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4화 (14/250)
  • #14.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 (3)

    “대부분의 장르물은 회별로 사건이 끝나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성장해요. <셀룰러 메모리>도 시작은 같아요. 그렇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각각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이 드라마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보는 걸로 끝나진 않을 테니까 말이죠.”

    장기 이식을 받은 주인공이 우연히 사건 현장을 발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사건의 본질을 꿰뚫는다. 이후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주인공은 혼란스러워한다. 그런데도 주인공은 병적으로 사건에 집착하게 된다.

    마침내 서로 접점이 없을 것 같던 각각의 사건들이 마지막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였음이 드러나면서 이전 사건들의 의미가 다시금 부각되는 것이다.

    “감독님은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떠오른다거나 평소엔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 것 같으세요?”

    경우의 물음에 은기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쉽게 답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그런 일은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은기의 모습을 보며 경우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기억이란 말이죠, 단순히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아요.”

    경우가 지금 수정하고 있는 드라마 대본 <셀룰러 메모리>는 장기 이식을 통해 기증 받은 사람에게 기증한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이 전해지는 걸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했다.

    사실 이 소재는 로맨스 드라마에 자주 쓰였다.

    심장을 이식 받은 주인공, 오직 한 사람에게만 다른 반응을 보이는데.

    - 이상하게 너만 보면 내 심장이 두근거려. 나 너 좋아하냐?

    라는 식이다.

    알고 보니 심장 이식을 받은 주인공, 기증자가 사랑했던 사람만 보면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자신이 사랑한 것인지 기증자의 심장이 제멋대로 반응한 것인지 혼란스러워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사랑을 선택한다.

    이은석이었던 시절, 그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소재로 로맨스가 아닌 추리 스릴러를 그렸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인기 소설가가 불의의 사건에 연루된 채 사망한다. 그의 장기를 이식 받은 주인공이 여러 사건을 겪으며 소설가가 연루된 살인 사건에 다가가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었다.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은 점점 더 소설가에 몰입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추리 수사물.

    그렇기에 과거의 그는 다른 것보다도 눈에 보이는 사건에 더 중점을 뒀다.

    하지만, 이은석에서 민경우가 된 지금 경우는 ‘셀룰러 메모리’를 겪는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민경우의 기억만이 아니라 그 당시의 느꼈던 기쁨, 슬픔, 고통… 당사자가 겪었던 감정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한 번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처음부터 민경우였고 어느 날 사고로 이은석의 기억이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민경우의 기억과 이은석의 기억이 공존하고 있는 지금, 사실 그는 온전한 민경우도 그렇다고 이은석도 아닌 애매한 상태였다.

    해서 경우는 기억을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보여 줘야 하는 드라마에서 사건 중심의 전개도 중요하지만, ‘셀룰러 메모리’를 겪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 또한 중요했다.

    “감독님께서 수정을 요구하셨던 부분은 주인공이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분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드라마가 늘어져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감독님 말씀대로 주인공이 성장하려면 꼭 거쳐야 할 과정 같은 겁니다. 그래야 마지막 사건을 그렇게 해결할 수 있는 거고요.”

    경우의 말에 은기는 대본을 다시 살펴보았다. 수정하기 전과 수정한 후, 그리고 결말 부분의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까지.

    장르물은 그 특성상 시청자가 몰입할 수 있도록 속도감을 높이는 걸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늘어지는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한 거였는데 자신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읽어 보니 은기는 경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늘어진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마지막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네요. 작가님 씬 하나 허투루 쓰지 않았을 텐데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이제 저에 대한 의심도 거두시는 겁니까?”

    자신을 보는 말간 눈빛에 은기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그를 의심했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테스트를 했다는 것을 경우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속내를 들켰다는 생각에 은기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미안합니다. 운 좋은 낙하산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예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게 대놓고 인정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요.”

    “사실이 그런걸요.”

    “그렇다면야 뭐. 좀 더 솔직히 얘기하겠습니다. 나 이 대본 마음에 듭니다. 테스트 한 건 미안하지만 솔직히 믿기지 않았어요. 청모한테 듣긴 했는데 내가 원래 의심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나랑 같이 일합시다. 이 대본, 내 손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토록 바라 왔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우는 흥분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망한 경험이 아직도 꽤 아프게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경우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편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당장 오케이 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아픈 곳을 정면으로 찌르니 은기도 할 말을 잃었다.

    다른 방송사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괜찮은 대본을 일단 계약해서 묶어 둔 채 제작을 하지도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서랍 속에 잠만 자고 있는 작품도 많았다.

    그러니 경우의 요구는 당연한 거였다. 그렇다고 이만한 인재를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편성만 보장된다면 저한테 맡겨 주실 겁니까.”

    “물론이죠. 제가 이래 봬도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좋습니다. 편성, 제가 꼭 받아 낼 테니 나중에 딴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각오를 보여 주려는 건지 은기는 주먹을 불끈 쥐고 돌아섰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닐 때는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사람이 참 달라 보였다.

    경우는 이 사람과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어떤 방향이 되었든지 간에.

    “설마하니 국장님하고 한판 붙는 건 아니겠지?”

    부디 별 탈이 없어야 된다고 경우는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 *

    드라마국의 그리 좁지 않은 복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벽 쪽으로 슬금슬금 몸을 비켰다.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은기의 기세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 탓이었다.

