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위험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2)
“그 소문 들었어?”
전날 과음한 탓에 회사 근처 해장국집을 찾은 최지열은 그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회사 사원들의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고 말았다.
“무슨 소문?”
“회사 안에 말이지 대표님 직속 비밀 감찰부가 있다고 하더라고.”
“비밀 감찰부? 그게 뭔데?”
“한마디로 암행어사 같은 거지.”
“갑자기 웬 암행어사?”
“너도 그 소문 들었을 거 아니야. 썸 어패럴.”
“아, 그거. 생각하니까 또 뚜껑 열리네. 그것 때문에 우리 부서도 얼마나 일을 했는데. 무산됐다고 했을 때 허탈한 걸 넘어서 화가 나더라. 그럴 거면 일을 시키지 말든가. 몇 주간 완전 개고생한 거 아니야.”
“열 내지 마. 대표님도 몰랐겠지. 거기 한승진 대표가 문제 많은 사람이라는 걸.”
“뭐? 그럼 그 소문이 진짜였어?”
“그래, 학력 위조에 디자인 표절까지. 차라리 물거품이 낫지 인수했으면 아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을 거다.”
“그래? 근데 그거하고 암행어사하고 무슨 상관?”
“그게 누가 우리 대표님 물 먹일라고 일부러 작당한 일이라고 하더라니까.”
“진짜? 아니 왜?”
“솔직히 대표님, 엘리트 코스만 밟고 대표 자리에까지 오른 건 맞잖아.”
“그렇지.”
“그래서 우리도 첨엔 고깝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고.”
“야, 넌 어땠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거든.”
“웃기시네. 야, 솔직히 우리끼리 있을 때 무슨 말을 못 하냐? 어쨌든 대표님 오시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시는 거 보고 직원들 마음 바뀐 것도 있잖아. 근데 아직도 그런 대표님을 고깝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이 회사에 매달린 식구만 몇인데.”
“내 말이.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 캐내려고 대표님이 자기 사람들로 비밀 감찰부를 만들었다는 거 아냐. 암행어사처럼 각 부서에 숨어 다니면서 염탐하고 탐관오리들을 찍어 내겠다는 거지.”
“그 말은 우리 사무실에 누군가도 비밀 감찰부일 수도 있다는 거네?”
“그럴지도.”
가뜩이나 속이 좋지 못했던 최지열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 먹던 걸 그만두고 자리에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비밀 감찰부라니.
혹시나 자신이 한 짓을 민 대표가 알아 차린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어차피 썸 어패럴의 한승진 대표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 모든 소스는 민준호에게서 나왔으니 자신을 캔다고 해도 결코 알아내지 못할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 * *
어두운 재환의 얼굴에 경우는 장난스레 물었다.
“우 배우님은 몇 퍼센트에 거셨는데요?”
“25퍼센트요.”
“그래서 표정이 안 좋으시구나. 조금만 낮게 쓰셨어도 우 배우님이 이기셨을 텐데, 그쵸?”
“그건 아니고…… 그냥 좀 걱정이 돼서요.”
“배우님 오늘 첫 등장이라 그러세요? 떨지 마세요. 사람들도 분명 알아줄 겁니다. 배우님이 얼마나 드라마에 열정이 가득한 사람인지요.”
“그럼요. 우리 재환 배우님이야 우리 촬영장의 젊은 피! 대수 형님이 아무리 욕을 해도 쓰러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잖아요.”
“내가 언제? 난 그냥 대본에 쓰인 연기에 충실하는 거뿐이라고. 수혁아, 나 미워하지 마라.”
“아유, 제가 왜 형사님을 미워합니까.”
몰입을 위해 배우들 사이에서는 맡은 역할의 이름대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는 대체로 좋았다. 더군다나 첫 시청률이 높게 나오자 분위기는 더욱 훈훈해지고 있었다.
