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2화 (32/250)

#32. 위험한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1)

비서실장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민 회장은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워낙 기대치가 낮았던 자식이었으니까. 거기다 망나니 같은 제 자식이 이런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민 회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아버지의 노력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첫 결혼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손 내밀었을 때 못 이기는 척 돌아왔고. 이후 정말 발바닥에 땀 나도록 일했다.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모 회사가 하루아침에 IMF를 맞아 사라지기도 했고 굳건하던 새명이 흔들리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결국 다른 회사들을 인수해 몸집을 불려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자기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 막내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감조차 없던 아들이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이 민 회장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평소 TV라면 뉴스 말고는 보지도 않는 사람이 그렇게 자리에 앉아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TV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지선은 거실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같은 시간, 집에서 드라마를 보던 동권은 방송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전화를 돌렸다.

“어, 나야. 그래, 실시간 시청률 나왔지? 최고는 얼마, 최저는 어느 부분인지 알지?”

“뭐? 그래? 알았어.”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로 힘 없이 전화기를 떨어뜨리는 그의 모습에 아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됐대요? 잘 나왔어요? 아니야? 아니, 뭐라도 말 좀 해 봐요, 여보!”

그러자 동권이 천천히 아내를 향해 돌아보더니 그녀를 격하게 끌어안고는 울먹였다.

“당신 왜 이래요? 혹시 울어요? 시청률, 잘 안 나왔어요?”

“여보, 흑흑. 당신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그럼요. 걱정 마요. 설마 하니 그것 때문에 방송국에서 잘리기야 하겠어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내가 다 엎어 버릴 테니까 너무 걱정 마요.”

아내의 다독임에도 어쩐지 동권의 흐느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역시나 집에서 강철과 함께 드라마를 보던 경우는 드라마가 끝이 나자 슬쩍 옆에 앉은 강철을 돌아봤다. 긴장되는 마음에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었다. 솔직히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들이 자신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가까이에 있는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선보이는 것은 어쩐지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마치 자신의 치부를 모두 다 드러내는 기분이랄까.

꽁꽁 감춰둔 치부가 배우들의 대사, 행동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부디 재미있었으면 싶어 강철이 무슨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분명 이전 삶보다 더 재미있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그때보다 이른 시기라 안 먹히는 건가 싶어 걱정하면서 강철이 뭐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그 순간이었다. 천천히 경우를 돌아보던 강철이 그의 어깨를 턱 잡고는 물었다.

“야, 내가 어디 가서 말 안 할 테니까 나한테만 말해 줘.”

“뭘?”

“최우진이 진짜 범인이야? 자기가 한 짓 소설로 쓴 거였어?”

뜬금없는 질문이 맥이 탁 풀린 경우는 그만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전화벨이 신나게 울리고 동시에 어떻게 알았는지 메시지가 물밀 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들 저렇게 연락을 해 대는 건지, 경우는 처음으로 유명세를 실감했다.

물론 대부분 술자리에서 스치듯 만난 별 영양가 없는 이들이 전부였다.

그러다 은기가 보낸 메시지를 발견하고 천천히 눌렀다.

‘작가님, 시청률 나왔습니다.’

* * *

경운여고 앞에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라면 가게가 하나 있었다.

일명 ‘꽃남면’.

‘너와 함께라면’이라는 어엿한 상호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꽃남면’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집 사장이 굉장한 훈남인 탓이었다.

사장의 얼굴이 매출 상승의 이유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실 그 집 라면 맛이 생각보다 맛있어서 한 번도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손님의 80퍼센트가 여학생들이었지만 어쨌든 라면 가게엔 오늘도 사장님 얼굴 한번, 끝내주게 맛있는 라면도 한번 맛보러 온 여학생들로 아침, 오후 할 것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사장님, 해장에 좋은 땡초 라면 하나요.”

여학생들로 가득 찬 이 꽃밭에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딱 봐도 온몸으로 술냄새를 풀풀 풍길 것 같은 양복쟁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조리대 앞 바 형태로 놔둔 테이블 앞에 앉았다.

하필 사장의 잘생긴 얼굴을 가린 자리 선점 탓에 어쩐지 원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시선을 느낀 남자가 괜히 뒤를 돌아보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장은 그런 남자가 익숙하다는 듯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월급쟁이가 뻔하지. 상사 비위 맞추랴, 주변 눈치 보랴, 밥벌이가 참 고달프다. 수현아, 나도 때려치우고 이런 가게나 하나 열까?”

“왜? 회장님이 너한테 가게 차려 주시겠대? 나 감시하는 수고비로?”

“감시는 무슨. 내가 언제 감시를 했다고 그래?”

“감시가 아니면? 한번 씩 찾아와서 살피는 거 그게 감시지 뭐야. 나도 알아. 혹시 내가 입, 잘못 놀려서 경우한테, 또 새명에 생채기라도 낼까 걱정하고 계시다는 거.”

“그런 거 아니야. 회장님이 너 신경이나 쓰실 것 같아? 그런 대단하신 분은 너나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고. 그러니까 오해 마. 난 전적으로 네 라면 맛 때문에 오는 거니까. 그러게 무슨 라면을 이렇게 잘 끓이래? 다른 데를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잖아. 네가 내 입맛만 올려놔서.”

그러더니 사장이 끓어낸 라면을 후루룩 들이부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앞으로 축구 선수 생활은 이어갈 수 없다는 사망선고를 들은 수현은 절망할 틈도 없이 새명 그룹의 회장 민홍준의 부름에 끌려가야 했다.

최고의 의료진이 해 주는 치료, 섭섭지 않은 위자료를 보장해 주겠으니 그가 다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함구하라는 조건이었다.

