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화 (18/250)
  • #18.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 (4)

    “너 지난번에도 무슨 은석인가 윤석인가 그 사람 알아봐 달라고 하더니. 내가 무슨 흥신소냐?”

    “네가 능력이 좋잖아. 부탁 좀 하자.”

    경우가 저자세로 나오니 강철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수긍했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에 어이를 잃고 말았다.

    “이름은 나도 잘 모르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에 경제 쪽 이야기를 올리는 사람이거든. 닉네임이 ‘저팔계바주카포’라고…….”

    “야, 일을 시키려면 못해도 이름은 알았어야지. 내가 무슨 금 나와라 뚝딱하는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강철이 일장 설교를 하고 돌아갔지만 사실 경우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나마 닉네임이라도 기억하고 있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팔계바주카포.

    그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건 미국에서의 금융 위기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예측한 글들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처음엔 극소수의 사람들만 관심을 쏟았지만 이후 관련된 인기 게시글이 재생산되면서 부정적인 예측을 쏟아내자,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시민 단체에서 그를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한다.

    하지만 그의 신분이 다름 아닌 고등학생. 미성년자임을 감안해 고소는 취하하게 된다.

    어쨌든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고등학생의 말에 휘둘렸다는 사실에 그를 향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그의 신화는 한낱 해프닝으로 끝났으니 어떻게 보면 시민 단체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는 천재를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한마디로 그는 천재 중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가 했던 예측은 고등학생의 어쩌다 얻어 걸린 결과가 아니었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정확한 판단을 바탕에 둔 신뢰도 높은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불행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났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단지 상상 속에서만 그칠 수밖에 없었다는 거였다.

    거기다 그의 부모는 그가 튀지 않는 평범한 아이로 자라길 바랐다. 해서 그는 이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산다.

    하지만 호랑이가 우리 속에서 산다고 고양이가 될 수 없듯 그의 안에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가 성인이 되고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기 시작한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한국의 워렌버핏으로 떠오르며 그가 고등학교 시절 했던 일이 다시금 화제가 된다. 물론 천재의 삶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그는 또 다른 위기를 맞는다.

    고명희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드라마화하고 싶어했다. 물론 그녀의 의도가 그렇게 순수한 거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와의 만남이 결국은 불발되었다.

    사실 그는 주식을 볼 줄도 몰랐고 경제 관련 용어는 아무리 봐도 이해되지 않았기에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했었다.

    재벌집 아들 민경우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 돈은 은행에 넣어 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자고로 모든 분야엔 전문가가 있는 법. 전문가에게 맡겨 두면 알아서 해 줄 텐데 굳이 자신이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

    거기다 그는 아직 어렸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분야에 최고인 그에게 경우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 * *

    “벌써 나가니? 이거라도 먹고 가.”

    간밤에 시놉을 보고 늦게까지 작품을 분석한 탓에 늦잠을 자 버린 재환은 서둘러 나가려다 자신을 붙잡는 어머니의 손길에 멈춰 섰다.

    몸에 좋다는 이것저것 갈아 만든 쉐이크, 배우 생활을 하려면 날씬한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고 해서 탄수화물을 대체로 안 먹는 그를 위해 어머니가 직접 인터넷을 찾아보며 만든 쉐이크였다.

    맛도 향도 색감도 별로였지만 그 정성을 생각한 재환은 쭉 들이켰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차 조심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은 재환은 지난밤 봤던 시놉시스를 떠올리며 작품의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이왕이면 대본도 줬으면 캐릭터 잡기가 한결 편했을 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그러니까 며칠 전, 재환은 혹시나 회사에 나가면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소속사 사무실에 들렀다. 마침 사무실에 다른 사람은 없고 홍보팀 이도경 대리만 남아 있었다. 소속사 임원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상대해야 했던 이도경 대리는 회사에 일어나는 일은 뭐든 알고 있는 정보통이기도 했다. 재환은 오다가 사온 바나나 우유를 내밀며 도경에게 내밀었다.

    “목 마르실 텐데 드시고 하세요.”