오늘 방송이 나가고 나면 루키의 등장에 사람들의 이목이 더욱 집중될 것임이 분명했다. 이미 편집본을 본 경우나 은기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 한수혁이 첫 등장한 가운데 목요일 평균 시청률이 22퍼센트로 상승했다. 혹시나 무명 신인 주인공으로 시청률이 떨어질까 걱정했지만 말 그대로 우려였을 뿐. 현장에서의 반응과 마찬가지로 우재환의 연기는 호평을 이뤘다.
시청률이 점차 안정권에 접어드는 가운데 지선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주말 저녁에 약속 없지?]
“아직까진. 근데 왜?”
[아버지 호출. 오랜 만에 가족들 모여서 저녁 먹자고 하시네.]
갑작스러운 민 회장의 호출에 경우는 무슨 일인가 싶었다.
* * *
윤정숙이 빠지긴 했지만 민정현의 결혼 이후 모처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민정현 내외는 물론 민준호도 나가 살았기 때문에 경우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호탕하게 웃는 민 회장의 기분은 무척 좋아 보였다.
“내가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드라마 잘 봤다는 말이야. 막내한테 그런 재주가 있었냐고 어찌나 이야기들을 하는지.”
“경우야, 아버지도 네 드라마 보셨어.”
그 말에 경우는 물론이지만 다른 식구들 또한 놀랐다. 민 회장이 드라마를 보다니…….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그쪽으로 밀어줄 걸 그랬어.”
“저한테도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저도 드라마 챙겨 봤을 텐데요.”
“나도 방송 당일이 돼서야 알았다. 니들도 시간 나면 봐. 볼 만하더구나.”
“네, 아버지.”
“듣기론 주인공이 무명인데 도련님이 발탁하셨다면서요?”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형수님?”
민준호가 물었다.
“저희 친정이 언론산데 그 정도도 모르겠어요.”
“오디션을 거쳐 다른 사람들과 의논해 뽑았습니다. 제가 발탁했다는 건 좀 와전된 것 같군요.”
“도련님도 참 겸손하시기는. 다른 사람으로 정해진 거 도련님이 강력 주장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거 알고 있다구요.”
“그랬어? 막내가 사람 보는 눈까지 있는 줄은 몰랐구나.”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들이었지만 활약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도 평범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다고 지선은 생각했다. 어쨌거나 자신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챈 경우가 거들고 나섰다.
“다 누나 덕분이에요. 누나가 지원을 잘해 준 덕분에 드라마 제작이 순조로웠어요.”
“애썼구나.”
“저로서도 손해만은 아닌 게 드라마가 앞으로 잘되면 광고 효과가 나올 테니 매출 상승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진작 경우를 너한테 맡길 걸 그랬어. 경우가 나아진 게 네 덕분인 거 같아. 그래서 나도 그동안 생각이 많아졌단다.”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준호였다. 어차피 아버지의 강력한 신임을 받고 있었던 정현은 배다른 동생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해서 초조해진 건 준호뿐이었다.
경우가 회사 일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발톱을 숨긴 채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누나 지선만 쳐낸다면 정현과 일대일로 붙어 이길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경우의 일로 지선이 민 회장에게 신임을 받자 준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안을 읽은 지선이 선수를 쳤다.
“사실 경우한테 받은 도움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아요.”
“경우가?”
“네. 패션 브랜드 하나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경우가 그 대표에 대해서 알고 있더라고요. 사기꾼 같다며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큰일을 겪을 뻔했어요.”
“그런 일이 있었어?”
지선은 준호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꾹 참았다. 어쨌든 녀석이 미끼를 물어야 했으니까.
제 손바닥 안이라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가 지선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이왕 이렇게 모인 김에 지선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도 아쉽겠어. 지선이 네가 그 회사 인수하려고 꽤 공을 들였다는 얘기 들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인수하기 전에 일아서 다행이지. 경쟁사에서 일부러 그랬다는 첩보가 들어왔거든.”
“그게 무슨 말이냐?”
역시 민 회장이 즉각 반응을 보였다.
“우리가 썸 어패럴을 인수하면 한승진 대표의 이력을 문제 삼아 회사를 흔들 계획이었나 보더라고요. 아마 내부에 협력한 사람도 있는 것 같고요.”
