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2화 (22/250)
  • #22. 옷깃만 스쳐도 인연 (2)

    경우의 매운 손맛을 본 녀석들이 서둘러 달아나자 경우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봤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 삶에서 그는 주먹이라고는 가위바위보 할 때 빼고는 써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힘 쎈 여러 놈들이 약한 학생들을 괴롭히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부터 나갔다. 민경우의 기억이 옮겨 온 것처럼 그의 반사 신경 역시 넘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자신의 위력을 깨달은 경우는 함부로 주먹을 쓰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강철은 시계를 보았다. 딱 5분이 지나 있었다.

    고교 시절의 일 이후 경우는 주먹질을 끊었지만 그렇다고 그 실력이 없어지진 않았다.

    “하여간 시간은 잘 지켜. 그래도 성질 많이 죽었네.”

    “애들 상대로 성질대로 하면 큰일나지. 그나저나 너 알지?”

    “그럼. 내가 어떤 앤지 잘 알면서 그런다. 입도 뻥긋 안 해. 근데 여기 나만 있는 거 아니잖아?”

    두 사람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하자 둘 중 한 놈이 경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제가 이 친구를 꼬드겨 가지고 벌어진 일이에요. 제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게임만 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뭘 어쩌라고?”

    “살려 주세요.”

    두 손까지 싹싹 비는 달윤의 모습에 경우는 어이가 없었다.

    “야, 그건 좀 아니지 않냐?”

    버럭 쏟아 낸 말에 달윤이 흠칫 놀랐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나한테 이래? 방금 내가 너희 둘을 도와준 거 아닌가?”

    “그, 그치만 저희한테 볼일이 있다고······ 그, 그러셨잖아요. 저놈들 처리하고 난 뒤에 이제 저희 차례가······ 흐흑.”

    “설마 우냐? 야, 그런 거 아니니까 눈물 닦아. 난 그저 볼일이 있기는 한데,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럼 무슨 일인데요?”

    “어, 그러니까 난 네 친구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서 왔거든. 일종의 비즈니스라고 하면 될까?”

    “비, 비즈니스? 설마 피자빵?”

    의아하게 생각하는 두 녀석에게 경우는 씩 미소를 지었다.

    * * *

    한입 가득 햄버거를 베어 문 달윤은 자신의 앞에 팔짱을 끼고 앉은 강철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저씨, 근데 뭐 하는 사람이에요? 혹시 조직폭력배 그런 사람이에요?”

    “야, 내 어딜 봐서 조폭이냐, 조폭이?”

    “아까 보니까 싸움 엄청 잘하던데요.”

    “나 안 싸웠거든.”

    “그러니까요. 원래 주먹 쓰는 일엔 똘마니가 나서는 거잖아요. 저 형님이 아저씨 부하인 거죠? 그럼 아저씨는 싸움 더 잘하겠네요. 혹시 대장?”

    “크흠, 뭐 친구끼리 부하는 무슨······. 근데 너, 나는 왜 아저씨고 쟤는 형님이냐?”

    “두목님한테 형님 할 수는 없잖아요.”

    “두, 두목님······.”

    달윤의 말에 강철이 뒷목을 잡고 있는 사이 좀 떨어진 곳에 경우와 석주가 마주 보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 짓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석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할 얘기가 뭐예요?”

    “이름, 민경우. 나이는 스물여덟. 새명 그룹에서 내놓은 망나니 자식. 새명에서 일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말해 주는 거야. 나는 너를 아는데 너는 나를 모르면 불공평하잖아. 안 그래?”

    “그래서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데요?”

    “너를 내가 개인적으로 고용할까 해서.”

    “예에? 아저씨 미쳤어요? 나 고등학생이에요.”

    “알아. 지금도 너 교복 입고 있잖아. 경운고등학교 1학년 5반 임석주 전교 석차는 125등.”

    “뭘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어요? 아니, 그보다 남의 개인 정보를 왜 알고 있는데요? 그거 불법 아니에요?”

    “함께 일할 사람에 대해 그 정도는 알아보는 건 당연하지 않아? 뭐, 순서가 뒤죽박죽인 건 인정. 하지만 어쨌든 취업하려면 이 정도의 개인 정보는 제공해야 해. 그렇게 생각하면 서로 편할 것 같은데. 참고로 말하자면 난 네 전교 등수가 너의 필요에 따라 짜 맞춘 거라는 것도 알아.”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경우 탓에 석주는 속으로 많이 놀랐다. 어쩌면 자신을 낳아 준 아빠, 엄마보다 이 남자가 더 많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기다 어린 자신을 찾아와 비즈니스 운운하는 이 인간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근데 같이 일을 하자니, 무슨 일을 하자는 건데요?”

    “그렇게 말하니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구나. 좋았어. 그럼 나도 솔직히 말하지. 난 너를 내 자산관리사로 채용하고 싶어.”

    “예? 자, 자산 관리······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네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글은 전부 다 읽어 봤어. 시류를 예측하는 게 꽤나 날카롭더라고. 웬만한 경제 전문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

    “그렇게 봐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그건 네 마음이고. 어차피 너도 알게 될 테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할게. 난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야. 그동안 내가 사고를 좀 많이 쳤거든. 아마 회사에서도 나를 그렇게 반기지 않을 거야. 물론 나도 그럴 생각이 없고.”

    “그래서요?”

    “길지 않은 인생, 나는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거야, 풍족하게. 그런 내 꿈을 위해 네가 도와줬으면 해.”

