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 (1)
지선은 박 실장이 내민 서류를 다 보더니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러니까 이 최 상무라는 작자가 나도 모르게 우리 백화점 입점 브랜드에 뒷돈을 챙겨 받았다?”
“네.”
“것도 모자라서 지난번 면세점 입찰을 방해한 것도 그 인간 머리에서 나온 거고요?”
“죄송합니다.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미꾸라지 한 놈이 작정하고 물 흐리고 다니는데 우리가 그걸 어떻게 다 잡습니까. 박 실장님 탓할 생각 없어요. 다행히 면세점은 사업권을 따냈고 우리는 최 상무 목에 걸 목줄 찾았으니 길들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민준호 전무님과 끈끈한 유대감으로 엮여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준호가 미끼를 던졌고 욕심 많은 최 상무가 그 미끼를 문 거겠죠. 전부터 그 인간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쯤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어요. 문제는 어떻게 목걸이를 채우느냐는 건데…….”
새명유통의 전임 대표는 새명 그룹의 창업주였던 돌아가신 민판섭 회장의 사람이었다. 민판섭 회장의 경영권이 지금의 회장인 민홍준에게 넘어가면서 민판섭의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물갈이가 시작되면서 각 계열사의 주요 요직엔 민홍준 회장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새명유통만은 그러지 않았다. 다른 자식들이 지주 회사인 새명물산의 지분을 나눠 가지는 대신 유언장에 이름을 빼 버린 지선에겐 새명유통을 물려준 것이었다.
한마디로 유통을 먹고 떨어지란 거나 다름없었다. 출가외인이 될 지선에겐 그 정도도 충분하다는 계산이었다. 지선을 뺀 모두가 행복한 결정이라고 믿었지만 단 한 사람만은 그러지 못했다.
바로 최지열 상무.
민홍준의 사람이었던 그는 자신이 새명유통의 새 대표가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지선에게 돌아갔고 그녀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최지열은 능력 있는 누나를 견제하는 민준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자신의 능력, 그 이상을 바라는 욕심이 과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내가 밉보였으니까 뒤로 그런 공작을 한 거겠죠? 나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어떻게 처리할까요?”
“최 상무가 날 두려워했으면 좋겠어요. 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게. 그래야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 못 하겠죠?”
“잡아다 족칠까요?”
점잖은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소리에 지선은 빵 터졌다.
“하여간 우리 박 실장님 엉뚱한 건 알아줘야 해. 그보다 말이에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녀의 머릿속에 경우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박 실장님 혹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글쎄요? 비슷한 거 아닌가요?”
“경우가 그러더라구요. 미스터리는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파헤치고 서스펜스는 이 사건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느냐의 차이라구요.”
박 실장은 지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럼 서스펜스는 범행을 저지를 범인이 다시 등장할 수 있겠군요.”
“바로 그거예요.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가 당할지도 모른다면 그 공포심은 배가 되겠죠?”
“마음 놓고 있을 때 뒤통수를 맞으면 상당히 얼얼할 겁니다. 두려움도 느낄 테고요.”
“어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역시 박 실장님뿐이네요.”
“뜻에 맞는 시나리오 작성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오케이, 좋아요. 우리 막내는 요즘 뭘 하고 있으려나. 김강철 씨 출근했으면 내 방으로 좀 오라고 해요.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동안 귀여운 우리 막냇동생 신경도 못 썼네요.”
“김강철 씨 오늘 민경우 씨의 일로 오후에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요?”
“대본 리딩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 참석하시는 것 보좌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군요. 잊어버리고 있었네. 어쨌든 대신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제가 할 일입니다.”
“첫 촬영 날짜는 잡혔다고 했나요?”
“다음 주 수요일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일을 제대로 하기는 하는 모양이네요.”
“열심히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박 실장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보니까 빈말은 아닐 테고. 알았어요. 나중에라도 김강철 씨 들어오면 내 방으로 좀 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박 실장이 나가자 서류를 들춰 보던 지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건 그렇고. 딴짓하는 놈을 어쩌면 좋지?”
