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화 (21/250)
  • #21. 옷깃만 스쳐도 인연 (1)

    “자, 지난번에 본 모의고사 성적표 나왔다. 이름 부르면 가져가서 꼭 부모님 보여 드려라. 문자는 다 돌릴 테니 빼돌릴 생각 말고.”

    “아악, 안 돼!”

    “선생님, 너무해요!”

    아이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성적표가 하나둘 나눠지고 마지막으로 석주까지 성적표를 받자 담임이 밖으로 나갔다. 언제 온 건지 달윤이 석주 몰래 그의 손에 들린 성적표를 빼앗았다.

    “남의 성적표 봐서 뭐 하려고.”

    “뭐 하긴. 이 형님이 성적 관리 좀 해 주려고 그러지.”

    “관리 같은 소리 한다.”

    “에이 씨, 나보다 잘 나왔어. 너 바른 대로 말해. 집에 가면 나 몰래 공부하냐?”

    “귀찮게 그걸 왜 하냐? 어차피 공부 안 해도 다 아는 거.”

    “나보다 잘 나왔다 이거지? 근데 다 아는 거라면서 성적은 왜 이 모양인데? 전교 1등을 해야지.”

    “그런 거 하면 귀찮아지잖아. 영재니 뭐니 생각만 해도 골 때려. 우리 부모님 말씀에 세상사엔 뭐든지 적당히가 좋다고 했다. 그 기준에 맞게 성적도 맞추는 거고. 알겠냐, 이 중생아.”

    “새끼, 하여간 허세는. 기다려, 내가 다음번엔 널 꼭 짓밟아 줄 테니까.”

    “밟던지 씹던지 알아서 하시고, 성적표나 이리 내놔.”

    빼앗긴 성적표를 되찾기 위해 석주가 달윤의 팔목을 잡는 순간이었다.

    “윽!”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일그러진 달윤의 얼굴에 석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뭐야?”

    “뭐긴. 이 새끼, 나 모르게 운동하냐? 무슨 팔 힘이.”

    하지만 되지도 않는 변명이라 생각한 석주가 달윤의 소매를 걷어 올리자 시퍼런 멍 자국이 단번에 드러났다.

    “이거 왜 이래?”

    “아, 됐어. 그냥 오다가다 부딪친 거야.”

    “부딪쳐서 이렇게 됐다고?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부딪쳐서 이렇게 되게? 누구야?”

    “아, 뭐가?”

    “너 이렇게 만든 놈 누구냐고? 얼른 대답해.”

    “아이씨,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안 되냐?”

    “야, 심달윤. 너 내가 누구한테 맞고 다녀도 관심 끌 거냐? 모른 척 내버려 둘 거야? 그럼 나도 관심 끄고.”

    진지한 석주의 태도에 달윤은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새끼 꼴에 친구라고.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좀 아는 형들인데…….”

    달윤이 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모의고사가 끝난 후 오랜만에 아는 형들과 대결 형식의 게임을 했는데 달윤이 모조리 이겨 버렸다는 것.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아이템이 걸려 있었고 평소라면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할 아이템을 달윤이 싹 쓸어 간 것이다.

    “그냥, 홧김에 장난 좀 치다 보니까 과격해진 거지, 그 형들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아니긴. 게임 좀 하다가 졌다고 화풀이한 거잖아, 이거.”

    “뭐 별거 아니라니까. 그 형들도 순간적으로 욱해서…….”

    “도대체 얼마나 멍청한 놈들이길래 너한테 져? 도저히 이해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네.”

    “네가 제일 나빠, 이 새끼야!”

    * * *

    학교가 끝난 후 달윤은 복수를 해 주겠다며 석주의 손에 어디론가 끌려갔다. 도착한 곳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PC방.

    “야, 뭘 어쩌려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가상하고 현실도 구분 못하는 것들은 제대로 발라 줘야지.”

    “근데 너 게임 잘 안 하잖아. 할 줄은 아냐?”

    “이제부터 네가 알려 주면 되지.”

    너무도 태연한 석주의 태도에 달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실 석주는 게임을 몰랐다. 다른 친구들이 모여서 게임을 할 때에도 석주는 항상 외국의 경제 뉴스를 보거나 주식 시세표, 국내 경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다들 게임도 못하는 놈이 알아보지도 못하는 해외 뉴스 본다고 곧 죽어도 폼 잡는다며 놀려 댔지만 석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게임은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결말이 뻔해 재미없다나 뭐라나.

