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3화 (13/250)
  • #13.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 (2)

    강철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경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그 눈빛에 찔리는 게 있는 경우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뭐야? 왜 그러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는 민경우가 맞는지 의심스럽단 말이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하루 이틀 봐? 누님 말마따나 너 학교 다닐 때 뭐라고 했냐? 회사 근처는 얼씬도 안 할 거라고 평생 놀고 먹을 거라고 했냐 안 했냐?”

    “놀고 먹을 만큼 돈도 넘친다고 했지.”

    “그래, 내 말이. 근데 하루가 멀다 하고 술 퍼마시던 놈이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어. 여자도 안 만나. 그러더니 갑자기 작가를 하겠다고 하네. 근데 신기한 게 정말 매일 뭔가를 해. 그것도 아주 열심히.”

    “내가 열심히 하겠다는데 뭔 불만 있냐?”

    “그게 아니지. 내가 아는 민경우는 절대 그런 놈이 아니란 거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너, 누구냐? 정체가 뭐야?”

    자신을 바라보는 강철의 날카로운 눈빛에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쟤가 정말 뭐 아는 건가 싶은 마음이었다.

    혼자서 엄청난 비밀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건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사람한테만은 털어놓자 싶은 경우는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 비밀을 알아 차린 게 너일 줄은 정말 몰랐다.”

    “뭐?”

    “그래, 그날…… 술을 마셨고 택시를 타려 했는데 어떤 차가 와서 나를 치고 도망갔어. 진짜 죽을 것 같이 아프더라. 그래서 죽은 줄 알았거든. 근데 눈 떠 보니까 민경우가 되어 있는 거야. 강철아, 네 말이 맞아. 난 민경우가 아니야.”

    멍한 얼굴로 경우를 보던 강철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저 또라이 새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경우는 강철의 반응에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민경우 아닌 것 같다며? 그래서 사실을 말해 줬는데 왜 안 믿는 건데?”

    “그런 뜻이 아니잖아. 멀쩡하던 놈이 하루아침에 달라졌어. 근데 그놈이 원래 인간 말종에 망나니였단 말이지.”

    “지금 대놓고 내 욕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지금 상황을 말하는 거잖아.”

    “그래서?”

    “너 같으면 이상한 생각 안 하겠냐고?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 거라면 그것밖에 없잖아…… 응?”

    그러더니 경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한다.

    저놈 왜 저러는 거야 싶던 경우는 그제야 강철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강철을 향해 던졌다.

    “야, 이 미친놈아. 아무리 내가 나쁜 놈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10년을 넘게 본 친구를 약쟁이로 의심하냐?”

    “아니……야?”

    “아니야! 정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든지. 그래, 좋네. 경찰에 신고해.”

    “진짜? 진짜 경찰에 신고해?”

    “하라고 이 미친놈아! 안 말려. 왜? 내가 직접 신고할까? 휴대폰 어딨냐?”

    “아이, 됐어. 혹시나 했던 거지. 아무렴 친구를 의심할까.”

    했으면서 뭘.

    태세 전환이 5G급이었다.

    경우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고 있는데 강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래, 어쨌든 그래도 너네 집에서 너 봐주는 건 누님밖에 더 있어? 누님 눈 밖에 나는 짓은 하지 말란 소리야. 알았냐?”

    모르겠는데?

    경우는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는데 강철은 경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 다 했다는 듯 소파에 벌렁 누웠다.

    “집에 안가? 왜 거기 눕는 건데?”

    “아, 몰라. 피곤하니까 말 시키지 마. 너 땜에 진짜 내 명줄이 준다, 줄어.”

    정말 잠이라도 잘 기세인지 눈까지 감은 강철의 모습에 경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더 화를 내 봤자 본인만 쪼잔한 인간이 될 뿐. 괘씸한 강철을 노려보던 경우는 곧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저렇게 쪼그려 소파에 자고 있는 강철의 모습도 영 신경 쓰였다.

    경우는 하는 수 없이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강철에게 덮어 주었다. 미운 건 미운 거고 불쌍한 건 또 보기 싫으니까.

    그리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김은기가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 같으니 그 의심을 벗겨 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국장의 손을 거쳐 그에게 넘어간 대본은 4회차 분량이 전부였다. 이미 완결까지 해 둔 상태였지만 완성도를 더 높이기 위해 밤을 새도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자는 줄 알았던 강철의 눈빛이 그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경우는 알지 못했다.

    * * *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자 지선은 피곤한지 손으로 그곳을 지긋이 눌렀다. 평소 지선을 생각했을 때 저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 바람에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박 실장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한승진 대표가 정말 학력 위조가 맞다는 겁니까?”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단기 연수를 받은 건 맞지만 학위를 이수하고 졸업을 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디자인 표절 건은요?”

    “확실히 하는 데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단순한 의심만으로 넘어갈 사항은 아니라는 거군요.”

    “네.”

    지선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경우의 지분을 확보했고 여기서 더 성과를 얻으면 뒤로 물러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급한 마음에 평소답지 않은 짓을 했다.

    만약 이대로 썸 어패럴을 인수했더라면 그 뒤에 불러올 일들에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자연히 최 상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적으로 썸 어패럴을 인수해야 한다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유도한 장본인이었으니.

