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화 (16/250)

#16.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 (2)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장 중요한 배우 캐스팅만 남겨 놓은 상황에서 국장인 동권이 꺼낸 말에 은기는 당황했다.

“한수혁 역에 정윤석이라니요.”

“정윤석이 올해 말까지 다른 방송사는 제외하고 우리 MBS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이미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야.”

“하, 하지만…….”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나도 알아. 근데 민 작가 대본을 자네한테 준 건 다름 아닌 나야. 그 말은 나도 대본을 읽어 봤단 말일세.”

“…….”

“정윤석이라면 한수혁 역으로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도 드라마를 만들 사람은 저와 작가님입니다. 조건이 맞는다고 미리 상의도 없이 통보하시는 건 좀 아니잖습니까?”

정윤석은 오디션을 통해 일일 드라마 주인공으로 낙점돼 훈훈한 외모와 지고지순한 순정남으로 자리를 잡더니 미니 시리즈 서브남으로 스타 반열에 올랐다.

요즘이야 배우들이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소속되어 소속사의 관리를 받고 있지만 아주 예전엔 방송국에서 공채 탤런트를 뽑았고 방송국 소속의 배우로 활동했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본격화되고 배우가 되는 다양한 루트가 생겨나면서 공채 탤런트는 사라졌지만, 그때의 속성이 남아 방송국에서는 신인 배우들을 대상으로 독점 계약을 하기도 했다.

향후 몇 년 동안 MBS 드라마 몇 편 출연, 이런 식으로.

싹수가 보이는 신인을 다른 방송국에 빼앗기지 않으려는 일종의 술수인데 정윤석이 여기에 해당했다.

신인임에도 일일 드라마 주인공으로 뽑힐 만한 연기력과 훈훈한 외모에 스타성이 보였던 것이다.

결과는 맞아떨어졌고 그가 출연한 MBS 드라마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물론 드라마 흥행이 전부 그의 영향은 아니었을 테지만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고 생각한 동권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윤석은 떠오르는 신예 스타야. 다른 방송사에서도 침 흘리고 있는 배우를 우리가 좋은 조건에 기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횐데 솔직히 김 PD가 왜 이렇게까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지 내 이해할 수 없군.”

솔직히 정윤석이라면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감독과 작가의 고유 권한이라 생각했던 캐스팅 문제까지 이런 식으로 침해받자 은기는 경우에게 뭐라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좋아. 일방적으로 내 의견만 몰아붙일 수 없다는 거 나도 인정하지. 그래서 김 PD가 받아들이기 좋게 선물을 붙일 예정이라네.”

“선물이라니요?”

“<셀룰러 메모리>가 <타임아웃>의 후속작이지 않은가. <타임아웃>이 다행히 지금 반응이 좋으니 종영하면 스페셜로 1주,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한 박종연 감독 수상 기념 영화 편성으로 1주, <셀룰러 메모리> 미리 보기와 메이킹으로 1주, 이렇게 3주의 시간을 더 벌어 주겠네. 어떤가, 이만하면 정윤석을 캐스팅하고도 남는 장사일 것 같은데?”

가뜩이나 촉박한 시간 2주도 아니고 3주의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해서 은기는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선 채로 경우에게 사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운명은 쉽게 바뀌지 않는 건가?”

“네?”

“아, 아니에요. 잘됐네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작가님.”

“뭐가요?”

“먼저 의논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돼 버렸네요.”

“아니에요. 저도 한수혁 역으로 정윤석 생각하고 있었어요.”

“정말입니까?”

“제가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실제로 이전 생의 <셀룰러 메모리> 주인공 한수혁 역은 정윤석이 연기했다.

그때와 내용도 달라졌고 시기도 앞당겨졌음에도 주인공으로 그가 낙점되었다는 사실에 경우는 역시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건가 하는 마음에 신기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방송까지 시간이 더 여유가 생겨서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네요. 안 그래도 이따 저녁 때 정윤석과 만나기로 약속이 잡혀 있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걱정했거든요.”

“저까지요?”

“네. 국장님 말씀으로 이미 시놉시스까지 넘겼다고 하니까 배역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모양입니다.”

“배우로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죠. 다행이네요.”

경우는 이은석 시절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평소 그의 말투, 버릇을 분석해 대본을 쓴 일을 떠올렸다. 자신의 상상 속 한수혁이 아닌 실존하는 한수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었는데 이번엔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 * *

무표정할 땐 차가운 인상이었다가 웃으면 눈이 휘는 게 강아지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전 생에서도 그에게 한수혁 역을 맡겼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고명희 역시 그가 <셀룰러 메모리>를 통해 혼란을 겪는 주인공 한수혁 역에 적합했다고 생각했겠지.

어쨌든 정윤석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그런 배우였다.

하지만 실제 만난 정윤석은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신삥이시라더니 그런 배경이 있으셔서 자리를 꿰차신 거군요.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형님.”

“혀, 형님? 저기 실례지만 나이가…….”

“그런 게 뭐 중요합니까. 전 저보다 돈 많으면 무조건 형님입니다. 하하하.”

은기와 경우는 몰랐지만 이미 경우의 배경이 알게 모르게 퍼진 상황. 당연히 정윤석도 신인 작가가 누구인지 대해 들었다.

그러니 경우가 궁금해서 이 자리에 그와 함께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던 것이었다.

