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전화위복이란 이런 것 (1)
계약서 작성까지 마치자 경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드라마를 쓰면서 살아왔지만 그는 언제나 보조 작가였다. 그가 기획하고 그가 썼음에도 그 드라마를 쓴 사람이 자신이라고 할 수 없었던 비참함, 억울함, 그런 결정을 내린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꽤 오래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감정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울지도, 그렇다고 웃지도 않는 그 오묘한 경우의 얼굴에 은기는 대뜸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예?”
“실력이 충분하신데 고료가 솔직히 너무 적죠? 푸시를 하기는 했지만 검증 안 된 신인이라 방송국에서 책정한 대로 할 수밖에 없다나 뭐라나. 딱 봐도 이 대본이면 시청률 씹어 먹을 텐데 제가 이 정도밖에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입봉작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혹시 그 얘기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무슨?”
“제 입으로 말하려니 좀 뭣하지만 저 돈 많습니다.”
그제야 은기가 경우가 어디 아들인지 떠올랐다.
하긴, 새명의 아들 정도면 여기서 더 쳐준다고 해도 껌값으로 느낄 게 분명했다. 그동안은 그가 쓴 대본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던 그의 배경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근데 정말 새명 그룹 막내아들 맞으세요?”
“네, 맞아요. 아버지가 민 홍 자 준 자 쓰십니다.”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새명 그룹 아들이라면서 드라마를 왜 씁니까?”
“드라마를 좋아하니까요. 재미있는 드라마를 보면 하룻 동안 어떤 시름이 있었는지 나한테 닥친 문제가 뭐든지 간에 잠시 잊을 수 있잖아요. 아마 제일 좋아하는 걸 꼽으라면 저한텐 드라맙니다.”
“그렇군요.”
돈이 많든 적든 사람 사는 건 비슷했다. 그의 진솔한 대답은 재벌집 아들이라는 특별한 위치가 아닌 평범한 꿈을 지닌 청년으로 보이게 했다.
“아, 감독님이 처음 연출하셨던 <13월의 크리스마스>도 잘 봤습니다. 솔직히 내용보다 영상미가 전 더 좋더라고요. 암울한 분위기가 연출 덕에 확 사는 것 같았어요.”
경우의 칭찬에 은기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엇보다 드라마를 좋아하고 대본을 잘 쓰는 이가 인정해 주는 말에 괜히 어깨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작가야 모름지기 글을 잘 쓰면 그만이지만 그런 사람들 중엔 자기가 완성한 대본의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완벽주의자가 있었다. 물론 결과물은 좋았지만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반면 경우는 그렇게 앞뒤 꽉 막히지도 않았고 의견을 내면 웬만한 선에선 모두 받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이 빨랐다.
정확히 따지자면 머리가 빨랐다고 하겠는데 바쁜 드라마 제작 여건상 가장 중요한 요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재계에 손꼽히는 재벌집의 아들이라니.
은기는 이제야 그의 현실을 자각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경우야 말로 연초에 봤던 토정비결에 나온 귀인이 아닌가.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뒤로 밀리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 때론 황현석처럼 백이 있는 놈들을 부러워할 때도 있었건만 그것보다 몇 배는 나은 인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은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거 국장님이 감독님한테 독박 씌운 거 아닙니까?”
“뭘 말입니까?”
“그렇잖아요. 제작하던 드라마가 중단됐는데 사전 제작한 드라마도 아니고 급하게 땜빵하다가 시청률이 생각보다 안 나오면 모든 책임 감독님한테 돌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김 국장이 그런 흑막을 숨겨 놓고 있었던 건가?
지금 생각해 보니 계획을 이미 짜 놓고 자신을 그렇게 몰고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일이 이렇게 진행된 것을. 그리고 은기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책임은 내가 집니다. 걱정하지 말고 작가님은 대본만 신경 쓰십쇼. 그리고 제가 이 바닥에서 굴러 본 선배로 말하자면…… 이 작품, 분명히 잘될 겁니다. 두고 보십쇼!”
