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6화 (26/250)
  • #26.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 (3)

    들뜬 얼굴의 경우와 달리 은기와 청모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혹시 두 분 밤 새신 거예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

    “말은 바로 하랬다고, 원래 그런 줄 알고 있었지만 선배도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아니, 고작 1회 출연하는 것뿐이잖아요. 근데 뭘 그렇게 고심하고 그러는데요?”

    원래 최우진 역에 캐스팅된 배우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미지가 맞지 않다며 은기가 취소를 해 버렸다.

    어차피 1회 출연이었고 출연한다고 큰 이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쪽에서도 이해를 해 준 눈치였다.

    그나저나 이 역할이 이렇게 은기에게 시름을 가져다 줬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우진.

    그는 <셀룰러 메모리>의 모든 시작점이자 원인 제공자였다. 드라마 속의 모든 사건의 시작은 그가 쓴 책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천재 소설가로 나오는 최우진은 지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이전 생에서 그의 역할은 미비했지만 이번에 새로 쓰면서 경우는 분량이 많지 않은 그의 역할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등장은 첫 회로 끝이 나지만 끝날 때까지 등장인물 전부를 지배하는 인물이기도 했으니 단순히 특별 출연이라고 넘어갈 수 없었던 은기의 마음도 이해가 되는 듯싶었다.

    그렇다고 촬영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마냥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경우였다.

    “저는 배우 캐스팅이 감독님의 고유 권한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전적으로 감독님께 맡기려고 했어요. 한수혁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머진 모두 감독님 의견을 따랐던 것 같은데…….”

    “작가님 마음이야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죠.”

    캐스팅은 감독 고유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감독보다 작가의 영향력이 더 큰 드라마계에서는 작가가 캐스팅에 관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드라마 집필을 할 때 조금 더 입체감 있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실제 배우를 가상 캐스팅해 놓고 글을 썼기 때문에 작가의 의견이 가장 적합한 탓이었다.

    그렇지만 경우는 누구보다 은기의 의견을 물었고 그의 뜻을 따랐다. 어쩔 수 없었던 우재환만 빼고는.

    “역할에 맞는 배우를 찾는 게 어려우신 거라면 이번에도 제 의견을 좀 따라 주셨으면 싶은데요.”

    자신만만해하는 그의 모습에 은기는 이번 일을 경우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캐스팅에 성공했다는 경우의 연락에 은기는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캐스팅은 없었으니 첫 촬영이 될 때까지 작가와 감독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드디어 첫 오픈 세트 촬영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행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커다란 상 한가운데에 잘 익은 돼지머리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촬영 전 아무 사고 없이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는 고사는 드라마 시작 전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물론 그날 고사상에 모은 돈으로 회식을 하는 게 더 큰 이벤트긴 했지만 어쨌든 감독을 비롯, 그날 함께하는 배우들과 스탭들이 모여들었다.

    “돼지머리가 확실히 웃고 있네요. 우리 드라마 잘될 것 같지 않아요?”

    “어째 내가 보기엔 네가 웃고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당연하죠. 저녁 회식 기대되지 않아요? 메뉴는 뭘까요?”

    촬영 후 이어질 회식에 잔뜩 기대한 사람들의 대화를 뒤로 하고 가장 먼저 은기가 절을 하고는 5만 원짜리를 두 콧구멍에 쑤셔 넣었다.

    “제발 사고 없이 끝날 때까지 무사히 진행되게 해 주십시오.”

    “에이, 감독님. 그렇다고 10만 원이 뭐예요? 쓰는 김에 팍팍 좀 쓰시지.”

    너스레를 떠는 청모의 소리에 다들 왁자지껄 웃었다. 은기가 실눈으로 그를 째려봤으나 오늘 같은 날은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오늘의 주된 관심사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경우.

    그가 재벌 아들이라는 소문은 널리 알려졌으니 그런 그가 얼마나 내놓을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그가 내놓는 액수에 따라 촬영 후 이어질 회식에 대한 질이 판가름 날 판이었다.

    마침내 경우가 고사상 앞에 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던 바로 그때 경우가 꺼낸 것은 검은색의 신용카드 한 장.

    경우는 신용카드를 돼지 입에 물리고는 절을 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현금은 안 들고 다녀서요. 오늘 저녁 회식은 제가 다 쏘겠습니다. 명성의 한우로 미리 예약해 뒀으니까 촬영 마치시면 그쪽으로 가시죠.”

    “하, 한우?”

    “소고기는 사랑이지.”

    “소고기! 소고기! 소고기!”

    촬영이 끝나고 있을 회식을 잔뜩 기대한 사람들은 의욕이 끓어올랐다. 마치 어서 촬영을 끝내고 회식을 가겠다는 의지가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해맑은 이들 사이로 조명팀 철희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 저건 연회비만 200만 원이 넘는다는 상위 0.05퍼센트 사람들만이 소유한다는 바로 그 블랙 카드?”

    “네가 그걸 왜 알고 있냐?”

    비슷한 나이와 입사도 비슷한 시기에 했던 철희는 청모와 친근하게 지내는 이들 중 하나였다.

    청모의 물음에 철희는 뜨끔해하더니 이내 표정을 고쳐 말했다.

    “야, 내가 좀 알면 안 되냐? 어? 나도 돈 벌어서 어? 저런 거 하나 장만할 수도 있는 거지!”

    “선배가 이런 기분이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는 가랑이 찢어진다. 정신 차려!”

    은기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청모의 모습에 영문을 알지 못한 철희가 소리쳤다.

    “야, 너나 잘해!”

    그렇게 고사가 시작되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 밴 한 대가 현장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드디어 오셨군.”