    “넌 꼭 바나나 우유 주더라?”

    “커피 많이 마시면 속도 쓰리고 피부에 안 좋잖아요. 그나마 우유가 낫죠.”

    “그런 거라면 사양 안 하고 잘 마실게. 참, 하도섭 실장님은 오늘도 안 나오셨다.”

    “저 아직 안 물어봤는데요?”

    “어차피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잖아. 당분간 아마 안 나오실 거야. 선영 씨 케어하느라 정신없으시겠지. 선영 씨가 좀 까다로워야지.”

    “네.”

    이미 예상한 일이었지만 이곳과 계약을 한 뒤 그의 얼굴을 지금껏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재환은 조금 씁쓸해졌다.

    그가 이곳 사계절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하게 된 건 영화판에서 단역만 전전하던 자신을 발굴해 낸 하도섭 실장 덕이었다.

    회사의 실세이자 능력 좋기로 소문난 하도섭 실장이었기에 재환은 계약 도장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기나긴 무명 생활이 끝날 거라 여겼다.

    하지만 회사의 자랑인 이선영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면서 회사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네가 이해해. 실장님도 선영 씨한테 시달리는 모양이더라. 그나마 선영 씨가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그럼요. 다행이죠.”

    하지만 말과 달리 재환의 얼굴은 어두웠다.

    “저기, 대리님. 혹시 단역이라도 뭐 할 거 없을까요?”

    어찌 되었든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단역이야 보조 출연 전담 회사로 가겠지. 우리 회사에 그런 건…….”

    말을 하던 도경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책상 위 아무렇게나 쌓아 둔 서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리님?”

    “아, 여깄다.”

    “이게 뭐예요?”

    “뭐긴, 드라마 시놉시스.”

    재환이 받아 든 서류엔 <셀룰러 메모리>라고 커다랗게 제목이 쓰여 있었다.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그에게 도경이 웃으며 말했다.

    “MBS에서 새로 제작하는 드라마야. 오디션을 한다고 우리한테도 참여하라고 시놉시스를 보낸 모양이야. 근데 참 거기도 속도 없다. 사고를 내서 멀쩡한 사람 다치게 해 놓고 떡하니 시놉시스를 보내는 건 무슨 심본지…….”

    “근데 제가 해도 돼요?”

    “실장님이나 대표님껜 정신이 없으신 거 같기도 해서 말씀 안 드렸어. 솔직히 그쪽에서 시놉시스 보냈다고 하시면 뭐라고 한 소리 하실지도 모르지.”

    “근데요?”

    “어차피 저쪽이 갑이고 우린 을이잖아. 방송국하고 싸워서 상대가 되겠니? 그래서 말씀 안 드리고 묵혀 둔 건데…… 우리 회사에 선영 씨만 있는 건 아니잖아. 다른 배우들도 먹고살아야지.”

    “저 여기 가도 괜찮을까요?”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아예 안 갈거 뭐 있어. 가 봐. 가서 오디션 합격하면 대표님이나 실장님도 오히려 좋아하실 거야. 그래도 지상파 드라만데 싫어하실 이유가 없지.”

    “감사합니다.”

    사실 시놉시스를 받아 든 그 순간부터 재환의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내가 메일로 오디션 일정이랑 자세한 사항 보내 줄게. 참, 대본은 현장에서 나눠 준다는 거 알지?”

    “네. 고맙습니다.”

    재환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미친 듯이 시놉시스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라마 속에 빠르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지원할 배역은 형사인 박규영이었다. 아직 20대 중반인 그에 비해 나이가 많은 역할이라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던 터라 재환은 A4지 2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박규영에 대한 설명을 읽고 또 읽었다.

    <셀룰러 메모리>는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이 최우진이 쓴 소설 속의 범죄 수법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펼쳐지는 가운데 최우진이 사망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다.

    박규영은 최우진의 오랜 친구로 최우진의 장기를 이식 받은 한수혁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다.