    “한승진 대표와 최 상무 사이의 관계는 알아봤나요?”

    “알아보고 있는 중이지만 아직 뚜렷한 게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최 상무가 얼마 전 민준호 이사님과 회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난데없이 동생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지선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성을 되찾았고 어떻게 돌아간 일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오빠라면 모를까 한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그나마 얼마 가지지 않은 모든 것들을 동생에게 빼앗겼다. 할아버지의 관심과 엄마의 사랑까지 모조리.

    그래도 동생이라고 싫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착한 누나인 척 동생을 사랑하는 척해 왔건만 그런 자신에게 발톱을 드러내다니, 가만 두고 볼 일은 아니었다.

    “동생이 혼날 짓을 했으면 누나로서 가르쳐야겠죠?”

    지선은 동생에게 참교육을 할 방법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영악한 놈이었으니 웬만한 것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

    “박 실장님, 지금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 상무의 약점을 찾아내세요.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동안 손에 흙 안 묻힐 수는 없었을 거예요.”

    “민준호 이사님 귀에 들어가면 꼬리 자르기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럼 안 되죠. 최 상무는 우리한테 좋은 패가 될 수도 있는데. 몰래 하세요. 들키지 않게. 그런 다음 우리 편으로 만듭시다. 원래 자기 손으로 버리는 것보다 남한테 뺏기는 게 더 기분이 더러운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싱긋 웃는 지선을 향해 박 실장이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갔다.

    “그나저나…….”

    지선은 책상 위에 둔 책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다름 아닌 경우가 준 대본.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경우가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실감하는 중이었다.

    “우리 막내한테 이런 재주가 있었을 줄은 몰랐네. 그럼 누나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지선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이, 이게 대체…….”

    경우가 내민 대본을 받아 든 은기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은 지난번 김동권 국장을 통해 받았던 <셀룰러 메모리>의 16부 마지막 화까지 쓰인 대본이었다.

    불과 며칠이었다. 그런데 16부작 대본의 완성본을 들고 온 거였다.

    “국장님께 보내 드릴 때도 대본은 완성되어 있었는데요, 초고라 그동안 수정을 해 봤습니다.”

    그 말을 반영이라도 한 듯 경우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은기는 뭐라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그보다 자신의 손에 들어온 대본의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해서 경우를 앞에 두고 자기도 모르게 대본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집중을 하며 대본을 보는 은기의 모습에 경우는 긴장된 마음을 서서히 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은기는 대본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열기에 사로잡혀 흥분한 듯 보였다.

    경우는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하고 있었지만 은기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의 것이었다.

    “혹시 지금 시간 됩니까?”

    저 많은 분량의 대본을 다 읽을 때까지 사람을 이 자리에 앉혀 놓고 이제 와서?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방송사의 PD였고 경우는 아직 작가 지망생이었으니.

    경우는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일어나요. 나랑 갈 데가 있습니다.”

    그렇게 은기가 경우를 데려간 곳은 그가 일하고 있는 방송사 드라마국.

    경우는 너저분한 책상 위를 보며 눈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방송국 놈들은 도대체 저런 미로 같은 곳에서 어떻게 일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멍 때리고 있는 사이 은기는 대본들과 자료들로 엉망이 된 자신의 책상 위를 간단히 치우더니 경우에게 내줬다.

    “일단 앉아요.”

    영문을 알지 못한 경우는 은기가 시키는 대로 책상에 앉았다.

    “혹시 자기 컴퓨터만 써야 한다거나 뭐 그런 예민한 편에 속합니까?”

    “아니요.”

    “그럼 다행이네요. 원래 작가들이 예민한 종족이라서 정해진 자리에서 자기가 쓰던 걸로만 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런 면에선 일하기는 쉽겠네.”

    이건 뭐 같이 일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속으로 의문을 품던 경우는 얼마 안 가 그 의문이 모조리 해결되었다.

    “그럼 일단 내 컴퓨터 써요. 바꾼 지 얼마 안 돼서 성능은 괜찮을 테니까.”

    “예?”

    “뭘 그렇게 놀라요. 일 시작하면 이런저런 일 다반산데. 내가 민경우 씨 대본을 보고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에요. 이 자리에서 수정 가능하죠?”

    “아, 네.”

    “그럼 다행이네. 여기 8부에 28씬, 여기 주인공이 말입니다.”

    그렇게 은기는 대본을 짚어 가며 일일이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사람마다 드라마를 보는 시각이 다르니까 흔히 있는 일이었다. 대본이 무슨 신성불가침한 것도 아니고 드라마가 촬영되는 중간에도 수정은 빈번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그마치 두 시간 동안 은기가 골라낸 부분을 수정하고 수정하던 경우는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테스트를 받는 중이라는 걸. 아마 지난번에도 물었듯 그는 자신이 이 대본을 쓴 게 맞는지 아직도 의심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장단에 조금은 맞춰 줄까 싶은 생각도 했던 그는 이 정도 했으면 됐다 싶어 열심히 타자를 치던 손을 멈췄다.

    “저기 감독님?”

    “네.”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뭡니까?”

    “감독님은 이 대본을 어떻게 보셨나요? 저한테 수정만 요구했지. 감독님이 정확히 원하는 방향을 말씀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요.”

    경우는 은기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도 그를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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