무엇보다 작가에게 믿음을 주는 은기의 모습에 경우는 일말의 불안감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제일 처음으로 일하게 된 사람이 그라서 다행으로 여겼다.
은기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의 생각에 딱 맞는 기획안까지 경우가 미리 써 온 덕분에 컨펌을 받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은기는 곧장 스탭을 꾸리기 시작했고 조연출에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안청모가 합류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게 청모의 힘이 가장 컸기에 은기는 다른 스탭들과 자리를 마련하기 전 만나 회포를 풀기로 했다.
“우리가 이렇게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치?”
“그러게요.”
“어허, 작가님한테 이제 그렇게 편하게 대하면 안 되지.”
“저는 괜찮은데요.”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하게 지내는 거야 나쁠 거 없죠. 하지만 사람도 많고 말도 많은 곳입니다. 괜히 색안경 끼고 이상한 말 옮기는 사람 많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긴,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고 이쑤시개도 몽둥이로 만드는 곳이 방송국이었다.
방송국 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게 괜히 나온 말이 아닐 터. 그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청모였으니 교통정리는 확실히 하기로 했다.
“그럼 민경우 작가님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사단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서서히 김은기 사단이라 불릴 만한 스탭들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몇몇을 제외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은기였던 덕에 스탭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좋았다.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장소를 섭외하고 세트며 소품을 정하는 것부터 콘티를 작성하는 것까지 모두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팀을 이끌어 가는 은기부터 시작해서 말단까지 모두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그때,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를 이상한 소문이 드라마국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사냥개>요. 결국 어그러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대박 난다고 설치고 다니더라니. 대박 난다고 하면 재수 옴 붙어서 안 되는 거 몰랐나 봐.”
“설레발 칠 만했죠. 기대작이었잖아요.”
“기대작은 무슨. 그놈의 개나 소나 기대작이라지. 그럼 편성은 어떻게 하기로 했대?”
“김은기 PD가 맡기로 했다던데요.”
“그래서 요즘 그렇게 세상 일은 혼자 다 하는 것처럼 하고 돌아다닌 거로구만. 근데 재주도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 PD가 그 자리를 꿰찰 줄은 몰랐네.”
“그쵸? 근데 거기에도 비화가 있대요.”
“뭔데?”
“드라마 쓰기로 했다는 작가가 경력 하나도 없는 쌩 초짜라고 하더라구요.”
“엥? 그런 사람이 어떻게 작가가 돼?”
“듣자하니 재벌집 아들이래요.”
“미쳤어? 재벌집 아들이 이 짓을 왜 해?”
“취미로 하나 보죠. 돈도 많은데 설마 돈 벌려고 하겠어요. 그 작가를 김 PD가 물어 왔다고 하더라고요.”
“김 PD가? 그 산적같이 생긴 그 김 PD 말하는 거 맞지? 나는 왜 이렇게 안 믿기지? 생긴 건 꼭 곰같이 생겨서 그런 여우 짓은 못 할 줄 알았더니. 도대체 어떻게 알았대?”
“저야 모르죠. 근데 재벌집 아들이라서 그런지 PPL 빵빵하게 넣어 주고 제작비도 지원해 주기로 했다던데요?”
“그러니까 그런 쌩 초짜도 받아 주는 거지. 하여간 돈이 좋기는 좋아. 시청률이 바닥을 쳐도 제작비는 확실히 건질 테니 나 같아도 받아 주겠다. 이 기회에 재벌하고 연줄도 닿을 것 아니야. 완전 봉 잡았네, 봉 잡았어.”
“이렇게 되고 보니까 황 PD만 불쌍하게 된 거 있죠.”
“그러게. 이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방송까지 촉박한 시간, 누가 봐도 은기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소문은 입에서 입을 거친 사이 조금씩 짓궂게 변해 마치 은기가 이 모든 불행의 사단이 되어 현석의 기회를 빼앗은 듯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간교한 꾀를 부린 건 다름 아닌 현석의 삼촌인 황성준 CP였다.
그러니까 은기가 경우와 함께 일을 하기로 결정된 그날 동권은 현석을 불러 드라마 중단을 통보했다.
