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30화 (30/250)
  • #30. 눈에는 눈, 이에는 이 (3)

    “재벌가 비서들이 이짓 저짓 다 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 날 줄은 정말 몰랐다. 적당히 비위나 맞추면 먹고사는 데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고.”

    소파에 털썩 앉은 강철이 내내 투덜거렸다.

    “그래서? 무슨 얘기 하는지는 들었어?”

    “야, 숨 좀 쉬자. 어째 목도 마른 것 같고. 맥주 있지? 맥주나 한 캔 좀 갖다 주지?”

    “야, 설마 너 또 여기서 자려고?”

    “이제 이 소파가 우리 집 침대보다 더 편해. 아, 맥주 좀 달라니까. 목말라, 얼른.”

    한숨을 내쉰 경우가 맥주를 가지러 가자 그 뒷모습을 강철이 지켜보고 있었다.

    예전보다 일이 더 많아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늘 사고만 치던 경우가 이렇게 자신의 생떼에도 고분고분해진 걸 보면 아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강철은 최근 들어 처음 경우와 친구가 되었던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련하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옛 시절이 그래서 문득문득 떠올랐다.

    경우가 가져온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강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근데 그 두 사람 사귀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남자가 여자 데리고 칼질하러 가는 거면 그런 거 아니야? 사귀지도 않을 건데 그런 데는 왜 같이 가는데? 도은철 그 사람, 그 여자한테 관심 있나?”

    “남의 사생활까지 알 것 없고. 그래, 둘이 무슨 이야기했는지 들었어?”

    “공간이 나눠져서 잘 안 들렸단 말이야.”

    “그래서 못 들었다는 거야?”

    “성격 급하긴.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것도 몰라! 그럴 줄 알고 내가 다 준비했지.”

    그러면서 꺼낸 것은 펜 모양의 소형 녹음기.

    “너, 이런 것도 가지고 다녔냐?”

    “네가 하도 사람 뒷조사시키고 그러니까 필요할지 몰라서 가지고 다녔지.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몰래 이거 집어넣느라 힘들었다.”

    엄살을 부린 강철이 녹음기를 틀자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고명희가 제일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역시나 경우, 그였다. 그리고 한 사람 더 있었으니 임시찬이었다.

    “임시찬 감독님한테 무슨 일이 있나? 야, 강철아.”

    “왜? 또 임시찬이란 사람 알아봐 달라고? 그럴 줄 알고 내가 이미 다 조사해 왔다. 그래서 늦은 거 아니냐.”

    “오, 강철이.”

    “됐네요, 이 사람아. 똥개 훈련시키기 전에 알아서 기어야지요.”

    “그래서? 임 감독님 상황이 어떤데?”

    “파산 나기 직전이야. 애들 교육시킨다고 식구들은 다 미국으로 갔는데 요즘 미국 사정이 좋지 않잖아. 우리도 뭐 조금씩 안 좋아지니까 환율이 치솟고 있고. 아마 혼자 벌어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야. 미국 학비나 물가가 좀 비싸냐. 그래서 대출도 받고 주식에 손을 댔는데…….”

    “요즘 주식도 곤두박질치고 있으니 곧 망하게 생겼다는 거네.”

    “그러니까 회유를 하려면 역시 돈이겠지?”

    “돈이라…… 돈이라면 내가 더 많은데 단순히 돈으로 뭘 어쩌자는 건지…….”

    한참 생각에 빠진 경우는 마침내 무언가 생각이 떠올랐다.

    * * *

    정 대표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던 그날 이후, 임시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돈에 허덕이던 그는 은행 대출이 막히자 주변인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재정 상태가 최악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분야나 그렇듯 프리랜서는 본인이 어떻게 하기에 따라 수입이 달라졌다.

    프리가 모두 잘 번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중에선 잘나가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니 안정적인 월급을 포기하고 방송사를 나오는 이들도 있는 것이고.

    고명희가 봤을 때 임시찬의 실력이라면 이적 후 방송사에 상관 없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흥행 여부에 따라 성과급까지 받는다면 파산 직전의 형편이 조금은 나아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방송사에 붙박이처럼 남아 있을 인재를 끌어올 수 있다면, 민경우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은 물론 최근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정 대표에게도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 대표, 그러니까 내일 프로덕션의 대표 정명도는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드라마 제작사를 업계 최고로 끌어올리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려면 ‘유니언 스튜디오’를 넘어서야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어쨌든 그 때문에 공모전까지 열어 작가들을 뽑은 것은 물론 PD에 촬영 스탭까지 인재를 모으고 있었다. 이 바닥은 실력 있는 인재야 말로 경쟁력의 전부였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임시찬과 마주한 고명희.

    함께 일한 적이 없어서 이름만 알고 있었던 고명희를 실제로 만나게 된 임시찬은 얼마 전 도은철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실제로 그녀를 만나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씀드릴게요. 감독님을 저희 내일 프로덕션으로 모실까 해요.”

    “네? 저를요?”

    “네. 제가 ‘내일’ 고문을 맡고 있는 건 아시죠.”

    “그럼요.”

    “저희 ‘내일’에서는 실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거기에 임시찬 감독님은 가장 알맞으신 분이라 판단했어요.”

    “연출자라면 모를까, 저는 단순한 촬영 감독일 뿐인데 이런 말씀을 하시니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왜 저인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드라마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죠. 전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빛과 피사체의 적절한 조화, 대비를 통한 색감.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서 단순한 장면이 마음을 울리고 기억에 남을 명장면으로 탈바꿈하죠. 그게 가능한 사람이 바로 임 감독님이구요. 현장은 스튜디오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렇죠. 현장에 있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깁니다. 맑다고 했는데 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우박도 쏟아지고. 예상 못한 변수, 이게 참 골 때리거든요.”

