일에 자신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그는 확신했다.

문제는 민 회장이었지만 어차피 자신이 나섰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라도 최지열이 이상한 말을 한다고 해도 그에게 모든 걸 덮어씌울 작정이었다.

그가 뭐라고 해도 남인 최지열의 말보다는 가족인 자신의 말을 믿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려고 그동안 마음에도 없는 착한 동생 코스프레를 해 왔던 거고.

그러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도 모든 잘못을 형제간에 이간질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최지열에게 넘길 심산이었다. 어차피 그의 야심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기어오르는 놈은 가만두면 안 되지.”

경우가 달라졌다. 자신의 앞에선 어깨를 말고 있던 그가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 준호는 못 견디게 싫었다.

찐따는 찐따로 있어야 한다며 더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밟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경우가 무너지면 지선이 아버지 눈 밖에 날 거란 계산도 있었다.

“오히려 그편이 더 쉽겠어. 일타쌍피라…….”

준호는 자신의 비서 경 실장을 들어오게 했다.

“예전에 경우 학교 다닐 때 일, 알죠? 수현이랬나?”

“네.”

“그애 좀 찾아봐요. 어디서 뭐 하는지.”

“알겠습니다.”

일을 크게 만들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경우가 맡은 MBS 드라마가 지금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는 상황.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경우가 새명 그룹의 막내라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시청자들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그가 과거 학폭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새명의 아들이라는 점도 부각된다면 여론은 부정적으로 돌아설 것이 분명했다.

재벌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신경을 쓰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그 점을 잘 이용한다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민 회장의 시야에서 치워 버릴 수 있을 게 분명했다.

* * *

범석은 커다란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들어온 매니저가 그런 범석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또 보냐?”

“형, 왔어?”

“잠깐 출연한 드라마 치고는 너무 집중해서 보는 거 아니냐? 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 둬. 어차피 네 분량 촬영도 다 끝난 마당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뭐?”

“…….”

“응?”

“아, 쪽팔려서 그래, 쪽팔려서.”

“뭐가? 설마 네 연기가?”

매니저의 어이없는 말에 범석은 그만 실소를 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강범석이야. 내가 연기로 쪽팔릴 거 같아?”

연기는 완벽했다. 그가 나름 해석해 연기한 최우진을 PD인 은기는 물론 작가인 경우까지도 흡족해했으니까.

“그럼? 천하의 강범석이 뭐가 쪽팔려서 봤던 드라마 재탕에 삼탕까지 하는 건데?”

마침 그 원인 제공자인 우재환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연기에 짧은 순간 범석의 매니저마저도 화면 속 그의 모습에 빠져들고 있었다.

“저 친구가 소문의 걔야? 하도섭 실장이 데리고 있다고 했지?”

“응.”

“하도섭, 아직 안 죽었네. 그 선영인지 뭔지 하는 얘 데리고 다닐 때만 해도 감이 팍 죽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말이야.”

“무슨 말이야, 선영이가 왜?”

“넌 모르나? 하도섭이 찍은 배우는 무조건 뜬다, 그런 소문이 있었지. 지금 이름 알리고 있는 배우들 중 무명이었는데 하도섭이 발굴한 애들이 좀 되거든.”

“으음. 선영이도 하도섭이 발굴한 거야?”

“걘 아냐, 지가 하도섭 아니면 안 된다고 매달린 거지. 솔직히 톡 까놓고 애매하잖아. 주인공만 하기는 하는데 너만큼 연기로 먹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기가 하늘을 치솟는 것도 아니고. 집안 백에 투자에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밀어준다는 말이 있어.”

“그래서 그쪽 대표가 선영이한테 꼼짝을 못 하는구만.”

“하도섭이 찍으면 탑 된다고 하니까 배우들이 매달리는 거지. 자기 찍어 달라고.”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렇게 한다고 의미가 있어?”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뜨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 아무튼 하도섭이 선영인가 하는 그 여배우 전담 관리를 한다고 했을 때 드디어 하도섭도 끝났구나 하는 소문이 돌았어.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입방정이었을 뿐이지만.”

어쨌든 그런 시답지 않는 말을 주고받은 후 매니저는 다시 화면 속 우재환에 집중했다.

범석은 매니저가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에 연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재환, 처음엔 그냥 운 좋은 놈이라 생각했다. 오디션장에 수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해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연기 천재는 아니었다. 그중엔 어중이떠중이도 있고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는 이들도 다수를 차지했으니까.

결국 뽑히는 사람들은 고만한 연기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그 배역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니. 꼭 실력만으로 우재환이 뽑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연기를 확인한 뒤 자신이 편견에 사로잡혔음을 깨달았다. 근래 보기 드문 눈빛에 제대로 연기하는 사람을 이대로 보내 자니 아쉬운 생각마저 들었다.

