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칼을 꺼냈으면 무라도 썰어야 (1)
“이제 오니? 늦었네.”
집을 비운 사이 지선이 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경우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강철을 바라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디 다녀오니?”
“응?”
“듣기론 집에 틀어박혀 있다고 하던데. 다 거짓말이었나 봐, 김 대리?”
경우를 향하던 시선이 자연스레 강철이에게도 향했다. 그 눈빛에 강철은 움찔하고 말았다.
“아닙니다. 그동안은 계속 집에 있었는데…….”
“그럼, 늘 집에 있던 얘가 내가 오는 날 맞춰서 공교롭게도 밖에 나갔다는 건가?”
“그건 저…….”
“괜히 강철이 잡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어쩐 일이야? 무슨 용건이 있어서 여기까지 납셨는데?”
“이제 쉴 만큼 쉰 것 같은데 회사로 나와. 너도 일 배워야지.”
“뭐?”
“뭘 그러게 놀라? 이제 철없이 놀 나이는 아니잖아. 어차피 건설은 너한테 맞지 않았어. 난 네가 유통 쪽에 더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이 기회에 내 밑에서 일해.”
“전에 내가 한 얘기 뭐로 들었어. 나 하고 싶은 일 있다고 했잖아.”
“무슨 일? 뭐, 작가? 책이라고는 만화책도 안 보는 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슨 작가? 그런 건 아무나 하니?”
“그땐 다 이해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웬 딴소리?”
“애초에 네 계획에 동참한 건…… 내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네가 내 동생이기도 해서야. 아버진 널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난 너 포기 안 했어.”
남매 사이에 언쟁이 거세지자 강철은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경우는 그의 생각보다 자신을 더 생각하고 걱정해 주는 지선의 모습에 마음이 풀려 버렸다. 민경우를 낳은 민 회장도 아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적어도 누나만은 동생을 책임지려는 마음이 이런 게 가족인 건가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다.
“누나, 생각해 주는 건 고마운데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거 같아.”
“너-.”
“실은 지금 내가 방송국 관계자를 만나고 왔거든.”
지선이 뭐라 따지기 전에 경우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어쩌면 드라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쪽에서 내 대본을 좋게 봤거든.”
“뭐? 야, 너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말 없더니 갑자기-.”
놀란 강철이 앞뒤 생각도 없이 따지다 지선의 눈빛에 곧 꼬리를 내렸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말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차례대로 말해 봐.”
이에 경우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우는 성심 성의껏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말했지만 지선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 다니던 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산 동생이었다. 책은커녕 취미도 없었다. 그런 경우가 하루아침에 드라마를 쓰고 그걸로 방송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니 믿을 수 없었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걸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었다.
“못 믿겠으면 전화해 보던가. 방금 매듭짓고 오는 길이니까.”
“그것도 조작일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
“나한테 한 달만 시간을 줘. 그 시간 동안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면 회사에 들어가서 일 배울게. 나한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누나.”
어쩐지 지선은 요즘 경우가 자꾸만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보였다. 그 바람에 차마 매정하게 내 칠 수 없었다.
“알았어. 딱 한 달이야. 그동안 아무 성과 없으면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당연하지. 고마워 누나.”
요즘 이 녀석한테 고맙다는 말도 참 자주 들었다. 아마 막내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들은 게 어릴 때를 빼고 꽤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경우는 제본한 책 한 권을 지선에게 건넸다.
“이건 누나 선물.”
“뭔데?”
“내가 쓴 거야. 심심할 때 읽어. 아무래도 백 번 말하는 것보단 보여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대본을 받아 든 채 얼떨떨해하는 그때 경우는 그녀가 다른 생각 못 하도록 화제를 돌려 버렸다.
“누나는 요즘 어떻게 지내?”
“별일이네. 네가 나한테 다 관심을 갖고.”
“별일은 무슨, 당연한 거지. 누나도 나 걱정돼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잖아. 나도 누나 걱정해.”
계속 의외의 말을 하는 경우를 잠시 바라보던 지선은 픽 웃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니 정말로 그런 건가 싶기도 해서 어쨌든 기분이 그렇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무관심한 가족들, 눈치 보기에 급급한 회사 사람들 사이에 이런 평범한 대화가 나올 리 없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풀어졌는지도 몰랐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뻐. 요즘 썸 어패럴 인수를 하려고 추진하는 중이거든.”
익숙한 한 글자에 경우는 문득 이전 삶이 떠올랐다.
“썸 어패럴? 설마…… 한승진 대표가 있는 거기?”
“너도 아는구나. 20-30대 젊은 층에서 인기가 좋아. 유니크한 디자인 덕에 젊은 여자들이 많이 찾더라고. 백화점은 아무래도 한계가 좀 있어서 이번 기회에-.”
“누나, 거기 절대 안 돼!”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글쎄, 거기는 절대 안 된다고!”
이전 삶에서 드라마 취재를 위해 만났던 40대 디자이너와의 인터뷰가 문득 생각났다. 이대 근처에서 편집샵을 하며 입소문을 타 주목 받는 신예 디자이너였던 그는 힘들었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첫 직장이 진짜 힘들었죠. 해외에 유명 디자인 스쿨 출신의 디자이너가 대표로 있는 회사였거든요.’
‘정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내가 봐도 진짜 유니크했거든. 전 세계에 나만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디자인을 뽑아내니까 젊은 여자들 눈이 확 돌아가는 건 당연하잖아요.’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대박이라고 생각했죠.’
