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3화 (23/250)

#23. 옷깃만 스쳐도 인연 (3)

은석은 USB를 노필규에게 건네며 말했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신비약국에서 미치과까지 CCTV 영상을 담은 겁니다.”

“고마워, 이 순경. 내가 다음에 한잔 살게.”

“아휴, 아닙니다.”

미소 짓는 이은석의 모습에 경우는 당황했다.

전생의 자신이었지만 다른 얼굴, 다른 삶을 사는 이은석이 그의 앞에 있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강철이 그에 대해 조사한 서류에는 분명 그의 근무지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 넘겨 버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너무 당황해 망설이고 있던 그때, 은석이 먼저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다.

“어? 맞죠? 그때 그, 저 찾아오셨던.”

그의 말에 형사과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저, 일단 나가서 말씀하시죠.”

무작정 은석을 데리고 형사과를 빠져나왔다.

휴게실로 그를 데리고 간 경우는 캔 커피를 하나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근무지가 이곳인 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때 제가 말씀 안 드렸군요. 순경으로 임용된 첫 발령지가 여깁니다.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 네.”

“그런데 찾으시는 분은 찾으셨어요?”

“예?”

“그때 저랑 비슷한 이름의 사람을 찾고 있었잖아요. 누구였지? 은섭인가? 윤석인가?”

“아, 만났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근데, 여긴 어쩐 일로…… 혹시 정말 안 좋은 일 생겨서 오신 거면-.”

“아닙니다. 그냥 볼일이 좀 있어서. 나쁜 일은 절대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구요.”

업무 시간이었기에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결국 전화번호까지 교환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이것도 인연인데 다시 만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형사과로 돌아오자 긴장감이 도는 게 무언가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형님, 찾았수다.”

“그래? 어떤 새낀지 얼굴 좀 보자.”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의 뒤쪽을 슬쩍 살펴본 경우는 화면 가득 검은 모자에 마스크까지 쓴 한 남자가 차에 오르는 모습을 확인했다.

“저 차 어디로 가는지 이번엔 놓치지 마라. 손주 새끼 과자라도 사 주려고 하루 종일 파지 주워서 모은 할머니 전 재산 들고 나른 새끼다. 놓치면 나한테 죽어.”

“아, 형님. 우리가 가오가 있지. 안 놓칩니다. 머리카락 한 올만 남았어도 반드시 잡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슈.”

이야기를 들어 보니 보이스피싱의 일당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우는 마치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래서 더 생생한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범죄자를 잡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경찰들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흥미진진했다. 경우는 그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었다.

그들이 평소 쓰는 말투, 분위기, 범인을 잡기 위한 과정까지. 상상만으로 글을 쓰는 것과 이렇게 직접 본 장면을 글로 옮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확실히 생동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었다. 단서를 잡았다고 범인을 잡는 것까지 단숨에 이뤄지지 않았다.

꼬리를 드러낸 범인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더 걸렸다.

드디어 일당을 잡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까지 지켜보던 경우는 앞으로의 일정 탓에 취재를 마치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더 그들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촉박한 일정 탓에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 탓에 이전만큼 친해지지 못한 것 같았다.

상황이 달라졌다. 좋아진 점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많았다. 그 사실에 경우는 조금 씁쓸해졌다.

어쨌든 자신만 기억한다고 해도 과거의 추억도 소중했고 그때 만큼은 아니었어도 도움을 주려 한 이들에게 경우는 무언가 대접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이, 이, 이건 그 유명하다는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의 메인 쉐프가 매일 20개만 한정 생산한다는 그 도시락!”

형사과의 막내 조 순경이 호들갑을 떨었다.

“뭐야, 그런 게 있었어? 너는 그걸 어떻게 아냐?”

“여자 친구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구요. 그래서 좀 찾아봤었는데 비싼 것도 비싼 거지만 한정 수량이라 돈이 있어도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는 거라고요.”

“도시락이? 근데 너한테 여자 친구가 아직 있다는 사실이 난 어째 더 놀랍냐.”

“아, 박 경장님!”

“귀 안 막혔어. 밥이나 먹어.”

“어쨌든 이 귀한 도시락을 드디어 맛보다니. 근데 생각보다 양이 많네요. 원래 이런 도시락은 먹고 나면 조금 아쉬운 법이잖아요.”

“그럴 줄 알고 제가 쉐프님께 특별히 요청했습니다. 넉넉하게 준비해 달라고요. 직접 호텔로 모시고 싶었지만 바쁘신 분들 시간 뺏을 수 없어서…… 이 정도밖에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 정도도 충분합니다.”

“그냥 작가님이 아니신데? 이분, 뭐 하시는 분이지? 윽, 어디 선가 광채가……. 너무 눈부셔. 저기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네?”

“오버하지 마, 이 새끼야.”

박 경장이 조 순경에게 핀잔을 주고는 경우를 돌아봤다.

“어쨌든 고맙습니다. 우리가 한 게 뭐 있다고.”

“도움 많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는 형사과 팀원들의 모습을 뿌듯하게 보고 있던 경우는 얼마 안 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필규를 보며 의아해했다.

