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5화 (25/250)
  • #25.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 (2)

    도은철은 괜찮은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고는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크게 한 방이 없는 배우였다.

    연기자 도은철이라고 했을 때 바로 떠오르는 대표작이 없는 게 그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시청자들의 뇌리에 새겨질 만한 그런 작품이 하나쯤 있었으면 했다.

    그때 마침 소속사로 <셀룰러 메모리>의 시놉시스가 들어왔다. 오디션을 볼 신인을 위한 시놉시스였지만 그것을 본 순간 은철은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연기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까놓고 보니 신인 작가에 주인공조차도 무명 배우.

    “아, 이거 불안한데. 네임드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작가나 배우 이름 보고 따라오는 시청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 방송국에서 잘나가는 작가들한테 엄청난 원고료를 주는 거잖아.”

    작가나 주연 배우 둘 중 하나였다면 모를까, 둘 다 신인이란 사실이 은철은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만두기 아까울 정도로 대본은 물론, 그가 맡은 정보현이란 인물은 매력이 있었다.

    그렇게 고심이 깊어지던 중 매니저와 대화를 나누던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주인공보다 자신이 더 돋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철은 대본 리딩이 한차례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 홀로 앉아서 대본을 살펴보던 경우에게 다가갔다. 작가가 생각하는 정보현이란 인물이 가진 서사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작가를 끌고 오려는 속셈이었다.

    “정보현은 출세에 대한 야심이 무척 크죠.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도 출세에 대한 욕망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한 서사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어떻게요?”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당하는 게 많았던 거죠. 어린 시절 동생이 죽임을 당했지만 상대가 거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거죠. 복수하고 싶었을 겁니다. 되갚아 주기 위해 출세에 집착했던 거구요. 그러다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 버린 거죠.”

    경우는 은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그 의도가 뭔지는 진작에 파악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봤을 때야 신인 작가였지만 경우는 분칠하는 자들의 속성을 너무 잘 알았다.

    유령 작가였던 탓에 직접 배우를 만나진 못했지만 고명희가 배우와 미팅을 마치고 온 날이면 그들의 디테일한 요구 사항에 일일이 대본 수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대사 분량이나 등장 시간을 초 단위까지 적어 와 따지는 매니저들도 있었으니까.

    덕분에 각 배우들의 분량 체크는 물론이고 타이틀을 남자나 여자로 특정하지 않는 노하우도 생겼다.

    사실 은철의 경우는 애교에 불과했다. 물론 그가 단순히 드라마 속 자신의 비중을 늘리고 싶어하는 욕심이었다면 경우는 그냥 넘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마음만은 아니었으니.

    경우는 감탄한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어요.”

    경우의 반응에 은철은 이제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서사를 풀어내려면 당연히 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그런 서사를 가진 인물이라면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으니 이미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두각을 보인다면 다음 작품 들어가기도 더 수월해질 거란 계산이 섰다.

    하지만.

    “근데…… 정보현에게 그 정도의 서사가 필요할까요?”

    “네?”

    “정보현은 악역이에요. 악역한테도 서사를 주면 악역이 나쁜 짓을 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야기가 훨씬 밀도가 생기고 빈틈이 없어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유 없이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분노를 유발하는 캐릭터밖에 되지 않지만 이유가 있다면 생각할 여지를 주겠죠.”

    “아니죠. 나쁜 놈한테 그러면 안 되죠. 나쁜 놈인데.”

    “네?”

    그가 맡을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은철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이유가 있다는 건 강자들의 논리 아니겠어요? 나쁜 짓 하면서 사람들한테 나쁜 놈이라고 욕먹고 싶지 않은 건 너무 욕심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철칙이 하나 있는데요.”

    “철칙이요?”

    “네. 자고로 드라마 보면서 욕하는 재미도 좀 있어야죠. 그래야 이 어려운 시국에 스트레스가 좀 풀리지 않겠어요?”

    경우가 씩 웃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지. 자고로 드라마는 욕하면서 보는 게 최고라고.

    “나쁜 놈은 이유 상관 없이 그냥 나쁜 놈이에요. 말씀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대본에 적용하는 건 어려울 것 같네요. 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 히트한 드라마 설정하고 좀 유사하지 않나? 거긴 동생이 아니라 형……이었죠?”

    “네? 비슷해요?”

    “서브 주인공이 악역이었는데 선과 악의 혼동이 아주 잘 어우러졌죠.”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사이코메트리라는 신선한 소재와 탄탄한 대본으로 수많은 폐인을 양성한 드라마가 있었다.

    “그 캐릭터가 인상에 남으셨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건 그 드라마의 주된 메시지니까 필요한 설정이었던 거고 정보현까지 그렇게 해 버리면 시청자들이 우리 드라마를 아류라고 하지 않겠어요?”

    경우의 말에 은철의 얼굴은 붉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디어가 온전히 자신의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쩐지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더라니.

    돌이켜 보니 그 역시 감탄하면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도 말씀해 주신 덕분에 정보현에 대한 방향을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조금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배우님 덕분에 좋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야 다행입니다.”

    뭔가 개운치 않은 떨떠름함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무조건 자기 주장만 강요할 수도 없어 아쉬움에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은철을 보며 경우는 생각했다.

    그의 한계점이 바로 거기라고.

    그는 기존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지 변신을 위해 악역을 선택했지만 혹시라도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박살 나면 그나마 그가 잘하는 역할도 맡지 못할까 봐.

    그렇다고 해도 모험을 해야 성장하는 법이다. 자고로 배우라면 악역도 맡고 식당에서 아주머니들께 등짝 한 대씩 맞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경우는 모두를 위해 그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경우의 계획이 어느 정도까진지 몰랐던 은철은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어서야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그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정보현이 점점 악랄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밥을 먹는 것처럼 욕을 먹게 될 거란 사실도.

