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9화 (29/250)
  • #29.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

    강범석에게 할당된 촬영이 정확히 사흘만에 끝났다.

    그가 떠나고 드디어 드라마의 주인공인 우재환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우재환은 자신의 촬영이 없음에도 강범석을 보기 위해 매일 촬영장을 찾았다. 그리고 첫 촬영이 시작되자 그의 곁엔 그간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하도섭 실장도 함께였다.

    “넌 누가 뭐래도 내가 발굴해 낸 배우야. 첫 주연이라고 긴장할 것 하나 없어. 너를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

    배우인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재환은 그저 빙긋이 웃었다.

    선영이 퇴원하고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되자 하도섭은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그리고 홍보팀 이 대리의 말대로 약간 투덜대기는 했지만 재환의 주인공 캐스팅을 반겼다.

    아직 전담 매니저가 지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분간은 그가 재환의 로드 매니저를 자처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런 큰 배역은 처음이었던 탓에 적응을 할 동안 돕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그의 첫 번째 촬영이 시작되었다. 대본 연습 때 생각보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 준 그가 현장에선 어떤 모습을 보일지 사람들은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재환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레디, 액션!”

    은기의 사인이 떨어지자, 재환의 눈빛이 돌변했다.

    * * *

    이식 수술을 받은 후 정기적인 진찰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수혁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무거웠던 삶의 시름을 벗어던지고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딱 20대 중반의 젊은이와 같았다.

    그러다.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위용위용 위용위용.

    길을 걷던 수혁이 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다시 앞으로 가려 하지만 발걸음은 이내 멈춘다. 돌아보는 수혁이 새끼손가락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수혁은 소리가 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밝고 경쾌하던 걸음이 서서히 묵직하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 * *

    자고로 먹을 것을 베푸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경우는 간식차와 함께 촬영장에 등장했다. 간식차가 유행하기 전이라 사람들은 간식차가 현장에 도착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게 다 뭐야?”

    “푸드 트럭 같은데?”

    “아, 이 냄새. 나 떡볶이 귀신인데.”

    종목은 분식.

    커피는 질리도록 먹을 테니까 간식에 걸맞게 분식으로 한가득 준비했다. 거기에 앞치마를 입은 경우가 직접 배식에 나섰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떡튀순 있습니다. 드시고 싶으신 분들은 줄을 서시오.”

    희한한 광경에 줄은 어느새 길게 늘어섰고 경우는 밝게 웃으며 현장 사람들에게 분식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야, 이거 완전 맛있어. 먹고 더 먹어도 돼요?”

    “무한 리필 가능하니까 부족하면 언제든지 오세요.”

    재벌집 아들이라고 하더니 직접 겪은 경우는 소문과 달리 소탈하고 거리감이 없었다. 개중에는 그의 재력과 준수한 외모, 거기다 겸손한 성격에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도 있었으나 그런 쪽으론 영 꽝이었던 경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야, 근데 아까 한수혁, 좀 쩔지 않았냐?”

    “맞아. 걸음을 멈칫하다가 돌아서는데 완전 발연기.”

    “발연기가 뭐냐, 발연기가.”

    “왜, 발도 연기를 하니까 발연기지.”

    “난 그것보다 멈칫하면서 돌아보는 거 있잖아. 그 부분부터 완전 강범석 아니었어?”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진짜 강범석이 들어앉은 것처럼 완전 똑같았다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화제가 된 건 재환의 연기력이었다.

    사실 바쁜 와중에 경우가 촬영장을 다시 찾은 이유 역시 재환 때문이었다.

    경우가 적극 추천해 주인공으로 밀어 넣었고 그의 연기력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첫 촬영이다 보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지금까지의 반응을 보니 모두 호평이었다.

    정작 화제의 당사자는 간식차가 왔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경우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그를 찾아나섰다.

    야외 촬영이었던 탓에 나무 그늘이 진 곳에 재환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엔 너덜해진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하도섭이 무언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지만 재환은 대본에 집중했다.