준호를 생각하던 지선이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대본 리딩이 있을 대회의실로 향하기 전, 은기와 함께 국장인 동권의 방으로 불려 간 경우는 격려를 빙자한 걱정 어린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잘될 거야. 내가 강력하게 추천한 대본이야. 이렇게 재미있는데 사람들이 안 볼 이유가 없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니까.”
“국장님이 더 걱정하시는 것 같은데요?”
“응? 내가?”
“아까부터 손을 떨고 계십니다.”
“이건 수전증이 있어서…….”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드라마 잘되면 모두 국장님 공으로 돌릴게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편성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 무명 신인 주인공으로 밀어주신 것도 있잖아요.”
“그거야 뭐 두 사람이 강력히 바라고 있으니…….”
“그래도 국장님이 반대하셨으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걱정하고 계신 것도 다 알아요. 근데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재환 씨, 이보다 더 좋은 캐스팅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 신인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우여곡절 끝에 제작에 들어가는 드라마다 보니 동권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치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처럼 동권의 말은 멈출 듯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대본 연습은 시작도 하기 전이었지만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대본 연습 시간이 다가와 풀려난 두 사람은 국장실을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의 내쉬었다.
경우는 잘될 거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지만 전생과는 달리 여러 가지 조건이 바뀐 상황이었던 터라 그 역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다른 일까지 있었으니…….
그런 경우에게 은기가 물었다.
“작가님,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오늘 안색이 영 안 좋아서요.”
사실 지난밤 수현에 대한 생각들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은기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본 리딩한다고 좀 설렜나 봅니다. 잠을 설쳤어요.”
“처음이니까요. 지나고 보면 별거 아닌 일도 처음엔 다 긴장하고 떨리고 그런 법이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국장님이나 저나 대본 정말 잘 나왔다고 생각하니까.”
“네, 그럴게요.”
“그럼 전 마저 준비할 테니까 작가님은 긴장 좀 풀고 오십시오.”
커피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한 경우는 1층 로비에 있는 커피숍을 향했다가 재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를 부르려다 어딘가를 보고 있는 재환의 안색이 어쩐지 나빠 보여 그만두었다. 단순히 첫 주연에 긴장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자세히 보니 재환의 시선 끝에 캐스팅 때 만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정보현 역할을 맡은 도은철과 그의 매니저였다.
어째 그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땜빵 드라마라도 해도 그렇지, 주인공으로 무명 신인을 데려다 쓴다는 게 말이나 돼?”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명색이 수목 미니 시리즌데 탑은 아니어도 A급은 데리고 왔었어야죠.”
“이거야 원. 그런 한참 못 미치는 놈한테 주연 자리 밀리는 건 줄 알았으면 괜히 하겠다고 나선 거 아닌지 몰라.”
“듣자하니 작가가 백으로 들어왔답니다. 아마 주인공도 그 백으로 들어온 게 아닐까요?”
“그렇지. 말로는 거창하게 오디션이네 뭐네 하고 있어도 결국엔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는 거잖아. 하여간 사람들 눈 속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야.”
“이렇게 된 거 다르게 생각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형님.”
“어떻게?”
“주인공보다 연기력으로 형님이 더 돋보일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참 잘들 논다.
이제 같이 일하고 매일같이 얼굴을 볼 사이에 저러고 싶을까 하는 생각에 경우는 좀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젠틀한 이미지의 도은철이 저런 식으로 후배 뒷담화를 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역시나 사람은 겉만 보고는 속까지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셀룰러 메모리>에서 정보현은 악의 축을 담당하는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시놉시스가 공개되자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있던 도은철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나이가 들어도 잘생긴 외모 탓에 꽃중년이라 불렸던 도은철은 특유의 나른한 이미지로 무능한 왕이나 위기에 빠진 중년의 역할을 주로 소화했다.
