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4화 (34/250)
  • #34. 위험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3)

    “잠깐 시간 괜찮지?”

    “형이 내 방에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냐.”

    잘 아네.

    솔직히 경우는 민준호가 굉장히 껄끄러웠다. 아버지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에 첫째 정현이 동생들에게 너그러웠던 반면 준호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물이었다.

    옛날로 치면 진골 의식에 빠져 있는 놈. 정현의 외가가 별 볼 일 없는 집안인 탓에 외가도 든든한 자신이 새명의 후계자는 자신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놈이었다.

    다른 식구들은 모르겠지만 준호의 사악한 면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경우였다. 경우가 그렇게까지 아버지 눈 밖에 나고 정신 병원을 가게 된 것도 결국은 준호 때문이었으니까.

    “오늘 아버지 네 덕에 기분이 좋으신 거 같더라.”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으면 형한테 말하지 그랬어. 형이 도와줬을 텐데.”

    “괜찮아. 뭐 별로 어려운 것도 없었고 있다고 해도 누나한테-.”

    “경우야,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누나 나이도 있는데 곧 있으면 결혼하겠지. 그럼 이제 더는 우리 식구가 아니잖아. 너한테 나 말고 누가 또 있겠어. 아버지도 지금이야 널 인정하시지만 만에 하나 조그만 실수라도 한다면 다시 예전처럼 돼 버릴 거야.”

    “…….”

    지금 그의 말을 들으니 경우는 그가 과거 민경우에게 했던 말이 떠올렸다.

    ‘아버진 너보다 새명이 더 중요한 분이야.’

    ‘아버지 실망시키면 안 돼.’

    ‘난 널 믿지만 글쎄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걔들은 다 네가 새명 그룹의 아들이니까 그러는 거야. 진심은 없어.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하는 말, 전부 믿지 마.’

    민경우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가족이든 누구든 믿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 게 그였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목말랐던 민경우는 준호의 진의를 모른 채 그의 말을 따랐을 테지만…….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일은 없어야지 않겠어? 그러니 내가 도와줄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알겠지?”

    “응. 고마워, 형.”

    “그래. 그래야 착한 동생이지.”

    “근데 형, 형도 이제 내 걱정하지 마. 일도 바쁠 텐데 형이 나한테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어린애는 아니거든. 딱히 형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젠 괜찮아.”

    “…….”

    “아무래도 집에 가 봐야겠어.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다음 화 대본 수정해야 하거든.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그렇게 돌아서는 경우는 자신의 뒤에 선 준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짐작이 되었다.

    미안하지만 세상 사람 다 이해해도 네놈만큼은 절대 이해하지 않을 거라고 경우는 생각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지. 형이 돼서.’

    경우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생각과 다른 경우의 반응에 준호는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준호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하, 이 인간은 왜 또 전화질이야.”

    최지열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준호는 받지도 않고 끊어 버렸다. 지금은 이 인간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으니 그게 무언지 알아봐야 했다.

    * * *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민준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쩐지 최근 민준호가 자신을 피하는 것 같은 생각에 최지열은 초조해졌다.

    ‘괜찮을 거야. 이 일로 내가 드러나는 일은 없어.’

    그렇게 다독이며 출근을 하던 최지열은 사무실 내 뒤숭숭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자신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는 사원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상무님. 지금 홍성준 부장님이 미국으로 발령받으셨다는 소식이 전해졌거든요.”

    “미국 발령? 갑자기? 지금 정기 인사 발령 철도 아니지 않은가.”

    “저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홍성준 부장이면 사업개발부 홍성준 맞지?”

    “네.”

    최지열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기 인사 발령 때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미국 발령은 좋지 않았다. 특히 미국으로 발령을 받은 홍성준이 하필이면 최지열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밀 감찰부가 정말로 있는 건가?

    그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인수 문제와 관련해 민 대표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위기감을 느낀 최지열은 서둘러 민준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최지열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무래도 민 대표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연락 바랍니다.’

    그리고 문자가 통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준호의 비서를 통해 연락이 왔다.

    * * *

    회사에서 멀지 않은 한정식 식당 룸에 앉아 있던 최지열은 문이 열리고 민준호가 들어오자 벌떡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민 이사님.”

    자리에 앉은 민준호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 상무님.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전화를 하시면 어떡합니까? 일을 도대체 할 수가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민지선 대표가 다 알아 버린 것 같습니다.”

    “무엇을요?”

    “썸 어패럴 인수 건 말입니다. 이사님과 제가 장난질 친 걸 민 대표가-.”

    “이보세요, 최지열 상무님.”

    날카로운 민준호의 어조에 최지열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네? 이사님이 썸 어패럴을 인수하도록 유도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썸 어패럴의 디자인 표절 문제가 불거지면 민 대표를 밀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상무님!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시지 않나, 이해 안 되는 문자를 보내셨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약속을 잡았던 건데 이제 보니 최 상무님 참 몹쓸 사람이군요.”

    “네?”

    “저도 압니다. 최 상무님이 새명유통 대표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는 것쯤은요. 근데 아무리 그 자리가 욕심나도 그렇지. 남매간에 이간질하시려 하다니요. 사람 잘못 봤습니다. 아무래도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군요. 계산은 제가 할 테니 드시고 가세요, 그럼.”