    그렇게 들여다봤음에도 부족했는지 재환은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대본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경우는 이제 그에 대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경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어떻게 됐어?”

    [야, 너 솔직히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이제 하다 하다 사람 미행까지 시키고.]

    “됐고. 그래서 지금 뭐 하는데?”

    [누굴 만나려는 모양이야. 아, 왔다. 어?]

    “뭐야? 뭔데 그래?”

    [만나는 사람이 도은철인데? 너희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아냐?]

    “우리 드라마에 누가 출연하는지도 다 아는구나?”

    [아, 뭐래. 그래서 이제 어쩌라고?]

    “될 수 있으면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어 봐.”

    [야, 그러다 걸리면?]

    “어차피 그쪽에서 널 모르는데 딱 잡아 떼면 되는 거 아니냐? 아니면 그쪽 팬이라고 해. 괜히 엄살 떨지 말고 파이팅!”

    [하여간 이 악덕 업-.]

    경우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날밤, 고명희를 만난 후 악몽까지 시달렸던 경우는 강철에게 그녀의 뒤를 지켜보라고 했다.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건만. 하필 만나는 사람이 도은철이라니.

    생각 없는 도은철이 무슨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상대가 고명희니 안심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 * *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레스토랑.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이뤄진 곳에서 식사를 하던 은철은 앞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고명희를 힐끗 보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저녁을 사겠다고 한 게 그녀라 장소를 정한 것도 그녀였다. 고급스러운 취향이 나쁘지 않았다.

    시찬의 말마따나 얼굴이 뭐 중요하겠는가.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솔직히 나이에 비해 동안에 속했다.

    그 역시 돈의 힘.

    어떤 작가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집필한다는데 못해도 중타는 치는 고명희였으니 그녀 역시 그러지 말라는 법 없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적당히 어장 관리를 해 두자고 마음먹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그녀와 결혼까지 한 은철은 풍족한 노후를 상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도은철의 생각 따위야 관심 없었던 고명희는 슬슬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는 어때요? 작가가 신인이라고 하던데 어렵거나 뭐 그런 건 없나요?”

    “뭐 딱히 나쁠 건 없지만 아무래도 신인 작가다 보니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죠. 돌아가는 분위기를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잖아요.”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고명희는 그의 말 속에 뼈를 느꼈다. 배우를 하루 이틀 본 그녀가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캐치할 수 있었다.

    “신인 작가들한테 많은 기회가 가야 하기는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그렇게 규모가 큰 드라마를 맡는다는 건 좀 우려스럽네요.”

    “내 말이요. 역시 작가님이랑 나랑 말이 통하네. 단막극이 왜 있겠어요. 이건 구구단 겨우 외울까 말까 한 애한테 미적분 풀라고 한 격이니 배우로서 제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그래도 도 배우님이 계시니 다행이군요.”

    “그게 또 그런가요?”

    겉으로 보기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고 갔고 식사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핵심을 찌르지 못한 고명희는 어딘지 조급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고명희의 마음도 모른 채 도은철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작가님은 사단을 만들 생각 없습니까?”

    “사단이라니요?”

    “유명하신 작가님들 보면 사단이 있잖습니까. 작가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배우들이 있는 것처럼 이 배우는 저 작가의 사람이다 뭐 그런 거 말입니다. 작가님 정도의 명성과 실력이 있으면 아무 때나 기용할 수 있는 배우가 있으면 좋잖습니까.”

    “글쎄요, 제가 아직 그 정도 급은 아니잖아요.”

    “왜요? 작가님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하죠.”

    사단이라는 것이 만들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캐스팅이 그렇게 힘들었던 적도 없었던 고명희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고명희와 친분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드라마에 고정으로 출연하길 희망했던 은철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배우뿐만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스탭도 함께하면 좋죠. 김경진 작가와 정해용 감독이 콤비를 이루면서 시너지가 좋아졌잖아요. 거기다 조명에 영상미도 중요한 시대고요.”

    “지금 같이하시는 감독님이……?”

    “아, 김은기 PD요?”

