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화 (19/250)
  • #19.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 (5)

    우재환, 우재환…….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경우는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영화 <비밀의 계단>에서 신들린 연기를 펼쳤던 배우 우재환이었다.

    오랜 무명을 거쳤던 그는 그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비운의 배우였다. 그런 그가 경우의 앞에 씩 웃으며 서 있었다.

    * * *

    오디션장을 빙 돌아보고 들어온 경우는 자신의 눈앞 심사위원석에 눈길을 빼앗겼다.

    긴 테이블과 의자, 거기에 종이로 만들어진 허름한 명패가 전부였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작가 민경우.

    매직으로 휘갈긴 자신의 명패가 지선의 사무실에 있던 비싼 그녀의 명패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작가로 참여하는 생의 첫 오디션이었으니 당연히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은기가 다가왔다.

    “시찰은 잘하셨어요?”

    “시찰이라니요. 뭐, 배우들 열정은 잘 봤습니다. 다들 열기가 장난 아니더라구요.”

    “그렇죠. 어? 오디션용 대본 벌써 챙기셨네요? 말씀하셨으면 드렸을 텐데.”

    “아, 이거…….”

    은기에 말에 경우는 자신의 손에 들린 대본을 보며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재환이 건네준 대본이었다.

    첫 오디션이라 괜히 배우들 앞에서 촌티가 나는 건 아닌가 싶어 아침부터 나름 때도 빼고 광도 냈는데 그게 효과를 발휘한 건지 배우 지망생으로 오해받은 이 상황이 괜히 웃음이 났다.

    거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우재환이 이곳에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실 경우는 재환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누구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분야가 달랐지만 그 역시 같은 길을 걸어왔다.

    매년 지상파 방송국의 공모전뿐만 아니라 케이블이나 제작사에서 하는 공모전까지 1년에 못해도 대여섯 개의 공모전이 꾸준히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공모전에 도전하고 실패를 맛봤다.

    해서 이 오디션에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얼마나 절실한 기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경우는 최대한 공정한 심사를 해야 한단 생각에 떨리기 시작했다.

    “작가님 설마 긴장하신 거예요?”

    청모가 다가와 놀리듯 말했다.

    “네. 아주 긴장되네요. 우리 드라마의 주역들을 만날 차롄데 당연히 긴장돼죠.”

    “벌써 긴장하면 어떡합니까? 밖에 보셨잖아요. 우리가 보고 선택해야 할 배우들이 저렇게나 많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우리가 잡아먹힙니다. 아셨죠?”

    “네.”

    “준비 다 되신 것 같으니까 전 후보들 들어오라고 할게요.”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맨 처음은 <셀룰러 메모리>의 여주인공 차이현 역.

    호명하자 차례대로 들어온 배우들이 연기를 시작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쓴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경우는 숨이 턱 막혔다.

    그것은 편집까지 마친 드라마를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한 역할을 위해 많은 사람이 같은 부분을 연기했다. 하지만 생김새가 각자 다르듯 그들의 연기 또한 달랐다. 그들 각자가 생각한 차이현은 경우가 생각한 차이현과도 달랐다. 잡아먹힌다는 은기의 말을 실감한 경우는 자신이 창조하고 배우가 더할 차이현에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연기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나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신인 작가의 모습에 은기 역시 흐뭇해졌다.

    * * *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장면을 연기하는 수많은 배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이런 일에 능숙한 은기조차 기진맥진해질 지경이었다.

    오디션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마침내 우재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긴장한 듯 깎듯이 90도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우재환입니다.”

    그런 그가 고개를 들고 앞에 앉은 심사위원들을 살피던 중 깜짝 놀랐다. 오디션이 있기 전 만났던 남자가 그 자리에 있는 탓이었다.

    작가 민경우.

    ‘자, 작가였어?’

    놀란 재환은 혹시나 자신이 실수한 게 있는지 떠올려 보았지만 긴장을 풀기 위해 아무 말이나 마구 했던 탓에 정확한 대화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점점 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가던 그때 산적처럼 생긴 PD가 그에게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준비됐으면 시작하죠.”