약간의 반발심도 있었지만 수현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체육계에서 만연한 상명하복에 길들여진 그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바위가 깨지는 건 아니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숙소 생활을 오래 한 덕에 라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던 수현은 민 회장에게 받은 돈으로 라면 가게를 차렸고 프렌차이즈를 제안받을 정도로 가게는 생각보다 잘되고 있었다.

“내가 정말 나쁜 마음 있었으면 여고 앞에다 라면 가게를 차리라고 했겠냐? 내 진의를 곡해하지 마라.”

“곡해는 무슨.”

“솔직히…… 나도 너한테 미안한 거 있어.”

“네가?”

“너 그렇게 된 건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

“나도 사람이야. 요즘은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잘못 살아서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뭐 그런.”

“새명 같은 대기업에 정규직이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그럼 나랑 바꿀래? 네가 새명 들어가고 내가 라면 가게 사장 하고.”

“됐네. 어차피 너 라면도 못 끓이잖아. 그래서 맨날 컵라면 먹는 거라며. 너같이 장사하다간 하루도 못 가서 망해.”

수현의 지적에 강철은 코를 훌쩍였다.

그런 강철을 보던 수현은 머뭇거리더니 강철의 눈을 피하고는 지나가듯 물었다.

“경우는? 잘 지내?”

“야, 넌 그 새끼 밉지도 않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뭐, 세상 제일 무서운 게 미운 정이라더니……. 잘 있어. 조금, 사람 구실도 하고 있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복잡 미묘한 수현의 얼굴에 강철도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그때 가게 안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학생들이 대부분인 학교 앞 라면 가게에 어울리지 않은 정장 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수현에게 다가왔다.

“사장님?”

“어서오세요, 자리 안내해 드릴까요?”

“그게 아니라.”

여자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혹시 연예인 해 볼 생각 없어요?”

잠시 명함을 보던 수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전 별로 연예인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요.”

“여기 소문이 자자하시던데. 좀 아까워서 그래요. 완전 우리 쪽인데.”

“됐으니까 그냥 가시죠.”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생각 바뀌면 연락처로 전화 주세요, 기다릴게요.”

공기 반, 소리 반, 섞어서 은밀하게 내뱉은 여자가 나가자 강철은 수현의 손에 들려 있는 명함을 빼앗아 자세히 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여자라고 했더니 명함엔 BSH 엔터테인먼트라고 적혀있었다.

“여기 엄청 유명한 덴데…… 너, 설마 저런 제의 많이 받았냐?”

수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 * *

동권의 부름에 그의 사무실로 들어간 경우와 은기는 활짝 핀 그를 마주했다.

“하하하. 두 사람 모두 수고했어. 그래도 스타트를 23퍼센트로 찍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절반은 강범석 씨 효과지 않을까요?”

“민 작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게 다 대본이 좋아서 나오는 거지 어디 배우빨만 있기야 하겠어?”

“전 민 작가 말도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문제는 오늘 시청률이죠. 강범석 씨가 스타트를 잘 끊어 줬으니 오늘 밤에 다시 봐야 배우빨인지 아니면 대본빨인지 제대로 알지 않겠습니까?”

“네. 미리 김칫국 마시고 싶지는 않네요.”

“하여간 두 사람 다 신중해서 탈이라니까. 뭐 그 점이 오히려 좋지만 말이야.”

어쨌건 동권은 최근 들어 가장 기분 좋은 날이었다. 최우진 역을 맡은 강범석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순간 최고 시청률이 23퍼센트를 기록한 것이다. 물론 경우의 말마따나 강범석의 효과도 있었을 테지만 최저 시청률도 18퍼센트나 되었다.

처음엔 자신의 야심 때문에 일을 너무 몰아붙인 게 아닌가 싶었다.

촬영장에서의 사고, 예상치 못한 드라마 중단으로 그는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수습을 한다고 해도 결국 물러날 거란 위기감에 휩싸였다. 아직 어린 자녀들을 보며 어떻게든 방송국 안에서 버티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밀려나 방송국을 나가면 외주로 간다고 해도 자신이 없을 정도로 그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이 난관을 해결할 돌파구가 필요하던 차에 경우의 대본을 보게 되었고 처음 본 순간 사로잡혔던 열정대로 일을 진행시킨 덕분에 오늘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마. 네티즌 반응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야. 홈페이지 댓글도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하더군. 강범석이 등장과 동시에 사라졌지만 사람들도 수긍하는 눈치더라고.”

“그래도 강범석을 캐스팅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맞아. 어쨌든 그 덕분에 화제성을 끌어왔으니 이제부터 버티기는 두 사람의 몫 아닌가. 지켜보겠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촬영장으로 달려갔다. 청모가 떠들어 댄 덕분에 현장 분위기도 훈훈했다.

“평균 시청률이 19.4퍼센트니까, 작가님?”

“제가 이겼나요?”

“왜 이렇게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거죠? 아, 아까워, 이럴 줄 알았으면 20퍼센트에다 거는 건데…… 이게 다 예진 배우님 때문이에요.”

“갑자기 제 탓은 왜 하세요?”

“그러셨잖아요. 요즘은 뭐 9퍼센트로 시작한다고요. 그게 아니었으면 내가 되는 건데…….”

“생각보다 물욕이 많으셨네요.”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딨습니까? 없던 마음도 생기는 게 사람인데.”

“그래도 시청률 높게 나온 거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큼큼, 제가 언제 시청률 높게 나왔다고 싫다고 했습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좋겠네.”

경우는 청모와 예진이 아웅다웅하는 소리에 웃고 말았다.

그러다 한쪽에서 그늘진 얼굴을 한 재환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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