    그런 녀석이 게임으로 복수를 해 주겠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석주의 요구에 달윤은 아이디를 만드는 것부터 단축키에 게임하는 방법까지 하나하나 알려 주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제 배우는 녀석이 복수가 가당키나 할까?

    “야, 이래 놓고 발라 버리기는 뭘 발라 버린다는 거야. 그 전에 내가 속 터져 죽겠다.”

    “너 나 몰라. 한다면 하는 놈인 거.”

    “몰라, 모르겠고 가뜩이나 피곤한데 그냥 집에 가자.”

    “가려면 너 혼자 가. 참 그 새끼들 자주 쓰는 방 제목이 뭐라고 했지?”

    한숨을 푹 내쉰 달윤은 형들이 자주 쓰는 방 제목을 가르쳐 주었다.

    게임에서 이기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성적도 자신보다 잘 나와서 얄미운데 허세로 가득 찬 이놈의 정신 교육을 해 줘야겠다고 달윤은 생각했다. 어차피 질 게 뻔한 싸움, 그가 지면 자기가 나서서 망신을 주며 비웃어 주겠다는 음침한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던 그즈음 상황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형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단축키를 익히기 위해 연습이라며 하고 있는데 하는 족족 상대를 다 이겨 버린 거였다.

    “너, 너 이거 어떻게 했냐?”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네가 알려 줬잖아.”

    “너 전에 해 봤지? 그치?”

    “아이디 지금 너랑 만들었거든. 나 이런 거 안 하는 거 알면서.”

    “아냐. 너 단축키 쓰는 거 완전 자연스러웠는데.”

    “그거야 한 번 보면 외우는 거고.”

    “한 번 보면 외워?”

    “그 새끼들이 어디에 있나. 찾았다. 다 죽었어.”

    “어? 어.”

    형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입장을 한 후 달윤은 석주의 게임을 지켜보는 내내 입이 떡 벌어졌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인다는 상투적인 표현에 걸맞게 석주는 모든 스킬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달윤이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필살기까지.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처음 해 봤다면서 어떻게 나보다 더 잘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던 달윤은 돌이켜 보니 석주가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걸 깨달았다.

    스치듯 지나갔던 사람의 얼굴이라든가,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까지도.

    그러면서도 그런 점들을 굳이 나서서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 거 하면 귀찮아지잖아. 영재니 뭐니 생각만 해도 골 때려. 우리 부모님 말씀에 세상사엔 뭐든지 적당히가 좋다고 했다. 그 기준에 맞게 성적도 맞추는 거고. 알겠냐, 이 중생아.’

    ‘설마 이 새끼, 그게 진짜였던 거야? 정답을 다 아는데도 적당히 골라서……. 에이, 그럴 리가 없어. 게임이야 단축키 외우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래, 그냥 우연일 거야. 우연.’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던 달윤은 점점 석주가 플레이하는 게임 속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배우 캐스팅까지 마치고 그 외 일까지 밤샘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온 경우는 소파에 쓰러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누운 채 미동도 없이 몇 시간이 지났을 무렵, 문이 열리고 강철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 인기척에 경우도 잠에서 깨어났다.

    “왔냐?”

    “야, 너 혹시 옛날 버릇 못 고쳤냐?”

    “그게 무슨 소리야?”

    “고삐리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혹시 게임하다가 걔한테 졌냐? 그래서 찾아내서 복수할라고 그러는 거야?”

    “무슨 소리야? 아, 걔 찾았구나. 저팔계바주카포.”

    “맞네. 맞아.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마 털렸는데? 혹시 네 아이템 다 가져갔냐? 너는 있는 집 자식이 돈도 많으면서 웬만하면 아이템은 그냥 좀 사지. 꼭 그렇게 얘한테 그래야겠어?”

    “뭔 소리야?”

    “찾아오라며, 저팔계바주카포! 게임판에 이름 날리는 고삐리더만.”

    * * *

    “야, 진짜 끝내주지 않냐?”

    “완전 멋있었다, 임석주. 다음에 설욕전 또 부탁하마.”

    “만족했으면 고객님, 내일은 피자빵으로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콜. 거기에 콜라도 추가해 주마.”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모시겠습니다.”

    “하하하.”

    달윤이 친구와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사이 약간의 환멸이 느껴지는 석주의 시선에 달윤이 민망한 듯 웃었다.

    “도대체 나보고 이 짓을 얼마나 더 하라는 건데?”

    “왜? 재밌지 않아? 쟤들은 복수하고 너는 덕분에 간식을 골라 먹고. 이런 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지.”

    “누이가 없으니 매부도 없고 꿩은 먹어 본 적 없는데 알은 하늘에서 떨어지냐!”