    누구보다 친구를 믿지만 공교로운 상황에 죽은 친구를 의심하는 자신을 괴로워하는, 어떻게 보면 우직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론 미련스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나름 박규영에 대한 분석을 한 재환은 그렇게 오디션이 열리는 곳을 향했다.

    * * *

    혹시나 늦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재환은 시간 맞춰 오디션장에 도착했다.

    이미 수차례 오디션을 본 경험이 있는 그였기에 오디션장에서 오다 가다 만난 몇몇 아는 얼굴도 보였다. 재환은 눈인사를 하며 자신이 분석한 박규영에 대한 캐릭터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탭 한 명이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자, 여기 오늘 오디션 볼 내용의 대본이 있으니까 와서 한 장 씩 받아 가세요. 유출은 금지니까 오디션 끝나고 가시는 길에는 꼭 반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배우들이 하나 씩 대본을 가져가 읽으며 곧바로 연습에 들어갔다.

    재환 역시 대본을 챙긴 그때, 어리숙해 보이는 한 남자가 대본도 챙기지 않고 이리 어슬렁 저리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신인 티 팍팍 나는 모습이 오디션이 처음인 것 같았다. 오지랖이 그렇게 넒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처음 오디션장을 찾았던 자신이 생각나 재환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남는 대본 하나를 챙긴 재환은 그를 향해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오디션 처음이에요?”

    “네? 아, 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익어 보였다. 아무래도 배우 지망생이면 오다 가다 만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재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데서 한눈 팔고 있으면 안 돼요. 자, 이거.”

    그러면서 가지고 온 대본을 한 장 건넸다. 대본은 받고 이리저리 살펴본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살짝 의아했지만 재환은 개의치 않았다.

    “생각보다 사람도 많고 복잡하죠?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뺏겨요.”

    “저 처음인 거 티 많이 나나요?”

    “조금? 사실 제가 오디션 경험이 많거든요. 그래서 딱 보면 처음인지 아닌지 보이더라구요.”

    “아아, 오디션 경험이 많으시구나. 얼마나 많으신데요?”

    “한, 5, 60번?”

    “5, 5, 60번이요?”

    “어릴 때부터 꿈이 배우였거든요. 고등학교 때부터 정말 안 가 본 오디션이 없었어요.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항상 단역만 주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벌써 출연한 영화만 해도 20편 가까이 돼요.”

    “우와.”

    “근데 그런 거 다 소용없어요. 큰 역할을 해야죠. 에휴, 진짜 오디션 떨어질 때마다 이런 일은 재능 말고도 운도 타고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진짜 밤새도록 연습해서 이제 됐다 싶어서 오디션장에 가잖아요, 근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정말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니까요.”

    “이 좁은 땅덩이에 잘난 사람이 참 많죠?”

    “제 말이요. 와, 이제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네요. 참, 그쪽은요? 그쪽은 연기 좀 해요?”

    “아니요, 저는 못해요.”

    “그런 사람이 오디션을 보러 와요?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꼭 단번에 뽑히더만. 재능 많은 사람들. 맞죠?”

    “아니에요.”

    농담을 하면서 웃던 재환의 얼굴이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났다.

    “차라리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했으면 미련 없이 여길 떠났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아…… 제가 처음 본 사람한테 별소리를 다 하네요.”

    현실을 자각한 재환이 멋쩍게 웃었다.

    “힘내세요. 그래도 좋은 분이신 것 같으니까 잘될 거예요.”

    “어? 나 좋은 사람 아닌데.”

    “저 같은 신입한테 이렇게 도움을 주시잖아요.”

    “그래도 신입한테는 텃새 부리면 안 되죠. 이런 일은 앞으로 엄청 많이 있을 텐데. 어려운 사람은 돕는 법입니다.”

    “좋은 사람 맞네요, 뭐. 아직 때를 못 만나서 그런 걸 거예요.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좋은 결과를 얻는 때가 있을 겁니다.”

    “고마워요. 같이 오디션 온 처지에 위로를 받았어요. 참,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이름이 어떻게 돼요?”

    “민경우라고 합니다.”

    “민경우. 좋은 이름이네요. 난 우재환입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경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