‘근데 그거 다 뻥인 거 있죠. 그 대표란 사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거짓말이었어요. 사람들이 완전 속아 넘어갔죠.’
‘해외 유명 디자인 스쿨 출신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었고 그가 했던 디자인도 전부 외국의 소호 상점 베껴 짜깁기한 것들이더라구요.’
‘그런데도 속아 넘어간 우리가 잘못이죠. 아니, 그거 속아서 그 회사 비싼 값에 인수한 대기업이 더 대박이었죠.’
경우는 모든 기억을 떠올렸다. 패션이 관심이라고는 눈곱 만큼도 없던 그가 썸 어패럴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 취재 차 인터뷰했던 디자이너가 씹어 대던 곳이라 잊을 수 없었던 거다.
새명패션이 썸 어패럴을 거액의 돈을 들여 인수를 한 1년 뒤, 해외에 수출하던 새명패션의 옷을 보고 해외 소호 디자이너가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의 디자인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그 후 썸 어패럴의 대표였던 한승진의 이력이 모두 다 거짓임이 밝혀지고 구속까지 되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썸 어패럴은 인수했던 새명패션은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입어야 했다.
잠시나마 매출 상승의 흐름을 탔지만 곧 곤두박질. 주가가 큰 폭으로 떨어져 지선의 입지는 결국 좁아지고 말았다.
아직 경우에겐 다른 가족에 비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선이 필요했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썸 어패럴 인수가 잘못돼 지선이 민 회장의 신뢰에서 멀어진다면 자신의 앞날도 먹구름이 낄 거라 생각한 경우는 이 건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누나, 절대 썸 어패럴은 아니야. 인수하면 큰일 나.”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디서 들은 게 있어. 한승진 대표 디자인 스쿨 졸업, 그거 다 가짜야. 허위 학력이라고!”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이러는 건데?”
“썸 어패럴에서 한 모든 디자인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한승진 대표가 한 디자인은 전부 표절이라는 소리가 있어. 외국에 유명하지 않은 디자인을 베낀 거라고.”
“출처가 정확히 어디야?”
“말할 수 없어. 하지만 누나의 정보력이면 금방 찾아낼 수 있잖아. 눈앞의 이익만 보고 달려들지 말고 제발 잘 알아보고 해.”
지선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사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정 그렇게 관심이 생기면 내일부터 출근을 하든가.”
“누나, 정말 누나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누나 알잖아. 나한테 지금 누나가 필요한 거. 제발 후회할 짓 하지 말고 잘 알아봐. 응?”
마지막까지 매달리는 경우를 내버려 두고 집 밖으로 나왔다.
강철이 서둘러 따라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괜히 지선의 눈치를 보던 강철은 경우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회사 일에는 영 관심이 없더니 그게 아니었나 싶을 뿐이었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 나누는 대화도 없이 침묵에 쌓인 잠시 잠깐의 시간이 강철은 길게만 느껴졌다. 어서 아래층으로 도착하길 바라며 떨어지는 숫자를 보던 그때 지선이 입을 열었다.
“강철아.”
지선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자 강철이 곧장 머리를 숙였다. 이건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가 아닌 동생 친구에게 누나로서 하는 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네, 누님.”
“혹시 저번에 교통사고…… 경우 많이 다친 거였니?”
“네?”
“아니 그렇잖아. 사지 멀쩡하길래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는데 다친 거였어? 검사는 제대로 받았니?”
“그게…….”
“안 받았으면 이번 기회에 정밀 검사 받으라고 해. 그 녀석, 병원이라면 학을 떼겠지만 아무래도 어디가 단단히 탈이 난 것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강철이 네가 옆에 붙어 있어. 뭘 하는지 뭘 먹는지 누굴 만나는지 네 눈으로 확인하고 나한테 직접 보고해.”
“……네.”
“그럼 난 갈 테니까 넌 올라가. 나올 거 없어.”
출구 앞엔 이미 박 실장이 대기 중이었다. 나오지 말라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지선이 탄 차가 떠나자 강철은 한숨을 푹 쉬었다.
“봄바람이 불다가도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매일 보라고? 후우, 경우 쟤는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강철이 투덜거리던 그 시각, 지선은 박 실장에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한승진 대표, 자세히 좀 알아봐요. 털어 낼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혹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대표님?”
“좀 신경 쓰일 만한 말을 들어서요. 디자인을 표절한 걸 수도 있다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자세히. 그리고 한승진 대표와 최 상무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도 알아봐요.”
“네, 알겠습니다.”
돌아보니 회사를 인수하는 문제가 그렇게 가벼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어쩐지 홀린 듯 일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민 회장이 자신에게 기대감을 드러내지 않은 까닭에 뚜렷한 성과를 보여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다 최 상무.
주신 그룹이 잘나가는 인터넷 쇼핑몰을 인수하고 매출이 상승했다며, 새명패션도 빠져나가는 젊은 층을 겨냥한 새로운 브랜드를 내세워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 과정에서 썸 어패럴이 등장했던 거고.
한 걸음 물러서서 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약 경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을 상대로 엄청난 장난질을 하려 한 거라면, 한승진은 물론이고 최 상무도 고이 보내 주진 않을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지선은 자신의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살짝 넘겼다.
빼곡하게 늘어선 글자의 나열. 이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우가 썼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동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꿈을 향해 더 나아가고 있는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