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7화 (27/250)
  • #27.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 (4)

    서류를 뒤적이던 고명희가 그것을 테이블 위로 딱 내려놓았다.

    “나 요즘 글자 보기도 싫은 거 몰라? 그냥 말로 해 줘. 이런 거 들이밀지 말고.”

    까칠하게 구는 고명희 탓에 내일 프로덕션의 정명도 대표는 한숨을 내쉬었다. 끝날 것 같던 그녀의 슬럼프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만 부리던 성질을 요즘은 자신에게까지 부리고 있으니 이러다 차기작은 날 새는 게 아닌가 싶어 생각이 깊어지는 요즘이었다.

    “그래서? 박민정을 꿰어 낸 게 도대체 누구야? 그쪽 대표? 대표가 누구랬지? SBC 출신 PD라고 하지 않았어? 혹시 그놈이야?”

    “뭐가 그렇게 급해?”

    “급하지. 이것보다 안 급한 게 어딨어?”

    “고 작가.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자기한테 심사를 맡아 달라고 했던 건, 새로운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아서 차기작을 어서 쓰라는 거였지 이런 식으로 이용하라는 말이 아니었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음에도 없는 사람 옆에서 부추겨 놓고 이제 와서?”

    “지금 자기가 쓰기만 하면 SBC든 MBS든 편성은 따 놓은 거나 마찬가진데 어서 써야 할 거 아냐. 고 작가가 부탁해서 알아보긴 했지만 이렇게 된 거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 두고 앞으로의 일-.”

    “내가 그 어린 거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정 대표가 알기나 해? 난 그저…… 도움을 받으려던 것뿐이었어. 그런데 사람을 도둑으로 취급했다고. 그런데 나보고 가만있으라고? 정 대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자기가 한 짓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 탓만 하는 그녀에겐 뭐라 해도 들리지 않았다.

    더는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던 정 대표는 듣고 싶은 말을 어서 해 버리고 그녀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쪽 대표는 아무 상관도 없어. 우리 공모전과 관련된 사람하고 연줄도 없더라고. 확실히 그쪽은 아니야.”

    “그럼?”

    “그쪽 홍보팀에 예전에 우리 회사에 있던 애가 하나 이직했거든. 걔한테 물었더니 이상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최근에 투자를 받았대.”

    “투자? 그게 박민정하고 무슨 상관인데?”

    “투자 금액이 자그마치 50억이야.”

    “50억? 그게 많은 건가?”

    “투자금이 중요한 게 아니야. 조건이 중요한 거지. 바로 박민정을 고용하는 거였거든.”

    “뭐? 그러니까 누군가가 박민정을 채용하는 조건으로 50억을 투자했다고?”

    “근데 더 대박인 건 이번 투자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거야. 앞으로도 투자를 할 의향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였다고 하더라고.”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야? 아니, 박민정하고는 어떻게 되는 사인데? 내가 봤을 때 박민정, 옷차림하며 말투, 생활 습관까지…… 특출 난 게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야. 돈이 궁해서 내가 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일 정도로 드라마 말고는 생각도 없는 애였고.”

    그러니 그딴 제안을 받아들인 거라는 말을 정 대표는 굳이 하지 않았다.

    “민경우라고, 새명 그룹 막내아들이라고 하더라.”

    “새명 그룹? 갑자기 그쪽 이름을 왜 튀어나오는데? 혹시 투자금을 미끼로 스튜디오 글라슨지 클라슨지 거기 인수하려는 속셈이야?”

    “스튜디오 글로리!”

    “지금 그거 따질 때야?”

    “흠흠. 정확한 건 나야 모르지. 그런데 더 이상한 건 뭐냐면 그 민경우라는 사람, 지금 이번에 입봉한다고 하더라고. 드라마 작가로.”

    “뭐?”

    “얼마 전 주연 배우 둘 다 사고 나서 제작 중단된 MBS 드라마가 있어.”