“주, 중단이라니요.”
“이미 회의를 거쳐서 그렇게 결정이 났어.”
“그럼 방송은요? 사전 제작 드라마로 편성하시는 겁니까?”
“아니, 김은기 PD가 새로 제작하기로 했어.”
“예? 그게 무슨.”
“그렇게 됐으니까 배우들한테 통보하고 정리하도록 해.”
“국장님.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뭐?”
“다음 주면 선영 씨 퇴원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중단되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이어 나가면 됩니다. 문제는 재현 씬데…… 이렇게 된 거 안타깝지만 남자 주인공만 교체하면-.”
“교체?”
“네. 찍어 둔 부분도 있으니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부분만 새로 찍는다면-.”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네?”
“배우가 무슨 소모품이야? 쓰다 고장 나면 버리고 새로 갈아 끼우면 되는 그런 거라고 여기는 건가?”
“그, 그게 아니라…….”
“그래, 황 PD 말대로 배우를 교체했다고 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변명하면서. 하지만 사람들도 우리같이 생각해 줄까?”
“…….”
“제일 먼저 재현이 그 친구 팬들은 뭐라고 하겠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를 다른 일도 못 하게 그렇게 다치게 해 놓고 다른 사람들로 교체하면 좋다고 할까?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고 알리는 순간부터 게시판에 와서 온갖 분탕질을 하지 않겠어?”
“그건…….”
“지금 타 방송사에선 드라마 제작 여건에 대한 성토를 날이면 날마다 하고 있어. 그 바람에 사람들 뇌리에서 지금 우리 방송국은 안전 점검도 제대로 하지 않는 악덕 기업이 돼서 물어뜯기고 있는 형편이라고.”
“물론 잡음이야 있겠지만 효율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한 말 뭘로 들었어! 귀가 막혔나? 효율이 뭐 어쩌고 저째? 효율 따질 거면 애초에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지 말았어야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고함을 치는 동권의 모습에 현석도 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호흡을 가다듬은 동권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이미 황 PD한테 기회를 여러 번 줬어. 하반기에 편성되어 있던 것까지 끌어다가 줄 정도로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가 성공할 수 있다고 밀어 달라고 해서 밀어줬다고. 그런데 지금 결과가 어떻나?”
“죄송……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그 말이 동권은 달갑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소리 이제야 하는군, 그래. 죄송한 줄 알면 더는 이 일에 대해 거론하지 마. 이미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고. 지금 자네가 이러지 않아도 나머지 일을 수습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야지. 또 자네 동기인 김 PD는 어떤가? 자네 때문에 김 PD가 얼마나 촉박한 시간에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
“양심이란 게 있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물러나.”
서슬 퍼런 동권의 모습에 현석도 더는 뭐라 말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런 식으로 끝나 버리면 자신의 커리어는 어떻게 될 것인지 현석은 불안해졌다. 그가 기댈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그의 삼촌인 황성준 CP밖에 없었다. 현석은 그 즉시 성준에게로 달려가 울고 불고 매달렸다.
“삼촌, 저 이제 어떡하면 좋아요?”
팔은 안으로 굽는 거라고 조카의 눈물을 보니 성준의 마음이 흔들린 건 당연했다.
“네 탓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 하여간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알아서 물러났어야지. 나한테 밀리기 싫으니까 이번 일 너한테 덤터기 씌우는 거다. 나 물 먹이려고.”
“이미 편성까지 결정이 났대요. 이대로 끝나 버리면 저는 이제 어떡해요?”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했다. 내가 알아볼 테니 넌 걱정 마. 도약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 있잖니. 지금이 그런 때라고 생각해. 널 믿는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고맙습니다, 삼촌.”
황성준은 최대한 은밀하게 알아보기 시작했고 대본을 맡은 경우에 대한 모든 것까지 알게 되었다.
위가 어렵다면 아래에서 치면 된다는 생각을 한 성준은 그렇게 작업을 시작했고 그의 입에서 시작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소문에 관련된 사람들은 소문이 다 퍼지고 난 뒤 가장 늦게 아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