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화 (20/250)
  • #20.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 (6)

    “정윤석은 버리죠.”

    “네? 그렇게 간단히요?”

    은기는 너무도 심플하게 정윤석을 버리자는 경우의 모습에 당황했다.

    “솔직히 감독님도 정윤석이 썩 마음에 든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당장 그만한 배우를 섭외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까?”

    “감독님. 저 믿습니까?”

    그러자 그 사이를 청모가 끼어들었다.

    “믿습니다!”

    “야, 넌 뭐야?”

    “선배, 전 이제부터 민 작가를 신봉하기로 했어요. 선배도 믿으세요. 믿는 만큼 보상은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선망 어린 청모의 눈빛에 경우마저 미간을 찌푸렸다.

    저 형은 실상은 저런 캐릭터였나?

    “어쨌든.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제 안목을 믿으시는지 묻는 겁니까?”

    그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련의 일들은 겪어 본 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드라마에 있어서만큼은 작가님 믿겠습니다.”

    “에이, 다른 것도 좀 믿어 주시지.”

    “그거야 더 겪어 봐야 알 일입니다.”

    “그러셔야죠. 흐흐,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어지는 경우의 말에 은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동권은 말없이 자신의 앞에 앉아 무게를 잡는 은기 탓에 어쩐지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마가 낀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연이어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살풀이를 하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국장님.”

    “어?”

    “저희는 국장님이 제안하신 거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쵸?”

    “그렇지.”

    “그러니까 이제 캐스팅 문제는 완전히 저희 손으로 넘어온 겁니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하고 그래?”

    “그럼 3주 벌어 주신 시간이 없어지는 거 아니죠?”

    “하하하. 천하의 김은기 PD가 그거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이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면 캐스팅이 해결된 거로구만. 그렇지? 누구야? 한수혁으로 누굴 캐스팅한 건데?”

    “제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으셨는데요?”

    “무섭게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저는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좋아. 캐스팅 문제까지 해결해 줬는데 당연히 그 정도야 들어주지. 스페셜 편집도 하고 있고 박종연 작가 작품도 이미 확보했는데 자네가 하지 마라고 해도 본전치기 하려면 계획대로 갈 수밖에 없어. 이만하면 대답이 됐지? 그러니 이제 털어놔 봐. 누군데? 한수혁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면 혹시 박건우? 아니면 김동하? 그래, 정민준. 정민준이구나? 그치?”

    “직접 보시죠.”

    그러더니 은기는 품에서 꺼낸 종이 한 장을 내려놓고 나가 버렸다. 다급하게 종이를 펼쳐본 동권의 인상이 왈칵 구겨졌다.

    “아니, 저 인간이!”

    * * *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대본을 수정하던 경우의 곁에서 청모가 서성거렸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경우가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청모가 의자를 끌어와 그의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좀 걱정이 돼서 말이야.”

    “아깐 저 믿으신다 하더니, 거짓말이었어요?”

    “거짓말은 무슨. 당연히 믿지. 그런데 아무래도 주인공 자리는 중요하니까 이왕이면 인지도 있는 사람으로다가.”

    “형님!”

    “으응?”

    “다 잘될 거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감독님 선에서 끊었을 거예요. 그런데 별말씀 없으셨잖아요. 감독님도 괜찮다고 생각하셨으니까 그런 거겠죠.”

    “그렇기야 하지만…….”

    “두고 보세요.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될 거예요.”

    “그래, 그래야지. 하여간 그놈의 정윤석, 가다가 뒤로 넘어져도 코나 깨져 버려라!”

    씩씩거리며 정윤석의 앞날에 축복을 빌어 주는 청모의 모습에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바라지 않아도 정윤석의 앞날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을 테니까.

    애초 이전 생에서 <셀룰러 메모리>가 세상에 나온 건 이로부터 몇 년 후였다. 그래서 경우는 정윤석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첸샤오거 감독의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첸샤오거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이 작품성뿐만 아니라 상업성까지도 있다는 걸 보여 주려 하지만 사실 이 프로젝트는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다.

