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화 (17/250)
  • #17.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 (3)

    이제와 그 일에 대해 묻는 경우가 지선은 조금 어이없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그렇게 걱정됐으면 진작 찾아와서 말렸어야지.”

    “안 했구나, 흐흐.”

    “너 많이 변했다. 항상 뚱해 있더니 웃는 거 보니까 좋네.”

    훅 들어오는 말에 당황한 경우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내가 누나한테 도움을 준 거 맞지?”

    “설마 생색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인데?”

    “역시 누나랑은 말이 통해서 좋다니까. 누나, 인수도 물 건너갔겠다, 이렇게 된 거 홍보 좀 제대로 해 볼 생각 없어?”

    “홍보라니?”

    경우는 지선에게 드라마 작가로 채용된 것과 편성이 났다는 것까지 이야기하면서 드라마 투자와 PPL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방송국에 퍼진 소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 사이가 나빠 서로 원수 보듯 해도 다른 사람이 괴롭히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게 혈육이었다. 내 동생은 나만 괴롭힐 수 있다나 뭐라나.

    민경우가 어릴 때 납치 비슷한 걸 당할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지선이 나타나 위기에서 구해 준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솔직히 바로 아래 동생 준호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경우한테 푸느라 경우를 가장 많이 괴롭힌 사람이 지선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쨌든 안 좋은 소리는 빼고 꼭 필요한 부분만 골라 말하자 다행히 나쁘지 않은 듯 지선이 긍정적으로 끄덕이고 있었다.

    “정말 그놈들이 네 글이 상품성이 있다고 했단 말이지?”

    “일단 시작해 봐야 알겠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아. 망하진 않을 테니까 동생 일에 투자도 좀 해. 인수도 물 건너간 거 PPL이랑 그런 걸로-.”

    “오케이, 거기까지. 마케팅에 대해선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러니까 굳이 더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한마디로 드라마 만드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렇지. 바로 그거야, 누나.”

    “근데 그 정도 가지고 되겠어?”

    “응?”

    미소 짓던 얼굴이 제법 진지한 눈빛을 띄더니 지선은 경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천천히 입을 여는데 그 분위기가 제법 진지했다.

    “경우야, 사람이 일을 시작할 땐 말이야, 기선 제압이라는 게 필요해.”

    “?”

    “하물며 너는 누가 뭐래도 새명의 사람이야. 괜히 무시당하면 누나가 마음 아프잖니. 나머지는 이 누나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넌 걱정 말고 네가 할 일을 하도록 하렴.”

    경우는 안 그래도 걸크러쉬로 똘똘 뭉친 누나에게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느꼈다.

    “근데 우리 동생, 확실히 사회 생활을 해 보지 않아서 소박하네.”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한 얼굴의 경우를 본 지선은 책상 한쪽에 놓아둔 경우의 대본을 내밀었다. 한번 보기나 하라고 준 건데 열심히 읽었는지 표지가 구겨지고 손때가 묻기까지 했다.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고. 내 동생이 이번엔 뭔가 제대로 하는 것 같아서 나름 누나로서 도움을 주려고 했거든.”

    “어떻게?”

    “드라마 제작사를 하나 인수하려고 했지.”

    “뭐? 제작사라니…… 아니 왜?”

    “왜긴. 네가 약속한 한 달. 아직 안 됐잖아. 그런데도 이렇게 성과를 보였으니 누나로서 뭐라도 해 줘야지. 제작사 하나 있으면 네가 드라마 만들고 싶을 때마다 만들 수 있지 않겠어?”

    이놈의 집구석, 제작사가 무슨 쇼핑템인가?

    아무렇지도 않게 인수를 운운하는 지선의 모습에 경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작사를 인수했을 경우 그 외에 따르는 부수적인 일들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일단 드라마 작가로 자리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필요없어. 아니 필요하더라도 그건 내 손으로 해.”

    “네가 정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던 경우는 테이블 한쪽에 놓인 보고서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커다랗게 쓰인 글씨는 분명 유니언 스튜디오.