    “알아, <사냥개>. 황 CP가 그 일로 나한테 와서 어찌나 하소연을 하는지……. 설마 그 시간대로 들어갔다는 그 재벌집 아들이 걔야?”

    “그래.”

    명희는 일전에 그 일로 황성준을 만나 술을 마시면서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쌩양아치 같은 놈이 끼어들어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니 그놈이 자신의 일에도 난장판을 만들어 놓을 줄은 몰랐다.

    “그럼 새명 쪽에선 본격적으로 이쪽 일에 뛰어든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번 드라마 제작 지원이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고. 덕분에 MBS는 입이 귀에 걸렸지. 드라마 결과하고 상관없이 제작비는 넉넉하다 못해 남을 지경이니까.”

    “도대체 박민정은 걔랑 무슨 관계야? 설마 나한테서 그쪽으로 갈아탄 건가? 스폰이라도 잡은 거야?”

    “입조심해. 보통 놈이라도 잘못 엮였다가 구설수에 휘말리는데 하물며 상대는 새명이야. 괜히 건드려서 좋을 거 없다고.”

    “그거야 만나 보면 알겠지.”

    “왜? 만나 보게? 아서라. 오랜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괜히 나서지 말고 슬럼프나 극복할 방법을 생각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아픈 곳을 건드린 탓에 명희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친구 하나 잘못 둔 죄라며 정 대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한때는 고명희에게 다른 마음을 품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과거지사. 이제와 남은 건 그 무서운 미운 정뿐.

    자신이 한창 잘나갈 때만 생각하고 천지 분간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언젠가는 손을 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소속 작가이니 더는 엇나가지 않게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가만히 있어. 이건 대표로서 하는 말이야. 만약 고 작가가 개인적인 행동을 했다가 회사에 손실이라도 입히는 날엔 회사 차원에서 제재가 들어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정 대표, 잊은 거 같은데 나 고명희야. 내 앞가림은 내가 잘하니까 괜한 소리 하려거든 나 이만 갈게.”

    명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서둘러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태풍이 몰아치던 것처럼 소란스러웠던 대표실이 적막에 감싸자 정 대표는 어쩐지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

    * * *

    다른 사람도 아닌 우진이 자신을 향해 권총을 겨누자 규영 역시 본능적으로 권총을 들었다.

    “너 뭐야? 당장 그거 내려놔. 당장.”

    “위험한 거 들고 있는 건 너도 마찬가지면서 그런 말하면 전혀 설득력 없지 않아?”

    “김반수…… 설마 네가 죽인 거야?”

    순간 우진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네가 그런 거야? 사람들 말마따나 네가 그런 거냐고!”

    “아니라고 하면 믿을 건가?”

    “최우진!”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넌 너무 말이 많아.”

    낮게 한숨을 쉰 우진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연이은 두 발의 총성, 바닥에 쓰러진 두 사람을 향해.

    “컷, 오케이!”

    은기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가득 채웠다. 단번에 떨어진 오케이 싸인.

    은기는 왜 사람들이 강범석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많지 않은 대사였지만 강범석은 자기만의 최우진을 완벽히 분석, 눈빛만으로 모두를 제압해 버렸다.

    그 덕분에 함께 맞춰 연기한 구대수의 연기력까지 한 단계 상승한 기분이었다.

    만족의 미소를 지은 은기가 곧바로 옆을 돌아봤다. 그곳엔 컷 소리가 났음에도 현장에 시선을 떼지 못한 경우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완성도 높은 대본을 위해 돌아가 수정을 하겠다는 그를 일부러 붙잡았다.

    경우가 대본을 잘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까지는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 그에게 현장의 생생함을 전해 주고 싶었다. 그래야 드라마를 쓰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다행히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한 은기가 열연을 펼친 두 배우를 치하했다.

    “아, 범석 씨 아주 좋았어요. 대수 씨도요.”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대본이 이미 나왔으니까 범석 씨 남은 분량까지 앞으로 이틀 정도만 더 고생하면 되겠어요.”

    “후시 녹음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추가 촬영도 괜찮습니다.”