    물론 작가한테 괜히 까불다가 뼈도 못 추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란 것도.

    * * *

    “너 아직도 안 가고 있었냐?”

    대본 연습을 마치고 나오니 강철이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시는 도련님이 일하시는데 비서가 대기하고 있어야죠.”

    “너 월급을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니냐?”

    “하여간 윗놈들은 아랫사람이 얼마나 바쁘게 일하는지 모르지. 하는 일 없이 자기들 돈만 축낸다고 생각하잖아. 솔직히 내 월급 네가 주는 것도 아닌데 너 너무하단 생각도 안 드냐?”

    “아니, 나야 집에 편히 갈 수 있으니까 당연히 좋지. 근데 괜히 회사에서 눈치 볼까 봐 그러지.”

    “그 회사 오너가 너네 누나다.”

    “…….”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기만 한 거 아니야. 대표님 호출하셔서 회사 들어갔다가 일이 있어서 온 거거든.”

    “누나가? 왜?”

    “됐어. 넌 신경 꺼.”

    “하여간 도련님 할 때는 언제고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너도 참.”

    “됐고 얼른 타세요, 도련님. 가 보셔야 할 곳이 있습니다.”

    “어딘데?”

    “설마하니 원양 어선에 팔아넘기기야 하겠습니까?”

    “짜식, 농담 참 살벌하게 한다.”

    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할까 싶어 뒤따라 왔던 청모가 감탄하며 말했다.

    “우와, 진짜 재벌은 다르네요. 개인 기사가 딸려서 다니네. 부럽다.”

    “부러우면 너도 돈 많이 벌어라. 또 혹시 아냐? 네가 국장 되고 사장까지 올라갈지.”

    “어느 세월에요. 꼬부랑 할아버지 되면요? 됐네요. 인생 역전은 한 방이죠. 이왕 이렇게 된 거 복권이나 사러 가야겠어요.”

    “힘내라. 근데 당첨돼도 그거 민 작가한테 껌값이겠지?”

    “아, 선배! 왜 남의 희망마저 꺾어 버리시는 겁니까!”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진다. 정신 차려 이놈아!”

    “너무하십니다. 술이나 사 주세요.”

    “촬영이 내일모레다. 술은 무슨.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일은 무슨……. 아, 최우진!”

    조금은 특별한 그 역할을 위해 야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청모가 투덜대고 있는 사이, 강철이 경우를 데리고 간 곳엔 석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비장한 결심을 했다는 듯 석주의 얼굴엔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할게요. 하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어.”

    맨날 아케이드 게임을 하다 VR 게임이라는 신세계를 맛보면 예전으로 돌아가도 만족하지 못한다. 석주가 지금 그랬다.

    그가 상상만 하던 것을 실제로 이룰 수 있는데 동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경우는 그에게 몇 가지 조건 사항을 덧붙여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뭐든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으니.

    “우선은 수습 기간을 둘게.”

    “왜요?”

    “처음인데 실수를 했다고 너한테 배상하라고 하면 그건 좀 가혹하지 않냐?”

    “배상도 해야 하나요?”

    “회사에 손실을 끼치면 당연히 배상도 하는 거다. 아무렴 네가 돈을 잃었다고 해서 내가 물어내라고 하지는 않겠지. 어차피 너한테 그럴 능력도 없고.”

    “…….”

    “그렇지만 책임감은 좀 느꼈으면 싶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살진 않거든. 그래서 손실이 발생하면 보수를 깎을 거야.”

    “보수도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아이 같은 모습에 경우는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난 너한테 일을 맡기는 거야. 일을 시키고 돈도 안 주는 건 노동력 착취, 그런 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렇죠. 사장님이 양아치는 아니죠. 아주 멋진 분이죠.”

    “어린놈이 벌써부터 사회 생활 참 잘한다.”

    “헤헤.”

    “웃을 줄도 알고.”

    “…….”

    “뭐라고 하는 거 아냐, 웃어. 웃을 일 있으면 웃고 그래야지. 어쨌든 일단 너한테 10억 정도 맡길 생각인데.”

    “그, 그렇게나 많이요?”

    “많아? 별로 안 많은 거 같은데.”

    “그거야 보스 입장에서나 그런 거구요.”

    뒤에서 지켜보던 강철이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어린애라 나름 적당히 부른다고 부른 거였는데.

    확실히 이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10억쯤은 하룻밤에 날려도 큰 타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속은 좀 쓰리겠지만 경우는 석주를 믿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앞으로 해내는 일들은 믿는 거겠지만.

    “어쨌든 초기 자금 10억에 수익이 나면 그중 5퍼센트를 너한테 줄게.”

    “5, 5, 5퍼센트요?”

    “너무 적지? 수습기간 끝나면 10퍼센트로 늘려 주마. 잘하면 당연히 성과금도 있을 거다.”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놀랐다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주는 사람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까지야.

    “일단 내가 준 돈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 계획서를 써 와. 필요한 건 여기 김 비서한테 말하고. 뭐든 지원해 줄 테니까.”

    “네.”

    “그리고 앞으로 인터넷엔 글 올리지 마. 될 수 있으면 이전에 쓴 글도 삭제해 버려. 난 널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 없거든.”

    “네, 알겠어요.”

    혹시라도 그가 올린 글들로 인해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까 경우는 미리 차단하기로 했다.

    어쨌든 욕심이 욕심을 낳는다고 늘어날 재산에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거기다 지금은 2008년.

    그 유명한 가상 화폐가 나오기도 전이었으니 상황 봐서 석주에게 슬쩍 흘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 조금 잃는다고 해도 석주를 격려하고 대인배인 자신의 모습을 어필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에 경우는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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