    거기라면 제작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이었다.

    인수라고 하길래 조그만 곳이라고 생각했던 경우는 가늠할 수 없는 규모에 경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군말 없이 받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사나이, 한 번 뱉은 말을 번복할 수 없었기에 입만 다셨다.

    다음 날, PPL 리스트에 새명 자동차가 포함되어 있을 걸 보고 누나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이 아버지께도 말씀드렸다는 말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누나도 나 때문에 회장님 눈 밖에 났을 테니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으면 좋겠네.’

    새삼 누나의 추진력을 감탄하고 있던 그때, 청모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일전에 경우가 그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던 것이다.

    투자는 물론이고 PPL이 다른 업계의 수준을 월등히 웃돌고 있었다. 거기다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다. 해당 상품이 드라마 속에서 몇 번 노출되냐, 기능이나 특징을 언급하느냐에 따라 금액이 세분되어 있던 것과 달리 대부분이 그저 배치되는 정도만 되어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되면 소품 하나하나에 써야 할 신경이 줄어들기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도 제작진 입장에서도 일하기가 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액수에 구애받지 않고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다는 건 확실한 메리트였다.

    “저기…… 너무 과한 거 아냐?”

    “사돈이 밭을 사도 배가 아픈 법입니다. 액수가 고만고만했다면 비웃으면서 정신 승리를 했겠죠. 근데 예상치를 훨씬 뛰어 넘으면 경외심이 드는 법입니다. 그게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지랄 하는 이유기도 하고요.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좀 뺄까요?”

    “아니, 지금 생각해 보니까 딱 좋은 거 같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이 정도면 땡큐지.”

    청모는 새명의 스케일에 엄지를 척 하고 들어줬다.

    확실히 무성하던 뒷말이 싹 들어가고 그들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시기와 질투보단 부러움이 대부분이었다.

    경우는 만에 하나 지선이 들어주지 않을 때를 대비해 자비를 털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돈 굳었네, 흐흐.”

    자고로 내 돈이 아닌데도 생색낼 수 있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상황이 그렇게 되자 소문을 일으킨 당사자인 황성준과 황현석 역시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그 호구 놈한테 다리를 놔서 다음 드라마를 우리가 같이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물론 당사자인 경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은기였다.

    오디션을 앞두고 다들 의욕이 치솟는 와중에 팀을 이끌어 가야 하는 그가 어깨가 축 처진 채 다니고 있었다.

    이러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마저 침체될 것 같아 경우는 은기를 불렀다.

    “감독님, 오늘은 저랑 술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제작비도 이렇게 많이 지원해 주셨는데 제가…….”

    “돈도 써 본 놈이 쓴다고 따지지 말고 좀 가시죠.”

    웃는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라고 은기는 하는 수 없이 경우가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돈 씀씀이를 보니 강남의 고급진 와인바를 데려갈 줄 알았더니 매캐한 가스 냄새가 가게 안을 뒤덮고 있는 허름한 연탄구이집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 위로 석쇠가 놓이고 삼겹살이며 반찬들이 세팅이 되자 경우는 얼른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아니, 그건 내가…….”

    “저 고기 잘 굽습니다. 차원이 다른 맛이 무엇인지 보여 드리죠. 잠자코 계세요.”

    그러더니 착착 고기를 뒤집고 자르고.

    능숙한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잘 구워진 고기를 앞접시에 놓아 주자 은기가 소스에 찍어 입 안에 넣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먹어 본 삼겹살 중에 가장 맛이 있었다.

    “어때요? 맛있죠?”

    “귀한 도련님처럼 자라신 줄 알았는데 요리도 잘하시는 모양입니다.”

    “어휴, 제가 자취 경력만 얼만데.”

    “네? 자취……요?”

    “하하, 그게 아니라…… 음, 친구가 자취를 했는데 맨날 그 집에 가서 살았거든요. 그 친구한테 이것저것 많이 배웠어요.”