    양심은 있어서 많이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하려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개런티는 경우가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지급한 터라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은기는 톱스타가 생각보다 겸손하다며 감탄했다.

    각도를 달리해 몇 번 더 같은 씬을 찍고 장소를 옮겨 오늘 촬영 일정을 모두 소화한 이들은 경우가 예약해 놓은 회식 장소로 향했다.

    * * *

    불판 위에 노릇하게 구워진 소고기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청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을 잡았다.

    “회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 드라마를 이끌어 가실 수장 김은기 PD님의 한 말씀 있겠습니다. 자, 박수!”

    손사래를 치던 은기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드라마는 시작되었고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올라탄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드라마를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서로 믿고 의지해서 함께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 봅시다!”

    “옳소! 자, 박수!”

    “그럼 이쯤에서 우리 드라마를 가능하게 한 주역이신 민경우 작가님께서도 한 말씀 있으시겠습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자리에 선 경우가 입을 열었다.

    “원래 학교에서도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이 길어지면 싫어하는 법입니다. 먹을 거 앞에 두고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술이든 고기든 마음껏 드십시오. 카드는 카운터에 맡겨 놓겠습니다.”

    “와아!”

    자신보다 배는 큰 박수 소리에 은기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뭐야, 반응이 왜 이렇게 달라?”

    “그게 꼰대와 요즘 세대의 차이란 거죠!”

    “뭐? 꼬, 꼰대? 야, 내가 어딜 봐서 꼰대냐?”

    “거두절미하고 딱 핵심만 말하잖아요.”

    “야, 나도 그렇게 길게 말 안 했어.”

    “아, 뭐래. 잔말 말고 잡수기나 하세요.”

    그렇게 은기와 청모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회식에 참석한 강범석은 자신을 향한 열렬한 시선에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쪽을 바라보자 상대는 서둘러 시선을 피했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범석은 자리에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재환의 바로 앞에 털썩 앉은 강범석이 비어 있는 재환의 술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습니까?”

    “네? 아,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까부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습니까. 원수진 것처럼요.”

    “그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선배님 너무 팬이라서요.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서. 죄송합니다.”

    “팬이었구나. 고맙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역할이 뭐예요?”

    “우재환이라고 합니다. 한수혁 역을 맡았습니다.”

    강범석이 새끼손가락으로 왼쪽 관자놀이를 살짝 긁었다.

    “아, 엄청난 오디션의 경쟁을 뚫고 선택된 행운의 주인공? 열심히 해 봐요. 지켜볼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자신이 있는 자리까지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오자 경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행운의 주인공?

    아니, 그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승자였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주인공 자리를 꿰찬 그의 가능성을 강범석이 알아보지 못한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마 강범석은 회식이 끝날 때까지도 재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그가 회식을 빙자해 연기 분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캐스팅이 결정되고 나름 한수혁에 대해 연구하던 재환은 경우에게 그런 질문을 했었다.

    ‘한수혁이 최우진의 기억을 떠올릴 때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기억이 떠오른다는 게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기억은 결국 그 사람의 일부분이거든요.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최우진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땐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해 보는 거죠. 점점 그 사람화되어 가는 겁니다. 물론 눈앞에 최우진이 있다면 그를 관찰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긴 하겠네요.’

    그리고 최우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재환은 그가 연기는 최우진은 물론이고 강범석의 평소 행동, 몸짓, 말투,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담아 두기 위해 그에게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연기 중 자신도 모르게 실제 본인의 습관이나 말투 같은 것들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무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의 회식이 무르익을 무렵,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경우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잠시 바람이라도 쐴까 밖으로 나간 경우는 식당 마당에 놓은 의자에 앉아 혹시 별이 보이나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이었다.

    어디선가 차가 다가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린 건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분위기를 방해하는 차 소리 때문에 그쪽으로 시선을 둔 경우는 순식간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주 낯익은 여자 하나가 차에서 내려 경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여자, 오랜 시간 그를 정신적으로 지배했던 한 여자!

    고명희가 저쪽에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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