“제대로 맞붙어서 연기해 보고 싶네.”

“맘에 들었나 봐?”

“그렇다기보다 멋모르고 당한 기분이라서 되갚아 주려고.”

“아서라, 그러다 멀쩡한 신인 우울증 걸린다.”

“그래도 형은 내 편인가 보네, 쟤 걱정하는 거 보면.”

“당연하지. 네가 저런 신인한테 발릴 리가 없잖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아?”

“보나마나야. 근데 쟤랑 너랑 맞붙을 일이 있겠냐. 하도섭 스타일을 보건대 신인은 인지도 쌓기 전엔 영화 판으로 안 돌려. 당분간은 드라마만 계속할걸.”

“혹시 우재환 차기작 한다는 소문 돌면 그 시놉 좀 가져다 줘.”

“너, 진심이야? 그 정도를 쟤를 발라 버리고 싶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연기만 잘하는 건지 작품 보는 눈도 있는지 궁금해서…….”

“알았다.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지.”

“아, 민경우 작가의 차기작도.”

“그 작가는 또 왜?”

다른 작품이라면 몰라도 경우가 쓴 드라마라면 한번 더 출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의 대본으로 우재환과 맞붙는 것까지 상상한 범석은 만약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엔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호응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강범석이 그랬듯 이미 본 사람들 사이에서 <셀룰러 메모리>의 정주행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신인 배우 우재환에 대한 관심은 물론 작가인 경우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었다.

그 관심을 반영하듯 경우에 대한 인터뷰 요청에 청모는 일조차 마비되기 일수였다.

드라마보다 개인적인 신변잡기에 혹시라도 드라마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경우는 그동안 인터뷰를 거절해 왔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안정세에 접어든 후 정체되어 있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더 끌어오기 위한 이슈 몰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경우의 의견이었으니.

혹시나 싶어 방송국 안에 경우를 찾으러 다녔지만 경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연출부 막내가 지나가자 청모는 그를 잡고 물었다.

“민 작가는?”

“아까 퇴근하시는 거 같던데요. 얼마 안 됐어요.”

집보다는 방송국이 집중이 잘되고 회의도 할 수 있다며 매일같이 방송국으로 출근하는 그였다. 평소라면 늦게까지 남아 있던 경우가 어쩐 일인지 퇴근했다는 말에 청모는 그를 붙잡기 위해 서둘렀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경우의 모습이 보였다.

“민 작가!”

청모가 부르는 소리에 경우가 돌아보자 청모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경우에 가려져 있던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청모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미, 미, 미친 여…….”

청모는 오래전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음료를 빼앗아 앞에 있던 남자에게 뿌리던 여자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 짓을 하고도 자신을 향해 산뜻하게 웃는 모습에 어찌나 오금이 저리던지. 최근 본 호러 영화보다도 그 장면이 가장 두려웠다.

그런데 하필 그 사건의 당사자가 귀하디귀한 경우 옆에 서 있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잔뜩 경계해 경우를 뒤로 감췄다.

“뭐, 뭐, 뭡니까?”

갑작스러운 청모의 태도에 두 사람이 의아해하는 사이 경우가 입을 열었다.

“형님, 우리 누나랑 아시는 사이세요?”

“누……나?”

버퍼링이 걸린 듯 버벅거리던 청모를 바라보는 지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이게 뭐지?”

강철은 인턴에게서 받은 보고서를 살피던 중 눈살을 찌푸렸다.

“대리님께서 말씀하셔서 드라마와 관련된 기사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기사가 떠서 아무래도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셀룰러 메모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마지막에 작가 민경우가 새명 그룹 민홍준 회장의 삼남이라고 밝힌 거였다.

인턴은 친절하게도 기사를 캡쳐한 것은 물론이고 그 아래 달린 댓글들까지 캡쳐해 두었다.

물론 댓글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경우가 재벌집 아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드라마를 잘 보고 있다는 선플도 있었지만 재벌이 이제 하다하다 드라마 작가까지 하는 거냐며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거기다 드라마는 보지도 않고 실력 운운하며 결국 백이라고 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어디 신문사야?”

“영세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인데요, 지금은 기사를 내렸습니다.”

그 말에 강철이 인턴을 봤다.

“내렸어?”

“네. 전에 대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도 있고 캡쳐한 게 아니었다면 보고서도 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찜찜했다.

마치 간 보는 것처럼 슬쩍 올렸다 내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꼭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기사가 나오는지 예의 주시하고 혹시나 올라오면 어떤 신문사인지 빠뜨리지 말고 보고해.”

“네.”

‘이런 걸 혹시 예상했던 거냐?’

잔잔한 일상에 다시 파문이 이는 건 아닌지 강철은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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