사실 이전 생의 노필규는 조금은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처음 취재를 갔을 때만 해도 바쁘니까 안 된다며 싫은 소리를 하던 그였지만 나중엔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도와주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싫은 소리를 하지도 않았고 흔한 안부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경우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눈칫밥 먹은 세월이 얼만데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경우는 무디지 않았다. 해서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 * *

담배를 입에 문 그가 라이터를 찾기 위해 더듬거리자 경우가 그의 앞으로 라이터를 대령했다. 경우를 보던 노필규는 이내 담배를 집어넣어 버렸다. 그 모습에 경우는 당황하고 말았다.

“안 피우세요?”

“네. 괜찮습니다.”

“제가 많이 불편하셨던 모양입니다.”

“…….”

아니라는 대답이 없어 경우는 더 당황하고 말았다. 어쨌든 그가 불청객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전생의 인연이 여기서 이렇게 끝나고 만다는 생각에 경우는 조금 아쉬웠다.

혹시라도 다음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미련도 있었다.

“저라도 일하는데 와서 누가 방해한다면 싫을-.”

“그런 게 아닙니다.”

갑자기 말을 막은 노필규의 모습에 경우는 의아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민 작가는 모르겠지만 난 민 작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네?”

“이수현 기억합니까? 내 친구 조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필규의 입에서 이수현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경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수현이는 내 조카나 마찬가집니다. 축구 선수가 꿈이 녀석이었어요. 그런 녀석이 하루아침에 날개가 꺾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좀 알아봤습니다.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 잘 알고 있고요.”

“…….”

“보니까 작가님은 이미 수현이에 대해서 잊으신 것 같군요. 이렇게 놀라는 것 보면.”

솔직히 말해 잊고 있었다.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시절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한순간의 일로 그 아이는 꿈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민 작가님이 이곳에 있다는 게 저로선 불편하네요.”

“…….”

“며칠 겪으면서 작가님이 예전에 내가 알아본 그 사람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그래서 예전 일로 내가 이러는 거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 고민도 됐지만 시간이 지났다고 과거의 일이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결국 노필규가 먼저 자리를 떴다.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 경우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옥상 문 앞에 선 노필규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서서 입을 열었다.

“수현이는 잘 지냅니다. 이건 작가님 편하라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노필규가 계단 아래로 내려가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경우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필이면 어떻게 이렇게 연결이 되냐?”

그가 한 일은 아니었다. 원래의 민경우가 한 일이었지. 하지만 민경우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렇게 넘길 수 있는 문제일까?

그제야 자신을 향한 노필규의 차가운 시선이 이해가 되었다.

차마 형사과로 돌아가 마지막 인사를 할 자신이 없어진 경우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 노필규가 알아서 이야기할 거란 생각도 있었다. 밤새 옛 기억의 고통 속에서 그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 * *

“오우야, 잠은 잔 거야? 다크서클 완전 장난 아니야. 진짜 인간 판다 같아.”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오늘 대본 연습이라며.”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어떻게 보면 공식적인 첫 출근인데 도련님 출근하시는 길에 비서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너 출근시켜 줄라고.”

“됐어, 무슨. 오버하지 말고 너나 출근해.”

“나도 그러고 싶은데, 박 실장님이 그렇게 하시라는데 그럼 어떡하냐. 됐으니까 얼른 준비나 해. 어쨌든 공식적인 행사는 맞잖아.”

대본 연습.

캐스팅을 마치고 배우들이 처음 모여 입을 맞춰 보는 자리다. 첫 인사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미 시놉시스와 대본을 받은 배우들은 나름 분석을 해 온 자신의 역할을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후에 제작 발표회도 있었지만 대본 작업에 바쁜 작가들이 거의 유일하게 참석하는 공식적인 자리였다.

“내가 무슨 배우도 아니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컨디션이 영 별로라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파에 앉은 강철은 테이블 위에 쌓인 원고를 집어 들며 눈살을 찌푸렸다.

“최최최최종? 이게 뭐냐? 도대체 이놈의 최종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건데?”

강철의 손에 들린 건 경찰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수정한 5~6부의 대본이었다.

“원래 원고가 다 그런 거다. 끝난 것 같다가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수정이 들어가야 하는 거야.”

“그래도 이런 걸 보니 네가 정말 작가가 되기는 된 모양이다.”

대본을 들춰보는 강철은 감회가 새로웠다. 제 앞가림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녀석이 어느 순간 꿈을 갖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표지에 쓰인 작가 민경우라는 이름 석 자를 보며 어쩌면 경우가 바랐던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런 강철을 바라보던 경우는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설이던 끝에 입을 열었다.

“강철아…….”

“응? 왜?”

“아니다.”

“왜 말을 하려다 말아.”

“아니, 누나 잘 있냐고.”

“잘 계시지. 걱정 마.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뜨려 놔도 아무렇지도 않을 양반이야, 그 양반이.”

“하긴.”

수현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잘 있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내뱉진 못했다. 서늘했던 노필규를 떠올리니 자신에겐 그럴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 * *

속속들이 도착하는 배우들로 어느새 대회의실이 가득 채워졌다. 메이킹에 쓰일 카메라가 현장을 돌고 시작했다. 다들 자리에 앉자 배우들부터 인사가 시작되었다.

“한수혁 역을 맡은 우재환입니다.”

“차이현 역을 맡은 김예진입니다.”

“박규영 역을 맡은 구대수입니다.”

배우들의 인사 후 이 <셀룰러 메모리> 팀을 이끌 은기까지 인사를 마치고 나자 마지막으로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 민경우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가 끝나고 드디어 대본 리딩 연습이 시작되자 경우는 수많은 배우들 중 한 사람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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