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1화 (31/250)
  • #31. 눈에는 눈, 이에는 이 (4)

    가끔 실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이성적이었다.

    “고 작가야 말로 뭘 잘했는데? 거기 올라온 이야기 하나도 거짓된 게 없잖아. 슬럼프 빠져서 자기 글 쓸 생각은 안 하고 공모전 수상자 억지로 떨어뜨린 게 누군데?”

    “…….”

    “걜 이용해서 고 작가 글을 쓰게 하려던 것도 사실이고, 안 그래?”

    “도움 좀 받으면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글이 안 나오는 걸 어떡해. 박민정 걔를 옆에 두고 자극받으면서 슬럼프를 극복해 보려 했다고. 그게 뭐가 나빠?”

    “변명일 뿐이야.”

    “변명? 나만 이럴 거라고 생각해? 아니, 다들 그래. 이순정 작가가 보조 다섯씩 두는 거 알아? 스피드한 전개, 롤러코스터급 사건 진행, 그게 다 그 작가 머릿속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 한 사람 머리로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 거냐고? 다섯 명이나 굴리니까 겨우 나오는 거야. 솔직히 그 사람이랑 나랑 다를 게 뭐야? 근데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럼 너도 그렇게 하지 그랬어? 차라리 보조 작가 다섯 들이고 소재, 아이디어 던져 주고 대본 하청받지 그랬냐고. 근데 넌 그 정도도 안 됐던 거잖아. 네 힘으로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으니 그런 거잖아!”

    “그래서 뭐? 나보고 뭘 더 어쩌라고?”

    “그래, 그만하자.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 더는 같이 갈 것도 아닌데.”

    “지금 그거 무슨 뜻이야?”

    “고명희 작가, 오늘부로 우리 ‘내일 프로덕션’과 계약은 파기야.”

    “뭐? 뭐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지. 회사에 손실을 끼치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물론 이번 일로 회사가 입은 손해 모조리 고 작가한테 배상하라고 하고 싶지만 공모전 일, 함구한 내 책임도 있으니까 그렇게까진 하지 않을게.”

    “이봐, 정 대표!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이게 내가 20년 우정 생각해서 고 작가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그러니까…… 이 시간 이후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이건 내 마지막 부탁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정 대표의 얼굴에 지금은 때가 아니라 느낀 고명희도 그대로 나가 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정 대표의 화가 누그러지면 또 언제 그랬냐 싶게 자신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 대표의 각오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그에겐 한 명의 작가보다 ‘내일 프로덕션’이 더 중요했으니까. 적어도 그는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아니었다.

    잠시 창밖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정 대표는 마침내 휴대 전화를 들었다.

    * * *

    “네……. 그러셨군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프로덕션의 정명도 대표의 전화를 받은 경우는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확실히 정명도 쪽에도 압박을 넣은 게 주효했다.

    솔직한 심정으로야 그녀에게 더한 짓도 하고 싶었지만 박민정의 작품을 빼앗기 전 일을 막았던 탓에 법으로 그녀에게 제재를 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일’에서 쫓아냈으니 그녀의 손과 발을 잘라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 삶에서 그녀를 곁에서 지켜본 게 10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에도 그녀는 결국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했다. 애초에 유령 작가를 들이지 않았으면 또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제작사까지 손절한다면 그녀는 절대 재기에 성공하지 못한다. 절치부심으로 겨우 슬럼프를 극복한다고 해도 말이 많은 그녀를 다시 써 줄 방송사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있다 한들 자신이 다 막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이게 다 네 덕분이다.”

    경우의 말에 강철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웃었다.

    “참, 석주한테 ‘내일 프로덕션’ 주식 사들이라고 해. 떨어졌을 때 사 둬야지.”

    “알겠어. 이참에 나도 좀 사 둘까?”

    “그럴 돈이나 있고?”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무시가 아니라 걱정이다, 이 친구 놈아. 참, 주식은 차명으로 사야 하는 거 알지? 정 대표한테 알려지면 곤란해.”