    그가 소속된 영화 제작사는 사실 그 동생이 운영하는 회사였고, 이전부터 쌓아 온 각종 공금 횡령 문제로 소송을 당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자신은 모르쇠로 일관했던 첸샤오거 역시 횡령에 가담한 정황이 포착되면서 그 또한 그 문제에 자유로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프로젝트를 위해 투자금까지 주었던 방송사가 투자금 반환 소송까지 진행하며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정윤석은 그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다.

    단 한 번의 실패를 겪어 보지 않은 정윤석은 해외 진출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국내 드라마를 차 버렸겠지만 그로 인해 그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해 말 그가 출연했던 드라마는 드라마가 산으로 간다는 오명 속에 최악의 시청률로 막을 내린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정윤석은 연이어 터진 악재에 결국 슬럼프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다시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던 드라마가 바로 <셀룰러 메모리>였다.

    하지만 <셀룰러 메모리>에 출연하지 못한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그는 아마 두고두고 이날의 일을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 발로 들어온 복을 차 버렸으니.

    어차피 그가 돌아올 때쯤엔 <셀룰러 메모리>가 탄탄하게 흥행 가도를 달릴 테고 그 인기의 중심엔 주인공 한수혁이 있을 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 * *

    재환은 하루 종일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어쩐 일인지 벨소리 한 번을 울리지 않았다.

    오디션에 참가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뽑힌 사람만 개별 연락을 주겠다고 했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감감무소식.

    “하아. 분명 그때 내가 실수를 한 게 틀림없어.”

    재환은 오디션이 있던 날을 떠올렸다.

    “괜한 소리를 해 가지고는……. 그러게 오디션을 그렇게 많이 봤다는 소리는 도대체 왜 한 거야? 나라도 그렇게 많이 떨어진 사람 뽑아 주기 싫겠다.”

    “아니지. 오디션에서 다른 거 생각할 필요가 뭐 있어. 그래, 내 연기가 별로였던 거야. 겨우 그 정도 연기를 해 놓고 뭘 바란 거냐, 너는!”

    자신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 생각하던 재환은 중얼중얼 혼잣말로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도무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상만 쫓기에는 현실이 눈앞에 닥친 탓이었다.

    여기저기 들어갈 데는 많은데 가진 돈이 바닥을 보이는 형편에 단역마저 아예 끊겨 버렸다.

    “그나마 단역이라도 할 때는 먹고살 만했는데…….”

    이쯤 되니 괜히 꿈에 부풀어 소속사와 계약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알바라도 찾으려 사이트를 뒤지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택배라도 온 게 아닌가 싶어 문을 열어 본 재환은 황급히 문을 닫아 버렸다.

    “뭐야?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당황해하던 사이 다시 초인종이 울리고 심호흡을 한 재환이 서서히 문을 열자 경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여, 여긴 어떻게 알고…….”

    “오디션 지원서에 주소가 나와 있길래 와 봤습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면 저랑 저녁이나 드실래요?”

    “네?”

    귀신에 홀린 듯 눈만 끔뻑끔뻑하던 재환은 어느새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눈앞엔 경우가 태연히 스테이크를 썰며 품위 있게 먹고 있었다.

    혹시 이것이 꿈이 아닌가 싶어 허벅지를 꼬집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서 드세요. 맛집이라고 모셔 왔는데 식으면 맛 없습니다.”

    “아, 네.”

    도대체 왜 온 거지? 단순히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온 건가?

    혹시나 오디션이 합격됐다고 찾아온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그런 거라면 진작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하나.

    또 하나는 이렇게 비싼 음식을 사 먹이는 건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 거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인지…….

    스테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경우가 입을 열었다.

    “그날은 제가 실례를 한 게 아닌가 싶어서 사과드리려 찾아왔어요.”

    “에? 그게 무슨.”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우재환 씨가 오디션을 볼 때 많이 당황하셨겠단 생각이 나중에 들더라구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해한 건 전데요, 뭘.”

    그렇게 그날의 일로 물꼬를 트자 대화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공통의 관심사인 드라마 이야기부터 시작해 서로의 근황까지 묻는 단계로 발전했다.

    “그래서 적당한 자리는 찾으셨어요?”

    “웬걸요. 마침 작가님이 오셔서…… 집에 가서 열심히 찾아야죠. 먹고살려면 별수 있나요.”