    “짜식, 까칠하게 굴기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좀 도와줘라. 안됐잖아. 지들 스스로 했으면 될 것을 오죽하면 부탁까지 하겠냐?”

    “도대체 누굴 위해서? 네 간식을 위해서?”

    “그래 주면야, 나야 정말 고맙지.”

    그러니까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그날, 석주가 게임 때문에 달윤이를 때린 형들에게 복수전을 펼치고 있던 그때, PC방에는 그 둘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 몇몇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평소 보지 못한 현란한 플레이에 놀란 이들은 그 목적이 달윤을 위한 복수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치 영웅의 무용담을 옮기듯 학교 내에 소문을 퍼뜨렸다. 그것도 약간의 MSG가 섞인 상태에서.

    그러니 한순간 석주는 영웅 비스무리하게 되어 있었고 자신들의 복수도 해 달라는 아이들의 청원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물론 달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간식을 대가로 요구하면서 신종 거래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으니, 소수였다면 모를까 아이들 사이에서 퍼진 소문은 학교를 넘어 결국은 석주에게 당한 이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는 거였다.

    내일 먹을 피자빵을 생각하며 PC방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쯤 한 무리의 불량 청소년들이 석주와 달윤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냐, 임석주가?”

    “니들은 누군데?”

    “니들? 허, 우리 보고 니들이란다. 낄낄낄.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려나? 저팔계바주카포한테 볼일이 있어서 왔어. 당한 게 좀 있어서 말이지.”

    안색이 창백해진 달윤이 슬쩍 석주의 옆구리를 치며 속삭였다.

    “야, 하나, 둘, 셋하면 튀는 거다. 하나-.”

    하지만 달윤이 숫자를 다 세기도 전에 석주가 재빨리 달아나가 시작했다. 덕분에 당황한 달윤이 재빨리 그를 뒤따랐다.

    “저 의리 없는 자식! 같이 가!”

    “저 새끼들이. 야, 쫓아가!”

    있는 힘을 다해 뛰었지만 몸으로 하는 일에 영 소질이 없었던 석주와 달윤은 금방 그놈들한테 붙잡혔다.

    “하, 이 쥐새끼 같은 자식들.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우린 니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거든. 이거 놔.”

    “그럼 왜 도망쳤는데.”

    “그거야 니들이 무섭게 나오니까…….”

    “구라 치지 마, 이 새끼야. 우리도 헛짓거리 하기 싫어서 제대로 알아보고 왔거든. 너잖아 임석주. 다른 말로 저팔계바주카포. 겜판에서 애들 묵사발 만들고 다니는 게. 내가 너 때문에 몇 달 동안 들인 수고가 다 물거품이 됐는데 이거 어떻게 보상할래?”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가 너 못하게 말렸어? 게임도 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입만 살아 가지고.”

    “뭐?”

    슬슬 약 올리는 석주의 말에 놈의 주먹이 참지 못하고 날아갔다. 턱을 맞은 탓에 골이 울리는 것 같았다.

    석주의 입술이 터져 피가 나자 더 이상 안 되겠다 생각한 달윤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로 엉켜 싸우는 듯했지만 석주와 달윤이 일방적으로 맞는 가운데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 소리에 거침없이 내지르던 주먹질이 마침내 멈췄다.

    “이 꼰대는 뭐야?”

    “나? 지나가는 사람. 근데 학생들 좀 너무했다. 여럿이서 달랑 둘을 줘 패는 건 사나이로서 자존심 상하지 않아?”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가던 길 가요. 예?”

    같잖다는 듯 비웃는 학생들을 보며 강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깐족대는 경우도 경우였지만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알지 못한 하룻강아지들이 강철은 더 걱정이 되었던 것.

    그렇다고는 해도 잘못은 분명 그들이 했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는 조금 뒤로 물러나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도 저팔계바주카포한테 볼일이 있거든.”

    “아, 아저씨도 당하셨어? 근데 어쩌지. 우리가 먼저거든요. 차례가 있는 법인데 거기서 기다려요.”

    “기다리기 싫다면?”

    “지금 나랑 한판 붙자는 거요?”

    “어우, 승질머리하고는. 한 대 치겠다?”

    “치라고 하면 못 칠 줄 알고. 먼저 건든 건 아저씨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요.”

    어느새 다가간 경우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경우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허세 부리더니 이 꼰대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 주변 공기가 싸늘해지는 걸 느껴졌다.

    마침 눈빛을 마주한 경우가 씩 웃었다.

    “선빵은 네가 먼저 날린 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