“경우 넌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 거냐?”
“그건 아닙니다. 그냥 한승진 대표가 문제가 많다는 것만…….”
“어쨌든 경우 아니었으면 완전 당했을지 몰라요. 정말 다행이죠.”
“잘 해결됐다고 그런 식으로 넘겨선 안 돼.”
“그럼요. 반드시 찾아낼 거에요. 걱정 마세요, 아버지. 새명에 해를 끼치는 게 그 누가 되었든 발본색원할 테니까.”
서리가 내릴 것 같은 서늘함에 경우는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미소 짓는 지선이 말을 이었다.
“저 때문에 분위기가 너무 처졌네요. 그래서 좋은 소식도 전해 드릴게요. 인수 대신 남성복 브랜드를 새로 런칭하려고 했어요.”
“남성복이요? 차라리 여성복이 더 낫지 않아요, 아가씨? 가뜩이나 요즘 사람들 지갑도 잘 안 열려고 할 텐데. 소비는 그래도 여자 쪽이 더 낫잖아요.”
“그렇죠. 남자들이야 예전에 비해 나아졌지만 꾸미는 건 확실히 여자들보다 덜하죠. 그래서 생각을 전환하기로 했어요. 남자들이 직접 와서 사는 브랜드가 아니라 여자 친구가 자신의 남자 친구를 꾸미는 쪽으로요.”
“남친 꾸미기요?”
“네. 캐릭터 키우듯이 남친의 스타일을 꾸미는 거죠. 내 남친은 내 손으로 꾸민다. 그래서 여자들을 타깃으로 마케팅도 펼칠 거예요.”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설마 당신, 내 스타일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다기보다는 한 번쯤은 다르게 꾸며 보고 싶다는 거죠. 아가씨, 런칭하면 저도 알려 주세요.”
“네. 새언니.”
민 회장은 무척 흡족했다. 그동안은 가족들끼리 식사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고 숨이 막히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생각했던 보통 가족의 식사 시간 같았다. 이 모든 게 경우가 달라진 것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고 자연히 지선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지선과 준호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겠지만.
준호는 절대 자신의 적대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숨죽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웬만한 건 다 준비가 되고 있는데 문제는 모델이에요.”
“모델?”
“응. 이왕이면 좀 신선한 얼굴을 쓰고 싶거든. 기존에 익숙했던 모델들 말고 좀 새로운 얼굴이면서 이 사람이 내 남자 친구였으면 좋겠다 싶은. 한마디로 여심을 자극할 만한 사람이 없네. 경우야, 혹시 주변에 그런 이미지의 사람 없을까?”
“내가 그런 사람을 어떻게 알아?”
“왜, 매일같이 방송국 드나들면서 눈에 띄는 사람도 없어?”
“내가 보는 거랑 누나가 보는 거랑 같아? 누나의 높은 취향을 맞출 자신이 없어. 그리고 밥 먹는데 일 이야기 좀 그만하면 안 돼? 체하겠네.”
“그래? 미안. 호호.”
평소 성격과 달리 온순한 양처럼 구는 지선의 모습에 경우는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도 눈치라는 게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저녁 식사 시간이 끝이 나자 경우는 오래간만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아닌 원래의 민경우가 쓰던 방이었다.
그리움이나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의 민경우는 이 방을 싫어했고 여기서 나가고 싶어했다.
마지막 순간 그를 마주쳤던 때를 떠올릴 때마다 단순히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조금씩 그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경우는 언젠가 어떤 작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를 너무 싫어해서 자신의 드라마 속 악역은 모두 아버지로 설정해 놓았다고. 정작 아버지는 세상에 저런 나쁜 놈이 어디 있느냐며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렇게 아버지를 그리고 또 그리다 보니 어느덧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그처럼 경우도 원래의 민경우가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았다. 그가 느꼈던 외로움과 괴로움들이.
그런 상념에 들었을 때 갑자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준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