    허탈한 최지열은 품 안에 숨겨 두었던 녹음기를 꺼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놈의 발목에 족쇄라도 채워 두는 건데…….

    뒤늦게 생각이 미쳐 준비를 하려 했지만 여우 같은 민준호는 그의 술책을 알아채고 말았다. 그리고 이건 명백한 꼬리 자르기. 앞으로 이 문제가 불거진다고 해도 발뺌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지? 그렇다면 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는 지금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생각했다. 그리고 곧장 대표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대표실 앞에 섰어도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제 발로 지선을 찾아가는 게 맞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가만히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은 두려움에 제명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침내 결심이 선 최지열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누가 들어왔는지 보지도 않고 일에 열중한 지선의 모습에 최지열은 쭈뼛거리며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뭐라고 입이라도 열 텐데 서류만 보고 있는 그녀 모습에 더욱 망설이고 말았다. 어쨌든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저…….”

    “…….”

    “저, 그러니까…… 대표님…… 드, 드릴 말씀이…….”

    그제야 고개를 든 지선이 눈을 마주쳤다.

    “날 내쫓고 싶어하는 동생하고 편 먹고 날 물 먹이려 한 사람과는 할 말이 없는데 어쩌죠?”

    “!”

    “회사 시끄러워지는 거 나 별로 바라지 않아요. 어차피 뒷돈 두둑이 챙기셨을 테니 퇴직금도 된 거 같고 조용히 사표 쓰고 집으로 가시죠. 그게 내가 최 상무님께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배려 같은데. 아님, 검찰 고발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시려나?”

    백화점 일까지 알고 있었다는 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최지열은 납작 엎드렸다.

    “잘못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습니다. 대표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할 테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최지열의 모습에 지선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제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하겠다는 그런 말이죠?”

    된 건가 싶은 마음에 최지열이 살짝 고개를 들어 지선을 살폈다.

    자신을 노려보는 날카로운 그녀의 시선에 최지열은 돌아가신 선대 회장님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고 있는 호랑이 같은 시선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누구를 등지고 적으로 돌리려 했는지 깨달았다.

    * * *

    석주는 매번 강철을 통해 기획서를 보내왔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경우는 석주의 탁월한 선택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석주, 학교는 잘 다니고 있어?”

    “그러는 것 같더라고.”

    “다른 건 몰라도 학교는 잘 다니도록 해. 돈 굴리다 보면 학교든 뭐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학생이 학교를 안 가면 안 되지.”

    “괜찮으니까 이대로 진행하라고 전하고.”

    “야, 근데 정말 괜찮겠어?”

    “뭐가?”

    “아니. 그래, 네 말대로 석주가 경제 전문가보다 잘 안다고 치자. 그래도 아직 어린애잖아. 어린애가 다루기엔 너무 큰돈 같은데 판단을 잘못할 수도 있고 또…….”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 돈 차라리 나를 주면 내가-.”

    “안 돼!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를 맡기지 너한테 무슨.”

    “내가 왜?”

    “기억 안나? 지난번에 무슨 금 투자한다고 해서 사기당하고 결국 다 날렸잖아.”

    “너는 남의 아픈 기억을 건들고 그러냐.”

    “그러니까 우리 서로 잘하는 것만 하자, 응?”

    “칫, 안 넘어오네.”

    “그건 됐고. 너 혹시 우리 형,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어?”

    “설마 준호 형?”

    “응.”

    “웬일이야, 네가? 전에 내가 준호 형에 대해 안 좋은 소리 했을 때 그럴 리 없다고 방방 뛰던 놈이.”

    “내가…… 그랬지?”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

    “그건 아니고. 준호 형 동향 좀 살펴 줘. 특히 그 경 실장이라고 했나? 준호 형 비서가?”

    “그렇지. 아유, 너네 집 비서들은 어찌나 다 그 모양인지. 박 실장님도 그렇지만 경 실장 그 인간도 만만치 않지. 도무지 인간미가 없어요. 아니다, 차라리 박 실장님이 백배는 더 낫다.”

    “너도 우리집 비서잖아.”

    “나는 인마 예외고. 이렇게 인간미 넘치는 비서가 어딨냐?”

    “없지. 그러니까 그런 허술한 사기에 걸려 넘어지는 거지.”

    “야! 하여간 때린 데 또 때리지. 근데 갑자기 경 실장은 왜?”

    “좀 지켜봐. 무슨 일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분명 무슨 일을 꾸밀 거거든.”

    “그걸 어떻게 아는데? 혹시, 신내림이라도 받았어?”

    “아유, 쫌.”

    “예, 도련님. 분부대로 거행합죠.”

    강철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의 식사 자리를 돌이켜 보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선과 준호 사이에 보이진 않지만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고나 할까?

    만만한 민경우라면 모를까, 지선이라면 가만히 당하고 있을 만한 성격은 아니었으니. 혹시 썸 어패럴의 문제가 준호와 연관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처리를 잘못한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 문제를 그 자리에서 거론한 걸 보면 지선이 분명 목적이 있었을 테고, 준호의 모습에 그와 아예 관련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진짜 그렇게까지 한 거라면…….”

    경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민정현이 낫지, 민준호는 진짜 아니었다. 동생에게도 그런 놈이 차기 새명의 회장이라도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최선은 지선이었다. 경우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넋 놓고 있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야.”

    생각을 마친 경우는 전화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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