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8화 (28/250)
  • #2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1)

    술에 취한 은철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다.

    은철은 아까부터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도무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촬영 감독 임시찬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중이었다.

    “나이도 한참 어린놈의 새끼가 따박따박 말대답이나 하고 말이요. 형님, 내가 이 바닥에 이 짓하고 산 지 벌써 20년이 넘었수다. 어디 가서 내가 이런 대접을 받지 않아요. 그런 나를 이렇게 무시해서 된다고 생각하슈?”

    평소라면 듣는 귀가 많은 이런 곳에서 하지 않았을 이야기였지만 술에 취한 은철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막하고 있었다.

    “내가 괜히 그런 게 아니잖수. 다 작품을 생각해서 그런 건데 알지도 못하고. 어린놈이 이러쿵저러쿵. 도대체 이 드라마가 어떻게 굴러가련지.”

    “…….”

    “근데 형님. 아까부터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수?”

    “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긴 뭘. 좋은 거면 나도 좀 같이 봅시다.”

    막으려는 임시찬의 휴대폰을 억지로 빼앗은 은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게 뭡니까? 형님, 주식도 하십니까?”

    “아니, 그냥…… 재미 삼아…….”

    “그나저나 이거 미국에서 판다는 그 핸드폰 아닙니까? 형님 참 나이에 비해 젊게 사시는 건 여전하시네.”

    “지난달에 미국 갔을 때…… 애들이 하도 사 달라고 해서 내가 먼저 써 보고…….”

    “아참, 애들이랑 형수 미국에 있죠? 형님은 좋겠수. 토끼 같은 자식에 여우 같은 마누라도 있고. 멀리 있으니 보고 싶을 때만 가끔 보고.”

    “그러면 뭐 해. 다달이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내 앞에서 그런 말 마슈. 내 보기엔 이러니저러니 해도 배부른 소리로밖에 안 들리니까.”

    “그럼 너도 빨리 결혼해.”

    “결혼은 혼자 합니까? 사람이 있어야 하죠!”

    “넌 너무 눈이 높아.”

    “눈이 높기는…… 아무렴 형님만 할까. 듣자하니 형수님이 엄청 미인이시라면서요. 그러니 안 보여 줄려고 그렇게 꽁꽁 숨기셨지.”

    “내가 언제?”

    “하여간 괜히 그러신다. 그나저나 주식으로 재미 좀 보셨수?”

    “재미는 무슨. 요즘 계속 떨어져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그럼 진작 발을 빼지. 지금이라도 팔아 버려요.”

    “안 돼. 이대로 팔면 그야말로 손해야. 다시 오를 때까지 버티고 있어야지. 어떻게든 버틴 사람이 이긴다고 하잖아.”

    “난 그렇게 복잡한 건 모르겠수다. 나하곤 안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시름이 깊은 시찬은 좀처럼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의 주장에 아직 어린 애들을 미국으로 보냈지만 생각보다 교육비가 비싸 허덕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탓에 시찬은 주변의 말만 듣고 주식을 시작했다. 처음엔 재미도 보았지만 지난번 미국 방문 때 은행이 문을 닫고 경기가 안 좋아지는 것 같더니 그 영향이 한국까지 미치고 있었다.

    계속 수익이 날 거라 믿고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은 상황에서 주식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집값까지 떨어지자 시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진짜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응? 뭐라고요?”

    꾸벅꾸벅 졸던 은철이 비몽사몽 물었다.

    “그냥 잠이나 자.”

    하지만 곧이어 울린 전화벨 소리에 은철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 고 작가? 어쩐 일이에요?”

    “나야 잘 지내지. 지금? 우리 회식 중인데.”

    “오늘 우리 고사 지냈잖아요. 촬영 끝나고 회식하는 중이죠.”

    “감독이랑 작가랑 다 있지.”

    “여기? 삼성동 명성의 한우.”

    “네, 그래요.”

    은철이 전화를 끊자 시찬이 물었다.

    “누구야? 고 작가가?”

    “고명희 작가요.”