    “그런 점에서 감독님의 임기응변이야 잘 알려진 사실이죠.”

    “뭐, 그 정도까지야…….”

    “거기다 프리 프로덕션까지 실력이 있으신 감독님은 임 감독님뿐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저희 ‘내일’에서 감독님을 모시려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렇게 좋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찬양을 해도 임시찬이 쉽게 넘어올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 고명희는 여기서 강력한 한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안 했군요. 감독님을 저희 ‘내일’로 모시는 조건으로 계약금 5억을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지금 받으시는 연봉 두 배는 보장하고 성과급도 지급할 생각입니다.”

    경력 있고 실력 좋은 촬영 감독을 데려오기 위한 연봉을 정 대표에게 확인한 고명희는 자신 있게 미끼를 던졌다. 역시 사람은 돈 앞에서 흔들리기 마련이니까.

    “아시죠? 이런 제작사는 월급보다 성과급이 더 높을 때도 많다는 거요.”

    당장 돈에 허덕이는 임시찬에게 그녀의 제안은 무척 달콤했다. 돈 앞에서 당당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임시찬의 안색은 더욱 흐려졌다.

    “하지만 지금 새로 들어간 드라마가 있는데요. 그게 다 끝난 후라면 모를까…….”

    “감독님,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거예요. 시기 보고 상황 따지다가 버스 지나가고 나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리고 돈 앞에 의리 생각할 거 뭐 있나요? 이 정도면 오히려 감독님 쪽에서 감지덕지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흠,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지금 감독님 사정을 좀 알게 되었거든요. 어쨌든 감독님한테 좋은 조건인 건 맞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작가님 말씀대로라면 굳이 제가 ‘내일’로 가야 할 메리트는 없는 것 같군요. 그 정도 제안이라면 많이 받았거든요.”

    달라진 그의 태도에 고명희는 이제야 제대로 말이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금에 1억을 더 드리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인터뷰 하나만 해 주세요. 감독님이 방송국을 나오게 된 계기가 재벌 작가의 갑질 때문이라는 걸로요.”

    사악하게 미소 짓는 고명희와 달리 임시찬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 * *

    아침부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겨우 깬 고명희는 짜증이 치솟았다.

    “왜 이렇게 전화질이야? 나 늦게 일어나는 거 알잖아.”

    [지금 자고 있을 때야! 당장 회사로 튀어와, 당장!]

    정 대표였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목소리에 잠이 깬 고명희는 부재중 통화가 수십 통이 와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거기다.

    “시연아! 시연아!”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보조 작가를 불렀지만 이미 출근했을 시간이 지났음에도 작업실엔 사람의 인기척 또한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불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내일 프로덕션’에 도착한 고명희는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사무실 내 모든 사람들이 응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자신을 향한 거리낌 없는 적대의 시선도 느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 대표 역시 통화 중이었다.

    “아닙니다. 공모전 하나 하려면 돈이 얼만데요. 예, 아무렴 그것 때문에 공모전을 열기야 하겠습니까. 네, 네. 그럼요.”

    “그 부분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저희는 아직 그분을 스카우트하려는 계획이 없습니다. 그럼요.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데 괜히 방송국 잘못 건드렸다가 좋을 게 없죠. 네, 네.”

    고명희는 정 대표의 전화 소리에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갔다.

    마침내 통화를 마친 정 대표가 맞은편에 앉자 이럴 때일수록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에 허리를 바짝 세웠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머리 위로 폭탄이 터졌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네?”

    “무슨 일인지 알아듣게 설명해.”

    “고 작가, 고 작가가 말한 실력 있는 촬영 감독이 MBS 임시찬이었어?”

    “난 또 뭐라고. 겨우 그것 때문이야?”

    “겨우? 지금 촬영 중인 감독을 데려오려 했던 게 겨우 그거야?”

    “말 그대로 촬영 감독 하나 스카우트하는 거뿐이야. 막말로 MBS에 촬영 감독이 그 사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 하다 보면 사정이 생겨서 바뀔 수도 있는 거지. 감독도 작가도 교체되는 마당에 그깟 촬영 감독이 뭐?”

    “고 작가!”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정 대표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을 고명희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야?”

    “한번 봐.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것은 고명희가 임시찬과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녹음 파일이었다. 음성 변조는 물론 이름이 나오는 부분이 전부 삐 처리되었지만 작가의 갑질 때문에 그만두는 걸로 해 달라는 음성은 똑똑히 녹음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그녀가 보조 작가에게 해 왔던 폭언은 물론 유령 작가를 들이려 했다는 것까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동안 그녀가 저질러 온 만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녹음 파일을 들은 사람들은 작가가 누군지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결국 고명희라는 이름 석 자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고명희가 소속된 ‘내일 프로덕션’엔 폭탄이 터졌고 지난해 상장 이후 최악의 주가 하락을 맞게 되었다.

    덕분에 정 대표는 아침부터 걸려 온 전화에 일일이 해명을 해야 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던 고명희는 미안한 마음에 오히려 큰 소리 치기 시작했다.

    “웃기는 사람이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는 거지, 왜 이런 걸 녹음해서는-.”

    “내가 분명히 말했지. 새명 아들은 건들지 말라고.”

    “걔만 아니었음 지금쯤 드라마 시놉 뽑고 그걸로 편성받아서 방송될 수 있었다고.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지금 당신 누구 편을 드는 거야?”

    “고 작가!”

    “앞에선 실없이 웃으면서 사람 바보 만들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건 바로 그놈이라고!”

    발악하는 고명희의 모습에 정 대표는 점점 더 차분해져만 갔다. 고명희는 그 모습에 더 불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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