    “그럼 많이 드셔야겠다. 체력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더니 경우는 대뜸 스테이크를 하나 더 주문했다.

    “아니, 이것도 과한데.”

    “제 실수를 만회해 보려고 나름 유명한 맛집으로 모시고 온 건데…… 솔직히 양이 좀 적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곱창집에 가서 모듬에다가 실컷 구워 먹고 밥까지 볶아 먹을걸 그랬어요.”

    “내 말이요! 아니, 그렇다고 여기가 싫다는 건 아니라…….”

    “네, 압니다. 오해 안 하니까 걱정 마세요.”

    경우는 감정이 빤히 드러나는 재환의 얼굴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연기를 할 때와 그저 본인일 때의 재환의 모습은 달랐다. 하지만 어떻게 보나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배우였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아직 아르바이트 안 구하신 것 같은데 저희 드라마에서 일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드, 드라마요? 저야 당연히 좋죠! 단역이든 스탭이든 상관없습니다. 맡겨만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됐네요. 혹시나 그사이 다른 드라마 계약하신 게 아닐까 싶어서 걱정했거든요. 아, 스탭은 아니고 남는 역할이 하나 있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는데 무엇보다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재환은 마치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그의 이성까지 날아간 건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였으니.

    “그럼 제가 맡은 배역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미리 준비를 좀 할 수 있었으면 싶은데.”

    “당연하죠. 아마 시놉시스에서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한수혁이라고…….”

    “하, 한수혁…….”

    이름을 읊조리던 재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모를 리가 없다. 시놉시스의 등장인물 소개에 맨 처음 나오는 인물. 다름 아닌 이 드라마의 주인공!

    그런 사람을 자신이 맡는다니 재환은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 잘못 들었나? 그 이름이 뭐라고…….”

    “한수혁이요, 우리 드라마 주인공. 어? 우재환 씨? 정신 차려 봐요, 재환 씨?”

    너무 놀란 나머지 재환이 앉은 자리에서 두 눈을 뜬 채 정신을 잃은 사이, 은기는 방송국 근처 곱창집에서 동권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인공까지 그러면 어쩌자는 거야? 작가도 초짜, 주인공도 초짜…….”

    “주인공이 처음인 거지 배우가 처음은 아닌데요.”

    “인지도가 없잖아. 인지도가.”

    “걱정 마세요. 어차피 민 작가 백 있잖아요. 까놓고 말해서 제작비 그렇게 지원받았으니 망해도 상관없잖아요. 듣자 하니 지난 분기 SBC 대박 난 드라마보다 우리 드라마 제작비 더 많이 벌었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냐? 하여간 귀도 밝아.”

    “그래 놓고 무슨 앓는 소리를 하십니까? 빵구 난 시간 잘 메꾸고 제작비도 건지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네요, 뭘. 또 혹시 압니까? 우리 드라마가 시청률 1위, 화제성 1위를 할지.”

    “그렇게 되면야 내가 더 바랄 게 없지…….”

    “솔직히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국장님 아닙니까? 이제 와서 이러시는 거 좀 안 어울립니다.”

    “내가 뭘?”

    “애초에 사전 제작 드라마로 채웠으면 이런저런 일 없었죠. 근데 그거 걷어차고 저한테 민 작가 대본 보여 주면서 바람 넣은 건 국장님이셨어요. 국장님이 그러지 않으셨더라면 오늘날 이런 일도 없었던 거죠.”

    “그래, 다 내 잘못이고 내 죄다. 됐냐?”

    “그렇게 나오셔야죠.”

    “야, 김은기! 너 어째 며칠 사이에 사람이 좀 뻔뻔해졌다?”

    “뻔뻔해긴요, 세상 이치에 이제야 눈을 뜬 것뿐입니다.”

    “세상 이치?”

    “네. 모험을 해야 혁신적인 발전도 있는 겁니다. 매번 먹던 밥, 먹던 반찬만 먹고 사람이 어떻게 삽니까?”

    “아주 쿵짝이 맞는 것들을 붙여 놨더니 쓸데없는 것만 배워서.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시청률 바닥 나면 그땐 얄짤없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부디 최악의 결과만 나오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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