    “그 사람이 왜? 친해?”

    “전에 작품 하나 같이한 적 있어요. 근데 내가 어딨는지를 왜 묻지?”

    “혹시 자네한테 관심 있는 거 아냐?”

    “예? 그런가?”

    “잘해 봐. 고 작가 정도면 괜찮지 않아? 고료도 꽤 될 텐데.”

    “아휴, 내 스타일 아니에요.”

    “그 나이에 아직도 스타일 찾냐? 영원히 젊을 것도 아니고, 아차 하다가 한 방에 훅 간다.”

    “내가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니지.”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괜찮을 때 아무나 잡아서 결혼해. 이쁜 얼굴도 3년이면 끝나. 요즘은 주머니 두둑한 게 장땡이다.”

    “됐수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곧 죽어도 이상형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거요. 그나저나 이놈의 인기, 하여간 피곤하다니까.”

    귀찮아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은지 경우를 씹으며 잔뜩 찌푸렸던 은철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혹시나 옷매무새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살피던 그는 머리까지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 시각, 고명희는 생각에 잠겼다.

    정 대표와 한바탕하고 난 후 작업실로 돌아온 그녀는 민경우가 새로 들어간다는 드라마에 대해 검색했다. 그러다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도은철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순전히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느 날 제 인생에 뛰어든 이상한 놈.

    명희는 그를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박민정과 무슨 관계인지, 왜 갑자기 나타나 훼방을 놓는 것인지 면상에 대고 묻고 싶었다. 한 번 그런 생각에 휩싸이자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남의 회식 자리에까지 찾아온 그녀는 막상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꼴이 우스운 탓이었다.

    어떻게 왔다고 해야 할까?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지나던 길에 들렀다고 할까나?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무색하게도 식당 입구에 사진 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 그대로의 경우가 홀로 앉아 있었다.

    * * *

    ‘15화 대본 아직도 수정을 안 끝내면 어쩌자는 거야?’

    ‘네가 뭘 안다고 나한테 클리셰를 운운해?’

    ‘너 지금 내가 슬럼프라고 나 무시하니? 나 없이 네가 이 바닥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게 최선이야?’

    ‘야, 이은석!’

    상념에 빠졌던 경우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더 이상 이은석이 아니었다. 자신이 민경우라는 사실을 자각한 그 순간부터 마음 속 혼란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어째서 이 자리에 고명희가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어느새 고명희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민경우 씨?”

    “네, 제가 민경운데…… 설마 고명희 작가님?”

    “날 알아요?”

    “제가 작가님 팬이거든요. 꼭 한 번은 뵙고 싶었는데, 와아.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근데 저를 어떻게 아세요?”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건너 건너 들어서 알고 있어요. 마침 이 근처를 지나다가 여기서 회식한단 소리를 듣고 혹시나 싶어서 들러 본 거구요. 이렇게 만난 거 앞으로 오다가다 보게 될 것 같은데 후배님하고 이렇게 인사도 나누니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드네요.”

    “저, 그럼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경우는 워너비를 만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고명희를 바라봤다. 최대한 그녀가 의심하지 않게, 그래서 방심한 틈을 타 나중에 뒤통수를 맞도록,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을 즐겼던 것을 후회하도록.

    “저 선배님이 쓰신 <게임의 규칙> 정말 재미있게 잘 봤어요.”

    “그거 좀 오래된 작품인데 그걸 다 기억하고 있네요?”

    “원래 남자애들은 보물섬에 대한 로망이 있거든요. 어릴 때 만화 같은 거 보면서 한번씩은 상상하잖아요.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모를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 같은 거 말이에요.”

    “그렇죠.”

    “그게 독립운동을 위해 고종이 숨겨둔 비자금이었다는 걸로 이어지면서 중간중간 아무렇게나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이 단서가 되는 게 정말 인상깊었어요. 저 못해도 열 번은 봤던 것 같아요.”

    아마 고명희 본인은 모를 테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면 밤잠을 줄여 가며 그녀가 쓴 드라마를 보고 또 봤다는 사실을.