    “네.”

    긴장을 풀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쉰 재환은 마침 경우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재환은 어쩐지 사악하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디션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안청모가 대본에 나온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씬 39, 규영, 수혁을 향한 그의 눈빛이 경악으로 가득 찬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우진이랑 나 둘만 아는 얘기라고!”

    “어.떻.게.말.씀.드.려.야.할.지.모.르.겠.지.만.그.냥.오.래.된.기.억.처.럼.떠.올.랐.어.요.”

    “그게 말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박.형.사.님.이.무.슨.생.각.을.하.고.계.시.는.지.아.는.데.요.아.무.래.도.누.군.가.의.기.억.이.자.꾸.만.떠.오.르.는.것.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네가 우진이 환생한 사람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랬다면 내가…… 내가…….”

    우재환은 마치 박규영이 현신한 것 같았다. 친한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의심 때문이라며 자책하고 있었던 그는 눈앞에 나타난 상대 탓에 혼란스러운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나 경악할 청모의 국어책을 읽는 수준의 연기에도 흐트러짐 없이 집중하는 모습이 감탄할 만했다.

    저런 상태에서도 감정을 잡고 대사를 한다는 게 배우도 극한 직업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그의 대표작이 될 <비밀의 계단>이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지만 그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신인임에도 흡인력 있는 연기와 귀를 트이게 하는 발성, 거기다 정확한 딕션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저런 사람이 왜 단역만 전전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경우는 물론이고 은기의 얼굴도 어두워져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것으로 오디션을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아침부터 시작된 오디션은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오디션은 끝났지만 이제 이 중에서 알맞은 배역을 가리기 위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차이현 역에 김예진 어때요?”

    은기의 말에 팀 내 최고령자인 촬영 감독 임시찬이 호응했다.

    “그 친구 화면빨이 아주 좋더라고. 톤도 적당히 낮은 게 역할에 딱 맞는 이미지지 않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직 신인이긴 하지만 이미 주인공 경험이 있는 김예진은 확실히 신인 배우들보다 강렬한 임팩트가 있었던 탓에 만장일치로 통과가 되었다.

    “문제는 박규영인데…….”

    “딱히 이렇다 할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조연이긴 해도 중요 인물 중 하난데.”

    모두들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입을 연 것은 청모였다.

    “솔직히 연기는 그 우, 우재, 뭐였지?”

    “우재환이요?”

    “맞아, 우재환! 그 사람이 제일 괜찮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이미지가 너무 안 맞아.”

    확실히 그랬다. 박규영은 30대 후반. 하지만 우재환은 많이 봐야 20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연기만 따진다면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형사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도 모두 우재환 탓이었다. 그의 연기를 보기 전이었다면 고르기가 그렇게 어렵진 않았을 테지만 그를 보고 난 후 다른 사람들이 연기한 박규영이 성에 차지 않은 탓이었다.

    “분장으로 어떻게 커버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 정윤석은 어떡할 건데?”

    “아, 그렇구나.”

    박규영이 가장 많이 붙는 씬은 한수혁 역의 정윤석이었다. 정윤석이 20대 후반임을 감안해도 동안처럼 보였기에 한수혁 역에 무리가 없었지만 솔직히 우재환은 정윤석보다 더 어려 보였다. 때문에 주인공보다 열 살 많은 형사 역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동안이라 해도 진짜 어린 사람 앞에선 당할 재간이 없었다.

    “자,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아쉽다고 붙잡고 있어 봐야 해결이 안 납니다.”

    은기가 교통정리를 한 끝에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고 그나마 제일 무난한 구대수가 박규영 역으로 낙점되었다.

    * * *

    집으로 돌아간 경우는 소파에 털썩 누웠다. 금방 기절할 듯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러다 일어나 앉아 주머니에 넣어둔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쳤다.

    오디션 지원서에서 적어 온 우재환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연락을 해 줘야 하나?”

    솔직히 누구보다 아쉬운 건 경우였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우재환은 누구보다 스타성이 있었다.