    “설마 너 정 대표 경영권까지 위협하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전생의 그가 고명희 밑에서 고생했던 것도 정 대표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니. 정 대표에게도 악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 말대로 움직여 주는 제작사 대표 하나쯤 있는 거 나쁘지 않잖아.”

    “가만 보면 우리 대표님이나 너나……. 아니지. 최고봉은 회장님이시지?”

    “갑자기 회장님이 여기서 왜 나와?”

    “남매가 완전 아버지 판박이라고. 닮아도 너무 닮았어.”

    민경우의 기억 속 민 회장을 떠올린 경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닮긴 뭐가 닮아?”

    “하루아침에 사람을 완전히 매장시켜 버렸잖아.”

    “그거야 그럴 만하니까 그런 거고.”

    “아무렴 그렇겠지. 근데 그 임시찬 감독인가 하는 사람, 네가 그렇게까지 돈을 쓸 필요가 있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야? 한두 푼도 아니고 빚까지 탕감해 줄 정도로?”

    “음, 아마도.”

    “무슨 대답이 그래?”

    경우 역시 강철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경우는 임시찬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좋은 조건에 제작사로 이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니까.

    물론 그렇게 했다면 고명희와 정명도 사이를 갈라놓는 데 다른 방법을 썼어야 했을 테지만.

    어쨌든 갑작스러운 촬영 감독의 공백은 곧바로 드라마에 부담으로 다가올 테지만, 일이 일어나기 전 먼저 알았으니 대체 가능한 사람으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굳이 사정까지 해 가며 그를 붙잡아야 할 이유가 경우에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기와의 대화로 촬영 감독이 그저 배우들을 카메라에 담는 그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을 경우는 알게 되었다.

    ‘제가 작가님의 의도를 파악해 연출을 하듯 촬영 감독도 제 연출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좋은 그림이 나오는 거죠. 그런 면에서 MBS 안에 임 감독님을 따를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영향을 끼쳐 시너지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은기에겐 임시찬이 그랬다. 누구보다 오래 일해 왔고 서로를 잘 아는 그들이 앞으로도 같이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거기다 돈 때문에 쫓기듯 후회할 선택을 그가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방송국을 나가는 게 그의 뜻이었다면 모를까 그런 것만은 아니었으니.

    특히나 고명희가 개입한 일이라면 자신 때문일 텐데, 그는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이 적어도 나쁘게 바뀌도록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나 같으면 연봉 많이 주겠다, 이 참에 제작사로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거야 우리 생각인 거고.”

    “왜? 그 사람이 뭐라 해?”

    어쨌거나 이번 일에 있어서 임시찬의 가장 중요했던 터라 경우는 그를 만나 상황을 말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그런 그에게서 예상외의 대답이 나온 거였다.

    “방송국에 남으려 했던 이유가 있더라고.”

    “그래? 뭔데?”

    “생각보다 애사심이 깊더라고.”

    “엥?”

    경우는 임시찬이 한 말을 떠올렸다.

    ‘꿈이었습니다. MBS. 멋지지 않나요? 그리고 작가님이야 모르시겠지만 은행에 가 보세요. 대출 조건이 달라집니다. 하루아침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제작사 계약직보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회사 정규직.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전 방송국이 쫓아내기 전까진 붙어 있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현실적인 사람이 대출까지 받아서 불확실한 주식에 투자를 한 건지 사람은 참 알다가도 모를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번 일로 그에게 빚을 지워 뒀으니 경우는 손해만은 아니란 생각이었다.

    * * *

    날이 갈수록 촬영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방송일이 다가왔다. 편집본을 본 경우는 만족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트 촬영 중 잠시 휴식 시간이 되자 청모가 운을 띄웠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방 시청률 내기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누구부터 하실래요? PD님?”

    “나야, 뭐. 최근 들어 우리 드라마만큼 재미있는 드라마 본 적이 없으니까 한 40퍼센트?”