    미련스럽게도 그는 영상 필사까지 했다. 단순히 대본만 필사하면 실력이 빨리 늘지 않는다는 커뮤니티 회원들의 조언에 일시 정지를 눌러가며 영상에 나오는 대로 대본을 쓰고 또 썼다.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살린 대본을 쓰고 싶었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중노동이었다.

    뭐 돌이켜 보면 그 덕에 대본 쓰는 실력이 더 빨리 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내 드라마를 그렇게 열심히 본 사람이 후배 작가가 되었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네요.”

    “특히나 일본과 관련된 중요한 날짜들을 전화번호나 비밀번호로 쓴다거나 주인공이 들고 있던 책이 독도에 관한 거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았어요. 이 드라마가 학교 다닐 때 나왔더라면 공부에도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원래 날짜나 시기 외우는 게 정말 어렵잖아요.”

    신나게 이야기하던 경우는 고명희의 이마에 빠직 하고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경우가 언급했던 부분은 고명희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소품을 담당하는 스탭 중 하나가 역사 덕후였던 터라 재미를 위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거였다.

    고명희는 단순히 비밀번호를 설정한다거나 주인공이 눈치 보느라 옆에 놔둔 책을 대충 들춰 본다고 썼지만 그 스탭은 그런 의미 없는 부분들을 그런 식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숨은 떡밥 찾기처럼 그런 설정을 찾아내는 게 유행이 되듯 번졌고 고명희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철저히 계산해 설정했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 버렸다.

    스탭은 드라마에 악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동영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드라마 촬영 비하인드를 소개하는 채널에 직접 나와 그 부분을 언급하면서 모든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어쨌든 인터뷰 때는 예정에 없던 질문이라 즉흥적으로 답해 버렸지만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으니 고명희는 그 부분을 언급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걸 알기에 경우는 일부러 언급했던 것이고.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뭐 대단할 것까지야……. 아무튼 드라마 잘되길 바랄게요.”

    “벌써 가시게요? 안에 안 들어가 보시고요?”

    “민경우 씨 만났으니 됐죠. 시간도 늦은 거 같은데 불청객이 괜히 끼어들면 분위기만 이상해질지 모르니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럼.”

    불청객?

    어차피 그런 거 따질 위인이었으면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을 터.

    경우는 그녀가 자신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박민정 때문이겠지만 아무리 캔다고 해도 박민정과 경우의 관계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고명희가 어떤 식으로 나온다고 해도 겁나지 않았다. 예전처럼 당하기만 했던 자신이 아니었으니. 만약 시비를 건다면 몇 배는 갚아 주겠다고 다짐했다.

    최대한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 짓던 고명희는 차에 오르자 마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흥, 그냥 있는 집 자식도 아니고 재벌씩이나 되는 놈이 로망?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부족함 없이 자란 그에게 그런 로망이 있을 리 없었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을 보는 그 눈빛은 서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박민정에 대한 건 꺼내지도 못했잖아.”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던 상황을 떠올린 고명희는 어쩌면 그가 다른 식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대화를 끌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긴 것하고 다르게 만만치 않은 놈이란 생각이 들자 그 눈빛이 자신을 향한 적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싹은 자라기 전에 밟아 버려야지.”

    경우의 뒤에 누가 있는지, 정 대표의 경고 같은 건 이미 안중에도 없었던 고명희는 경우를 어떻게 밟아 버려야 하나 궁리하던 중이었다.

    그때 요란하게 그녀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인간은 왜 또 전화질이야.”

    도은철이었다. 고명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

    [고 작가님, 어디 계세요?]

    “아, 지나던 길에 잠깐 들른 거라 방해될까 봐 그냥 집으로 왔어요.”

    [방해라니요. 그래도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다가 그냥 가셨다니 제가 가만히 있을 순 없죠. 어떠세요? 괜찮으시면 이번 주말 저녁이나 같이하고 싶은데.]

    하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한숨이 절로 나온 고명희는 거절을 하려다 어쩌면 이용해 먹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대신 제가 살게요.”

    그녀는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