연기력도 나쁜 편이 아니었기에 평소 무력한 이미지였던 그가 반전을 가진 악역을 맡는다면 색다른 반응을 얻을 것 같기도 했고 그림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오디션 없이 바로 캐스팅이 성사됐다.
물론 함께 일하는 사람이 성격이나 인성도 좋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걸로 캐스팅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프로의 세계였으니.
두 사람이 사라지자 침울하게 있던 재환에게 경우가 다가갔다.
“괜찮아요?”
“아, 작가님……. 혹시 들으셨어요?”
“제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지 않아서 아주 잘 들리네요.”
“죄송해요. 저 때문에.”
“뭐가요?”
“그냥…… 저 때문에 괜히 작가님까지 욕 먹는 게 아닌가 싶어서.”
“욕이요? 누가 저 욕했어요?”
“네? 아까…….”
“뭐요? 아, 백? 그거 사실인데.”
“네?”
“나 백 있어요. 그러니까 경력도 없이 단박에 미니 시리즈 맡았죠.”
“…….”
“근데 나 그거 감사하게 생각해요. 세상엔 실력이 차고 넘치는데도 백이 없어서 기회조차 잡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거든요. 물론 난 백만 있는 건 아니죠. 실력도 같이 있죠. 이 정도 실력이면 출중하지 않나요?”
그제야 재환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네. 아주 출중하시죠. 집에서 대본 보면서 깜짝깜짝 놀랐어요.”
“거봐요. 그런 제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우재환 씨는.”
“…….”
“그러니까 어깨 펴고 당당히 네? 가서 연기로 다들 씹어 먹어 주자구요. 내가 배우님의 든든한 백이 되어 드릴 테니까.”
“네. 고맙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원래 이런 데선 신입이 빠릿빠릿하게 인사하고 다니는 겁니다. 아시죠?”
“네. 그럼.”
재환이 대회의실로 향하자 경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때린다고 가만히 맞고 있으면 호구 되는 거겠지.”
안 그래도 정보현의 캐릭터가 애매하다고 생각하던 차였기에 어떻게 수정할까 고민하던 경우는 드디어 방향을 결정했다. 반전을 가진 악역에서 희대의 악역으로.
자고로 배우란 연기를 너무 잘해 식당에서 아주머니들한테 등짝 한 대씩 얻어맞고 그러는 거 아니겠는가.
경우는 문득 지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일을 시작할 땐 기선 제압이 필요하다는 말.
경우는 서늘하게 미소지었다.
* * *
세 시간에 걸친 2부까지의 대본 리딩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마른 목을 축이기도 하고 각자의 볼일을 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람들 사이로 단연 화제에 떠오른 것은 우재환이었다.
무명에 신인이나 다름없는 그가 주연을 맡는다고 했을 때 다들 우려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첫 리딩을 통해 재환은 그런 불안감을 일시에 불식시켰다.
“이야, 연기 좋았어. 신인이라도 하지 않았나? 신인답지 않아서 깜짝 놀랐어.”
“그러게요. 발성도 좋고 발음도 귀에 쏙쏙 들어오고. 왜 혀 씹혀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게 말하는 배우들도 많잖아요.”
“그렇지. 리딩이 이 정돈데 현장에서 어떨까 기대돼. 아주 좋아.”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잘해 보자고.”
서로를 격려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던 그들을 보며 미소 짓던 경우는 한쪽에서 못마땅한 얼굴을 한 도은철을 놓치지 않았다. 금방 표정을 바꾸며 다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구는 그의 모습에 재환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지만 동요하진 않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이야기를 나누던 은철이 돌연 경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놀란 경우가 재빨리 움직이지 않았다면 딱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나쁜 짓 하다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쫄렸다. 경우가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 그의 앞으로 도은철이 다가왔다.
천천히 고개를 든 경우에게 도은철은 만면의 웃음을 띤 채 서 있었다.
“괜찮으시면 잠깐 작가님과 캐릭터에 대해 말씀 좀 나누고 싶은데요.”
“네, 그러세요.”
호랑이 굴 속으로 토끼가 제 발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