    영문을 알지 못한 이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은기는 긴장감에 괜히 손을 비볐고 경우만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등장한 것인가 촉각이 곤두선 가운데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영화 배우 강범석이었다.

    “강범석 씨가 여긴 웬일이래요? 우리 드라마 출연하나?”

    “그럴 리가 있겠어? 영화만 하는 사람이잖아.”

    “근데 왜 떡하니 고사상 앞에 저러고 있느냐고요?”

    “그러게. 정말 출연하는 건가?”

    경우의 부름에 고사상으로 다가간 강범석은 자연스럽게 돈 봉투를 내놓으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오기로 한 최우진 역을 맡은 배우가 그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미심쩍어했던 사람들조차 모두 놀라고 말았다.

    강범석은 그가 출연한 영화가 두 편이나 천만 관객이 들만큼 인기 있는 영화 배우였다. 할리우드에서도 출연 제의가 올 정도로 연기력까지 인정받는 그는 오직 영화에만 출연해 왔다.

    그의 첫 주연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고 그의 몸값이 올랐을 때 드라마 제의를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는 모두 다 거절하고 오직 영화만 출연했다.

    그런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이곳 드라마 촬영장에 나타나니 사람들은 모두 의외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강범석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강철을 통해 강범석의 연락처를 알아낸 경우는 그를 직접 찾아가 시놉과 대본을 보여 주며 드라마에 출연해 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그는 처음부터 거절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드라마엔 출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저한테 연기는 예술입니다. 감독의 적확한 연출, 애드리브조차도 계산된 환경에서 최상의 연기가 나온다고 보거든요.”

    “그렇죠.”

    “하지만 드라마 현장은 그렇지 못하잖습니까? 드라마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드라마 제작 환경이 어떤지는 다들 아시잖습니까. 얼마 전 사고도 그저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정된 참사였죠.”

    “그 말씀은 제작 환경이 문제지 저희 작품이 맘에 들지 않다는 건 아니시죠?”

    “네, 시놉도 대본도 재미있었습니다. 영화였다면 출연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대본은 잘 봤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작품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들어갈 여지는 충분했던 것이다.

    “보시다시피 최우진은 딱 1화 출연이 전부입니다. 뒷부분에 회상 씬이 나오긴 한데 그나마 분량이 많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제작 환경에 그렇게까지 영향을 받을 것 같지는 않는데요?”

    “네. 하지만 시작이 무서운 겁니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다음의 여지를 주는 거니까요. 뭐라고 말씀하셔도 전 안 합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강범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경우가 서둘러 말했다.

    “지난 영화에서 받은 개런티를 드리겠습니다. 분량은 얼마 안 됩니다만 제안 드린 최우진이 그만큼 중요한 역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강범석 배우님이기에 드리는 제안입니다. 그래도 안 될까요?”

    멈칫하는 그를 향해 경우가 쐐기를 박았다.

    “지난 영화 관객이 천만이 넘어서 러닝 개런티를 받았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촬영 시간이야 길어봤자 3일. 몇 달 동안 영화 찍은 일에 비하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것 같은데요.”

    “…….”

    “배우 인생에 천만 관객을 얻는 게 흔한 일이 아니듯 이런 기회도 아무 때나 오지 않죠.”

    영화 배우들은 늘 흥행에 성공하길 바란다. 하지만 천만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다.

    결국 강범석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경우는 돈이면 없는 정신력까지도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엄청난 액수의 개런티를 받았다는 사실은 쏙 빠진 채 작가와의 인연으로 드라마에 출연했다는 보도 자료를 돌린 강범석은 그렇게 촬영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리고 믿기 힘든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걱정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촬영 준비부터 모든 것이 사소한 문제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스탠바이가 끝나고 마침내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차에서 내린 박규영은 사방을 둘러보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경치 좋은 언덕에 짓다 만 채 방치된 건물이 폐가처럼 버려져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출판 기념 팬 사인회가 열리던 서점에서 갑자기 사라진 최우진. 그리고 그로부터 소식이 끊긴 지 벌써 여러 날째.

    이곳으로 오라는 듯 주소만 달랑 보낸 문자에 규영은 화가 날 대로 나 있었다.

    “해명을 해도 모자랄 판에 뭐 하자는 거야!”

    인터넷에 누군가 올린 게시글을 시작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범죄가 그의 소설 속 수법과 유사하다는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절친한 친구의 일이었기에 규영은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단박에 해명하지 않고 우진이 사라져 버리자 규영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 답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규영은 폐가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 * *

    사방에 늘어진 거미줄, 잔뜩 쌓여 있는 먼지 탓에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먼지들이 풀썩였다.

    1층을 찬찬히 둘러본 규영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위로 올라섰다. 계단 중간에 보이는 발자국들이 이곳에 분명 누군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마침내 2층으로 올라선 그때, 무언가를 보고 놀란 규영이 서둘러 다가갔다.

    의자에 앉힌 채 결박된 사람은 3일 전 사라져 실종 신고가 된 교통과 경찰 김반수였다.

    살인범에게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경찰은 제 식구를 찾기 위해 권총까지 지급한 후 일대를 수색하다 온 길이었다. 해서 김반수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규영은 서둘러 그의 맥을 짚어 보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 체온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휴대폰을 꺼내 신고라도 하려 했지만 산속이라 그런지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위층에서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되지 않지만 혹시라도 메시지가 닿을까 싶어 몇 자 적어 보낸 규영은 권총까지 손에 쥔 채 조심스럽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툭 터진 황량한 3층에 테이블이 하나, 등지고 선 누군가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무언가를 만지고 있었다. 남자를 조준한 규영이 마지막 한 발자국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상대가 재빨리 뒤돌아 보았다.

    그는 최우진이었다.

    사라졌던 우진이 20년 지기 친구 규영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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