    “날 뭘 믿고요?”

    “말했잖아. 너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좀 망하면 어떠냐?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는데 나 재벌집 아들이야.”

    “!”

    “아무리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빌어먹게 놔두겠냐? 투자한 거 좀 날린다고 재벌이 망하진 않아.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선 너도 겁먹지 마.”

    “그럼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이미 전문가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많지. 하지만 난 철저히 능력 위주거든. 능력이 있으면 고용하는 게 내 철칙이야. 나이, 학벌, 상관 안 해. 난 네가 최고라고 생각해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야.”

    “······.”

    “걱정하지 말고 네 능력을 믿어 봐. 그리고 궁금하지 않아? 네가 상상만 하던 걸 직접 해 보면서 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 없냐고?”

    있다.

    지금이야 학생이라는 신분,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늘 그의 계획은 상상만으로 그쳤다. 그래서 인터넷에 자신의 생각을 마구마구 쏟아 냈다.

    하지만 정말 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나타나자 석주는 혼란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동하는 게 사실이었다.

    “내놓은 자식이라도 재벌인데 재벌의 돈을 굴릴 수 있는 기회, 아무나 얻을 수 없어. 그리고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네가 여기서 거절한다면 나는 그 즉시 다른 사람을 찾을 거고.”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석주에게 경우는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새명유통 기획실 김강철 대리란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대리로 승진했다고 새 명함을 돌리더니 그걸 이렇게 쓸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건 저 녀석 명함. 내 명함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내가 프리랜서라 명함이 없어. 저 친구가 내 비서니까 고민해 보고 연락 줬으면 좋겠다.”

    일어서려던 경우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왜 하필 아이디가 저팔계바주카포냐?”

    “그냥······ 좀 나이 들어 보이고 싶어서 옛날 거 찾아보다가 저팔계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멋있잖아요. 그 정도 무기는 들고 다녀야죠.”

    “그게 멋있어?”

    “네.”

    확실히 천재는 이해하기 힘든 부류임을 경우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렇게 경우가 나가자 강철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완전히 나간 것을 본 달윤이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저 형님이 뭐래? 무슨 얘기 한 거야?”

    달윤의 입가에 묻은 햄버거 소스를 본 석주는 감자튀김을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넌 먹기나 해.”

    입을 오물거리며 의아해하는 달윤을 놔둔 채 석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석주는 새명유통 홈페이지를 뒤져 기획실에 김강철 대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혹시나 거짓말을 했을까 봐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명함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까지 똑같았다.

    석주는 내친김에 민경우에 대한 것도 찾아보기 시작했다.

    새명 그룹 막내아들로 사고뭉치 트러블 메이커라는 소문이 가득했다. 음주운전을 한 전적에 그를 실제로 겪었다는 사람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망나니라는 것.

    하지만 석주가 만나본 민경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 개망나니와는 좀 달랐다. 시종일관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자신을 어리다고 어린애 취급한 게 아니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 주었다.

    그런 제안을 준 것도 사실 놀라운 일.

    사진 속의 그와 실제로 만난 민경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석주는 그에게 어떤 심적인 변화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그 아저씨 말은 사실이었네.”

    도대체 이런 사람이 나한테 왜 찾아온 걸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본 그에 대한 호기심에 석주는 흥분된 마음을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 * *

    역산경찰서 앞에 선 경우는 긴장한 탓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전 생에서 드라마 기획을 하며 하루가 멀다하고 출근 도장을 찍던 곳이었다.

    자료 조사를 한답시고 무작정 쳐들어갔었다. 당연히 업무 과다로 찌들어 있던 이들에게 내 쫓기기도 여러 번. 이후 피로 회복제며 간식거리를 사 들고 간 덕분에 구석 자리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일이 방해되지 않도록 어깨 너머로 훔쳐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버티고 버텼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형님 동생이 되어 있었고 자신의 가정사까지 이야기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이 참 즐거웠다. 그런 의미 있는 장소에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왔으니 기분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말한 대로 역산경찰서에 연락해 뒀으니까 형사과 찾아가 보면 될 거야.’

    <셀룰러 메모리>는 크게 보면 수사물이었으니 디테일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현장 자료 조사가 필수였다

    마침 국장인 동권이 역산경찰서 서장과 잘 아는 사이라 업무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촬영 협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해서 청모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서라면 모를까 역산경찰서라면 자료 조사가 아니어도 가 보고 싶은 곳이었으니까.

    추억 가득한 형사과라는 말에 경우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는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라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으니 경우는 양손 무겁게 들고 역산경찰서 형사과를 찾았다. 그곳엔 역시 반가운 얼굴 노필규 경사가 있었다.

    “민경우 작가님이시죠. 말씀 들었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저희가 인력이 모자라서 많이 바쁩니다. 뭐 알아서 보세요. 저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뭘 어떻게 도와드려야겠는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그럼.”

    무뚝뚝한 노필규는 이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을 향한 노필규의 딱딱한 눈빛이 영 마음에 걸렸다.

    하긴 가뜩이나 바쁜데 위에서 내려온 지시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니 저런 반응은 당연한 거였고.

    그나마 자신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가 그들과 함께 겪었던 일들이 단지 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억이란 사실에 조금 씁쓸해졌지만 어쨌든 다시 친해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때였다.

    “노 경사님!”

    필규를 부르는 소리에 무심히 돌아본 경우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해맑게 웃으면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이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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