    단지 지금까지 좋은 역을 맡지 못해 드러나지 않았을 뿐. 좋은 역할을 맡는다면 사람들이 그의 매력을 몰라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박규영이 아닌 다른 비중 있는 역할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등장인물 중 가장 어린 사람은 한수혁이었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도 중요하지만 과거 사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조연들의 연령대가 대부분 높은 탓이었다.

    그렇게 제외하고 나면 남은 건 정말 존재감 미미한 단역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런 대화를 나눈 자신이 그에게 단지 연을 맺고 싶다며 그런 제안을 할 수는 없었다.

    “아, 같이 일했으면 딱인데…….”

    몇 번이나 망설이던 경우는 결국 전화를 내려놓고 말았다.

    지금 시점에 그에게 전화를 하는 건 되지도 않는 일에 괜한 기대를 품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민폐.

    한숨을 내쉰 경우는 이런 저런 생각에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일은 의외의 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 * *

    “그게 무슨 소리야?”

    소식을 들은 은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웬만한 일에는 표정 변화가 없는 은기의 일그러진 얼굴에 청모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은기는 그대로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누구라도 들이받을 듯 씩씩대며 간 곳은 다름 아닌 국장인 동권의 방이었다.

    “국장님!”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자 누군가와 통화 중이던 동권이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구두 계약도 엄연한 계약입니다. 지금 첫 촬영 날짜까지 잡힌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고성이 오갔지만 서로의 주장이 완강해 결국 해결되지 않은 건지 거칠게 전화를 끊은 동권이 은기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밝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늙어 버린 것 같았다.

    그사이 흥분을 가라앉힌 은기가 차분히 물었다.

    “일방적으로 출연 연기라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지금 정윤석이 화보 촬영 때문에 LA에 가 있는 모양이야.”

    “그런데요?”

    “거기서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는데 공교롭게도 첸샤오거 감독을 만났다는군.”

    첸샤오거 감독은 중국계 미국인 감독이었다. 흥행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예술성으로는 인정받는 세계적인 감독이었다.

    “설마 그 감독이 정윤석한테 뭔가를 제안한 겁니까?”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듣기론 미국 방송사에서 옴니버스 형식 드라마를 하기로 했다는데 거기에 정윤석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다는군.”

    첸샤오거 감독은 평론가들이나 예술성을 따지는 매니아층에서는 인기가 좋았지만 솔직히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름만 아는 영화감독일 뿐이었다.

    감독 본인도 이런 점을 불만스럽게 여겼던 터라 어떻게든 상업성으로도 성공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를 꾀하는 감독이기도 했다.

    “정윤석 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어차피 그쪽은 단편이니까 촬영하는 데 한 달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더군.”

    “하, 한 달이요?”

    “말도 안 된다고 했지. 우리 사정 뻔히 듣고 갔으면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어.”

    “당연하죠.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한 달만 시간을 달라는데 내 참, 도장 찍는 걸 미루더니 이런 식으로 간 볼 줄이야.”

    “혹시 그 전부터 그쪽하고 이야기가 오간 거 아닙니까?”

    “그것까진 모르지.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냐. 첸샤오거라면 해외 매니아층이 있으니 연기력도 인정받고 자동 해외 진출이잖아.”

    “원래 우리하고 독점 계약 되어 있잖습니까? 이거 법적으로 따져 보면-.”

    “그게 분하지만 딱히 문제가 없어. 독점 계약은 어디까지나 타 방송사 출연을 막은 거지 해외까지 막은 건 아니니까. 거기다 이번 드라마와 계약을 하겠다고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니. 올해가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니라 그쪽 말도 틀린 건 아니야.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고.”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요.”

    “인기 좀 얻었다고 지가 톱스타라도 된 줄 착각하는 모양이지. 뭐든 괜찮다고 말이야. 소속사에서도 배우 하나를 어쩌지 못한 모양이더라고.”

    말없이 생각에 잠긴 은기가 입을 열었다.

    “우선 민 작가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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