    생각 없이 말했던 경우는 진땀을 흘리며 대충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친구한테 할머니가 한 분 계셨거든요. 할머닌 드라마를 보는 게 가장 낙이었어요. 직접 밭에서 키운 채소를 시장에 내가 파셨는데 저녁이 되어 들어오시면 늘 드라마를 보셨거든요.”

    “친구 할머니와 꽤 친하게 지내신 모양입니다.”

    “네. 제 할머니나 다름없었어요. 마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오직 할머니뿐이었으니까.”

    “…….”

    “아, 옛날 이야기하니까 옛날 생각난다. 참 그 드라마 생각나세요?”

    경우는 은석이었던 시절 할머니와 함께 봤던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은기 역시 맞장구를 치며 한참 동안 자신이 재미있게 본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느새 석쇠 위에 남은 삼겹살 몇 점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빈 소주병이 늘어서 있었다.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른 은기는 표정이 많이 풀어져 있었다.

    “민 작가님이 나보다 한참 어려서 세대 차이를 느낄 줄 알았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참 많네요.”

    “그게 드라마의 힘이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게 드라마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바닥에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감독님, 그러니까 우리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보자구요. 술자리에서 이렇게 즐겁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드라마요.”

    경우가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은기 역시 모를 리 없었다. 자신보다 어린데도 마음 쓰는 게 훨씬 어른처럼 느껴졌다. 거기에 자신이 얼마나 옹졸했는지도 깨달았다.

    다른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미 이토록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은기는 마침내 활짝 웃었다.

    “그래요, 재미있게 한판 놀아 봅시다.”

    * * *

    잠에서 깨어난 경우는 숙취에 머리를 깨질 듯이 아팠고 속은 뒤집어질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에 과음을 한 탓인가?

    아, 생각해 보니 민경우가 된 이후로 술을 마신 건 처음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거실로 나와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가스레인지 위 올려진 냄비 속에 익숙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사장님표 해장국.

    “누가 왔다 갔나?”

    어쨌든 해장을 할 수 있겠다 싶은 경우는 한 그릇 데워 마시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민경우가 된 이후 돈 걱정은 없었으니 그가 좋아하는 드라마만 하면서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갑부가 되었다고 씀씀이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근검, 절약이 몸에 벤 그였다.

    지분 외에도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건물이며 그 외 몇몇 그가 소유한 재산이라면 일하지 않고도 평생 놀고 먹으며 배부르게 먹고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드라마에 미친 놈이라 드라마 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좋아하는 것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그래야 그가 원하는 드라마를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마음껏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경우는 자신의 가치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전 삶의 기억을 떠올리자 좋은 수가 생각났다.

    경우는 휴대폰을 들었다.

    “어, 김 비서. 바쁜 거 아니지? 그럼 우리 집으로 좀 와.”

    * * *

    “야, 너는 왜 사람을 오라 가라야. 그리고 김 비서가 뭐냐, 김 비서가. 뭐 시킬라고 그러지? 넌 꼭 시킬 일 있으면 김 비서라고 부르더라.”

    “까칠하기는. 그럴 거면 뭐 하러 해장국은 왜 사다 주고 가는데? 저 해장국 그때 우리 둘이 같이 갔던 데 거기 해장국이잖아.”

    “어떻게 알았냐?”

    “내 미각을 무시하지 마셔. 그리고 너 아니면 우리 집에 올 사람 없거든.”

    “왜? 누님이라든가, 누님이라든가…… 누님…….”

    “퍽이나 누나가 나 먹으라고 해장국을 사 줬겠다.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 내가 사다놨다. 술 많이 먹은 거 같길래. 여긴 밥 해 주시는 이모님도 안 계시잖아.”

    “나 술 많이 마신 건 어떻게 알았는데? 어제도 왔었어?”

    “뭐…… 그랬지.”

    강철은 지선이 그를 지켜보라고 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어쨌든 월급 주는 사람에 대한 신용을 지켜야 했으니.

    “무슨 일인데?”

    “사람 하나 찾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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