배우와 작가, 감독의 만남이었으니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거란 생각과 달리 다른 쪽에 관심을 가지니 경우 역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경우는 어떻게든 대화의 방향을 돌리려 애를 썼다. 그건 은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놉시스는 좀 읽어 보셨습니까?”

“네. 아주 재미있더라구요.”

“한수혁이란 캐릭터에 대해선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글쎄요. 약간 신들린 느낌? 쉽게 말하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식 수술을 받은 후로 다른 사람이 되는 거잖아요. 하하하.”

정윤석의 가벼운 태도에 그의 매니저가 약간은 당황한 듯 얼른 수습하듯 말을 이었다.

“우리 윤석이가 연기에 있어서는 솔직히 타고났습니다. 연기 선생님도 어찌나 칭찬하시는지.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렴요. 저 그런 거 잘합니다. 사람들이 절 보고 그런 말을 가끔 하죠. 신들린 것 같다고. 연기의 신. 으하하하.”

정윤석의 웃음이 호탕해질수록 경우와 은기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경우는 이전 생에 정윤석이 큰 사고 없이 연기 생활을 이어 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쾌활한 성격에 연기파 배우라는 별칭이 붙었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회사에서 관리를 잘한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런 방정맞은 성격이 10년동안 감춰졌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확신한 것도 있었다.

연기 하나는 정말 잘하겠구나.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오직 드라마, 배역에 맞는 이미지만 생각하자며 경우는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술자리가 이어지고 경우에 대해 정윤석이 생각보다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 은기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김 PD,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말하기 좋아하는 것들이 다 그렇지 뭐.”

“선배님, 전 선배님 믿어요. 힘내세요.”

주변에서 그를 걱정하는 이들이 전한 말 한마디 때문에 결국 은기는 소문의 실체를 마주하고 말았다.

생긴 건 맨손으로 소도 때려 잡을 것처럼 생겼지만 마음은 여린 사람이었다. 자신을 뭐라 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실력보다 배경이 가십거리가 되어 버린 경우 탓에 더 속상한 마음이었다.

그의 감정은 고스란히 얼굴에 나타났고 현재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경우가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감독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은기는 대충 대답을 넘겼지만 경우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청모를 통해 소문의 실체를 들은 경우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PPL에 제작비…… 우리 아직 그런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잖아요.”

“내 말이……요. 나도 이게 어떻게 돌아간 속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아이, 형. 우리 둘이 있을 땐 그냥 편하게 말해요.”

“그럴까? 아무튼 무슨 입 방정 떨기 좋아하는 놈들이 있는 건지 자고 일어나면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니까. 이건 분명 누군가 중간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게 분명해.”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이 있어요?”

“있어. 황현석이라고, 김 선배 동기가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이야기.

평소 얼마나 그를 싫어했는지 씩씩대며 콧김을 뿜고 있는 청모를 보던 경우는 뜻밖의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기, 형님.”

“그렇게 부르니까 괜히 겁난다. 그래, 무슨 일인데?”

“우리요, 소문이 사실이 되도록 만드는 건 어떤 거 같으세요?”

“뭐? 소문을 사실로 만들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김 선배가 생긴 건 좀 그래 보여도 마음까지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잖아.”

응?

경우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건만. 생각보다 은기의 외모에 대한 청모의 불신은 대단했다.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아니, 그 부분 말고요. 다른 부분.”

“다른 부분?”

“네. 제작비 빵빵, PPL도 꽉꽉 채워서. 어떻습니까?”

어리둥절한 청모는 순간 경우의 미소가 매우 사악하게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전요. 집안의 도움은 하나도 받지 않으려 했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테니까요. 돈이 많으니까 낙하산이다 뭐다 실력도 안 되는데 설치고 다닌다, 말이 많거든요.”

아카데미 면접을 볼 당시만 해도 경우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던 청모는 경우가 재벌집 아들이라는 사실을 안 뒤 조금은 색안경을 끼고 봤던 것도 있었다.

면접 때 했던 그의 대답이 뽑히기 위해 잘 보이려 한 대답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던 차라 괜히 딸꾹질이 나올 것만 같아 청모는 꾹 참았다.

“어차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 머릿속에 한 번 박힌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생각이 맞도록 해 주자는 거죠.”

“아니, 왜? 그래서 우리가…… 아니지, 김 선배가 얻을 건 뭔데?”

“부러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

“제가 돈 지랄이 뭔지 제대로 한번 보여 드릴게요.”

경우는 그 길로 지선을 찾아갔다. 단순한 투자라면 자기 선에서 할 수는 있었으나 지난번에 있었던 일도 있고 하니 누나에게 이야기해 볼 참이었다.

확실히 돈이 많으면 어려운 일도 쉬워지는 법이다.

경우는 기억 속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처음 와 보는 지선의 사무실을 찾았다. 고가의 미술품이나 장식품 하나 없이 딱 필요한 것만으로 꾸며진 사무실은 마치 지선의 모습과 같았다.

“어쩐 일이야? 왜? 일 배워 보게?”

“누나는 아직도 그 소리야? 약속했잖아. 한 달까지는 봐주기로.”

“그럼 뭐 하러 온 건데?”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알아봤어?”

“무슨?”

“썸 어패럴. 설마 벌써 인수한 건 아니지?”

불안감에 경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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