    “김 PD 스타일은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가끔은 알아듣기 힘든 걸 요구하는 감독도 많잖아요. 근데 적어도 김 PD는 그렇지 않아요. 디렉팅을 알기 쉽게 해 주니까. 그래도 그 사람 라인이 없어서 빛을 못 본 케이스죠.”

    “그래요? 듣기론 이번 신인 작가를 꽂은 게 김 PD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거 다 헛소문이에요. 김 PD가 무슨 힘이 있어서 작가를 꽂았겠어요. 그 반대라면 모를까. 하여간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 재벌이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니고…… 아주 드라마를 돈으로 발라 버렸으니 이 드라마가 어디로 갈지…… 그렇게 돈이 많으면 차라리 나나 아니면 시찬 형님…….”

    쉴새 없이 이야기를 하던 은철이 말을 멈추자 의아하게 생각한 고명희가 물었다.

    “시찬 형님이라면……?”

    “아, 임시찬 촬영 감독님 말이에요,.”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고명희는 그가 누군지 금방 떠올렸다.

    “아, 그분 유명하시잖아요.”

    “네, 저랑 친한 분이시긴 한데……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해도 될지…….”

    “무슨 일인데요? 표정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뭐 별건 아니고, 지난번 술자리에서 나눴던 대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요즘 사정이 좋지 않은가 봐요.”

    “사정이라면……?”

    “그 형님, 기러기 아빠거든요. 다달이 미국으로 보내야 하는 돈도 많은데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모양이더라구요. 주식을 해서 날렸다나 뭐라나. 하여간 돈이 웬수죠.”

    “돈 문제야 돈만 있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죠.”

    이야기를 듣던 고명희는 마침내 방법을 찾았는지 사악한 미소를 지었지만 은철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정 대표!”

    대표실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고명희 탓에 정 대표는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 깜짝이야”

    “정 대표, 정 대표!”

    “뭔데?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우리 촬영 감독 스카우트하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 촬영 스탭도 뽑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이왕이면 실력 있는 사람으로 뽑으면 좋잖아.”

    고명희의 말에 정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째 자기 말에 영 신빙성이 없지? 또 무슨 꿍꿍인데?”

    “꿍꿍이라니? 이왕이면 실력 좋은 사람 스카우트하면 좋잖아.”

    “그래서 누군데? 그 실력 좋은 사람이?”

    “미리 알면 재미없지. 안 그래? 내가 일단 만나 보고 옮길 의사가 있으면 그때 알려 줄게.”

    “어째, 자기 지금 수상하다.”

    “수상하긴 뭐가 수상하다고 그러는 거야? 듣자 하니 방송국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다는데 지금 돈이 필요한 모양이더라고. 어차피 스카우트할 거면 계약금 줄 거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고? 알아야 지원 사격할 거 아니야?”

    “괜히 소문나서 되던 것도 안 되면 어떡해.”

    “내가 알아도 안 된다는 거야?”

    “아, 좀 기다려 봐. 그 사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월급보다 목돈 필요할 거야. 근데 자기가 나서면 괜히 자존심 상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기회를 봐서 우리도 인재를 갖추자고. 내가 뭐 어려운 말 하나?”

    “그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만나 보겠다고. 괜히 정 대표가 나섰다가 잘 안 되면 실망이 클 거 아니야. 정 대표 생각해서 이러는구만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근데…… 정말 무슨 꿍꿍이는 없는 거지?”

    “있기는 뭐가 있다고 그래. 없어. 없다니까 그러네.”

    정 대표는 고명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태연한 고명희의 시선에 더는 어쩌지 못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겨우 촬영 감독 하나 데려오는 것으로 그쪽 팀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못할 거라고.

    방송국엔 인력이 넘쳐났으니 한 명이 빠지면 곧바로 대체 가능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곧 방송을 앞둔 드라마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촬영 감독의 부재는 분명 소란을 안겨 줄 것이며, 그때 그 일의 원흉을 경우에게 돌린다면 어떻게 될지 고명희는 그 점이 무척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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