    “이야, 역시 PD님은 통이 크셔. 다음 분?”

    청모가 종이에 기록을 하는 동안 이번엔 재환이 나섰다.

    “그래도 영화 출연만 하던 강범석 씨가 나오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니까 한 25퍼센트는 나오지 않을까요?”

    “재환 배우님 25퍼센트.”

    “저는 9퍼센트요.”

    “예진 배우님, 여주인공씩이나 되시는 분이 너무 적게 부른 거 아닙니까?”

    “저는 현실적이거든요. 요즘 드라마 보통 시청률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우와, 완전 냉정해.”

    “첫방 시청률이 뭐 중요한가요. 종영 시청률이 더 중요하죠. 그땐 30퍼센트 넘을 거예요.”

    “역시, 그렇게 나와야죠. 자세히 보니 열정이 가득한 분이셨네.”

    구대수와 도은철을 비롯 출연 배우들은 물론 촬영 스탭들까지 모두 내기에 참여하고 마지막으로 경우의 차례가 되었다.

    “작가님은요? 얼마나 걸 생각이십니까?”

    “18.5퍼센트에 100만 원 걸겠습니다.”

    “역시 작가님 통이 크시다니까. 작가님이 이기시면 우리 또 회식하려나?”

    청모가 은근한 미소로 물어오자 경우는 조금 냉정히 말했다.

    “글쎄요, 제가 이번엔 돈 쓸 데가 좀 있어서요.”

    쿨하게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청모는 얼떨떨했다.

    “아니, 무슨 이럴 때 저렇게 계산적이야? 이 숫자……. 왜지? 왜 작가님이 내기에서 이기고 돈을 가져가는 게 눈에 보이는 거 같지?”

    “그러면 조 감독님이 작가님 비슷하게 쓰시면 되잖아요.”

    “오호, 역시 배우님은 배우신 분.”

    청모는 결국 18퍼센트에 걸며 만약 자신이 이 내기의 최종 승자가 된다면 경우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모두 다 갖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청률 내기가 일단락되고 시간이 조금씩 흘러 첫방을 앞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떨리는 마음으로 또 누군가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첫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아내인 윤정숙이 운영하는 갤러리의 미술품을 매입한다는 핑계로 해외로 나가 버리자 부부 동반 모임에 홀로 다녀온 민 회장은 열 시가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아침 있을 조찬 모임을 떠올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때 거실엔 아직 잠들지 않은 지선이 TV를 보고 있었다.

    “이제 들어오세요?”

    자식이 넷이나 있었지만 집안은 언제나 고요했다. 이미 결혼을 해서 첫째가 분가를 한 이후 아들들이 하나둘 집을 나갔다. 딸인 지선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지만 애초에 다정한 부녀 사이가 아니었으니 집안이 절간처럼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선 역시 자신의 일이 바빠 아침 식사 때나 퇴근 후 잠깐 볼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건만 오늘은 어쩐 일로 지선이 거실에 나와 있었다.

    “아직 안 잤니?”

    “네.”

    “피곤할 텐데 어서 쉬어라.”

    들어가려던 민 회장을 붙잡은 건 지선이었다.

    “경우,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다른 사고는 치지 않는 모양이더구나.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안심했다는 건 아니다. 지금이야 내 눈치 피하느라 잠자코 있는 거지만 언제 본병이 도질지 알 수 없는 거 아니냐?”

    지난번 드라마 제작 지원에 대한 문제로 비서실장과 이야기를 나눈 탓에 민 회장이 경우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지선은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의기소침하고 말았다.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동생에게 유독 관심이 없는 그의 모습에 어쩐지 경우가 더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럴 일 없을 거예요. 말썽을 부릴 만큼 한가하지 않거든요. 아, 지금 시작하네요.”

    마침 TV에선 광고가 끝이 나고 <셀룰러 메모리>의 1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경우가 쓴 드라마예요.”

    지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극본 민경우라는 이름 석 자가 자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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