    “김 PD, 왜 저래? 무슨 일 있어?”

    “나도 몰라요. 혹시 주식이라도 떨어졌나?”

    “김 PD 주식도 해?”

    “모르죠.”

    “어? 저기 국장님 방 아니에요?”

    “참, 며칠 전에 국장님이랑 한바탕했다지?”

    “그럼 오늘이 2차전? 듣고 보니까 그때도 김 PD가 국장님을 들이받았다고 하던데요?”

    “웬걸. 그래서 국장님이 대노하셨다고 했지 아마?”

    “저러다 무슨 사달이라도 나는 거 아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거치면서 이야기는 부풀어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기는 국장실의 문을 두드리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갔다.

    “국장님, 저한테 그 대본을 보여 주신 이유가 뭡니까?”

    “PD한테 대본을 왜 보여 줬겠어? 제대로 만들어 보라고 한 거잖아.”

    “그럼 저한테도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자넬 찬밥 취급이라도 한 줄 알겠어.”

    “그동안 밀려난 건 사실이었지 않습니까?”

    “이제와서 따지려고 드는 건 아닐 테고.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민경우 작가의 작품 제가 연출하겠습니다. 그러니 편성 보장해 주십시오. 지금 3분기까지 편성이 다 끝난 걸로 아는데 4분기에 월화 드라마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아예 작정을 하고 왔구만. 들어갈 시간까지 보고 왔을 줄이야. 김 PD, 의외로 치밀한 구석이 있었네.”

    “뺏기고 싶지 않아서요.”

    평소와 다른 단호한 모습에 동권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나? 송기현 작가 알지? 그 작가가 그 시간을 요구했어. 김 PD도 알잖아. 송 작가 하면 시청률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거.”

    다른 작가라면 모를까, 송기현 작가라면 그녀가 원하는 시간대에 편성을 받을 능력이 충분했다. 그녀가 쓴 드라마라면 어떤 내용이건, 주인공이 누구건 간에 상관하지 않고 따라오는 골수팬이 많았으니까.

    괜히 스타 작가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그녀의 실력이 결국 그녀를 향한 신뢰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은기는 그 순간 자신에게 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황현석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끝나진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 은기의 생각을 읽었는지 동권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 <사냥개>가 편성 받았던 그 시간.”

    “<사냥개> 결국 어그러진 겁니까?”

    “주연 배우 둘 다 부상에 그 팬들이 들고일어났어. 안전 불감증이네 뭐네 시끄러운 거 자네도 알잖나. 다른 배우를 섭외한다고 해도 여론이 좋지 않을 거야. 노이즈 마케팅으로 1~2회 반짝 할 수는 있겠지. 그렇다고 밀어붙이기엔 분위기가 안 좋아.”

    “…….”

    “어차피 시간은 났어. 자네가 하지 않겠다고 하면 지금 고려하고 있는 사전 제작된 드라마를 편성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새로 드라마를 제작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시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말 꼰대 같아서 그렇지만 나 때는 아침에 찍어서 저녁에 방송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지금을 그때와 비교하시는 건 반칙입니다…….”

    “확실한 시간을 달라며. 지금 자네한테 줄 수 있는 시간은 그 시간밖에 없어. 자네가 어렵다면 뭐 어쩔 수 없지.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네.”

    망설이는 은기에게 동권은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근데 왜 황현석이는 굳이 그 시간을 고집했을까? 고민은 너무 길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래 고민한다고 좋은 수가 나오는 게 아니야. 심사숙고 끝에 악수가 나온다는 말이 있어.”

    황현석.

    청모는 다르게 생각했지만 은기가 볼 때 현석은 다른 건 몰라도 가지고 있는 소스를 활용하는 걸 잘했다.

    황성준이라는 든든한 백도 있었지만 그 힘을 어디다 써야 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을 보완해 줄 사람들로 팀을 꾸렸고 좋은 대본을 만나면 싸워서라도 반드시 차지했다.

    드라마를 연출하는 그의 실력은 몰라도 확실히 결과물을 좋았다. 그러니 그를 밀어주는 황성준의 목소리도 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함에도 굳이 액션신도 많고 CG도 많아 사전 제작이 충분히 들어가야 하는, 그래서 하반기에 편성되어야 했던 <사냥개>를 밀어붙었던 건 시기가 중요한 탓이었다. 방송국에서 가장 신경 쓰는 수목 시간대, 거기다 경쟁작들에 대한 기대치가 확실히 낮았다.

    잘만 하면 시청률을 확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문제는 방송까지 남은 시간이 채 석 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사냥개>와 달리 <셀룰러 메모리>는 추격 씬만 조금 있을 뿐 액션 씬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 실외보단 세트장 촬영이 더 많았다.

    물론 배우들이나 스탭들의 노동력을 갈아 부어야 할 테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니 확실히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은기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시간이 촉박하니까 대신 지원은 아끼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동권은 믿었다. 좋은 대본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자신이 깔아 놓은 판에 예상대로 움직이는 은기의 모습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황성준을 견제할 패로 은기가 딱 적당했으니까. <사냥개> 때문에 하마터면 자리마저 위태로울 뻔했지만 <셀룰러 메모리>가 대본대로 나온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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