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1화 (11/250)
  • #11. 기회는 만드는 자의 것 (4)

    아침 일찍 출근한 동권은 다짜고짜 보이는 대로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김은기 PD 어디 갔나? 아직 출근 안 한 건가?”

    “글쎄요,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찾으면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제법 심각한 분위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야, 무슨 일이래?”

    “몰라, 김 PD 무슨 사고 쳤냐?”

    “얼른 전화해 봐. 아직 출근 안 했을 테니까.”

    혹시라도 잘못한 게 있을까 봐 적당히 둘러댄 동료들을 보며 청모는 재빨리 전화를 돌렸다.

    “선배 어디에요? 얼른 들어와요!”.

    * * *

    국장실의 문을 닫고 나온 은기의 표정은 꽤 가라앉아 있었다. 궁금함에 손이 근질거렸지만 아무도 은기의 곁에 다가가지 못했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 온 동료들은 그의 표정만 봐도 지금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뭔 일이 있기는 있구나.

    저건 은기가 빡쳤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저럴 때 잘못 건드렸다가는 은기가 화를 내는 진기한 모습을 보게 될 게 분명했다.

    다들 눈치만 보는 사이, 그나마 은기와 가깝게 지내는 청모를 향해 무언의 압박이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어서 알아내라고.

    할 수 없이 총대를 맨 청모가 앉은 채로 바퀴를 굴려 은기 옆으로 다가갔다.

    “저기, 선-.”

    하지만 청모가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길게 한숨을 내쉰 은기가 그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도대체 뭔데 저래?”

    웅성대는 동료들을 뒤로한 채 청모는 재빨리 은기의 뒤를 따랐다. 보나 마나 뻔했다. 담배 생각이 간절하겠지만 끊었으니 뭐라도 씹고 있을 게 분명했다. 청모는 일단 편의점으로 향했다.

    역시 간식거리를 고르고 있는 은기의 모습이 금방 눈에 띄었다.

    “그렇게 단 거 먹으면 당 올라요. 운동 안하고 먹기만 하니 배가 나오죠.”

    “오냐오냐 해 줬더니 지금 위아래도 없지? 맞짱 한번 뜰까?”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가만히 쳐도 한 방에 나가 떨어지게 생겼구만.”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원래 제가 입만 산 놈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잠시 후 그들은 장소를 옮겨 대화를 이어 나갔다.

    “국장님이 왜 부르신 거예요?”

    “너, 내가 왜 다른 거 다 놔두고 방송국에 들어왔는지 아냐?”

    “좋은 드라마 만들고 싶어서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것도 있지만 이 바닥은 다른 것들하고 달리 오로지 실력이라고 생각했거든. 제아무리 학벌 좋고 집안 좋고, 그렇다고 해도 결국 실력이 없으면 나가리가 되는 거고 실력이 있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했다.”

    “냉정한 세계니까요.”

    “현석이 그 새끼가 그 지랄을 떨어도 그놈이 아예 맹탕이라고는 생각 안 해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에이, 그건 좀 아니다.”

    “어째 말이 좀 짧다?”

    “죄송합니다.”

    “어쨌든 난 나만의 철칙 같은 게 있다. 그런데 국장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장이 나한테 낙하산을 꽂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낙하산이요?”

    “그래, 공모전 당선이 된 것도 아니고 보조 작가 경력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쌩 초짜 대본을 들이미는데, 와아 씨!”

    “국장이요? 직접 그렇게 말해요?”

    “뭐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지만 뉘앙스라는 게 있잖아. 꼭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냐?”

    “그건 그렇죠.”

    “근데 더 화가 나는 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질 처지가 내가 못 된다는 거야. 솔직히 그게 더…… 치사해.”

    가뜩이나 황현석한테도 밀리는 신세. 청모는 누구보다 은기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어쩌겠어요. 남의 돈 벌어먹기가 그렇게 쉽나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죠. 근데 국장님 그렇게 안 봤더니 사람 참…….”

    “국장도 별수 있겠냐? 여기저기 봐야 할 눈치가 많으니 결국 만만한 나한테 그러는 거겠지.”

    “선배가 만만하긴 어딜 만만해요. 비주얼은 완전 원탑 깍두기…….”

    “이씨, 넌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와?”

    “헤헤, 죄송합니다.”

    “됐다. 그래 네가 뭔 죄냐. 이게 다 민경운지 나발인지 그놈 때문이지.”

    청모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름이 갑자기 은기 입에서 튀어나오니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예? 누구요? 설마 민경우라고 하신 건 아니죠?”

    “뭐야? 너 그 새끼 알아?”

    놀란 청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짜 민경우예요? 민경우? 확실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은기가 두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 * *

    사무실엔 자기 볼일 보기에 바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은 은기가 메일을 클릭하는데 옆에서 청모의 소리가 다급했다.

    “아, 얼른요. 빨리!”

    “알았어. 재촉하지 마.”

    몇 번의 클릭이 이어지고 프린터에서 대본이 인쇄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한 청모가 바로 다가가 대본이 나오는 대로 집어 읽기 시작했다.

    <셀룰러 메모리>

    먼젓번 경우가 준 대본과는 다른 제목이었다.

    주변에 소리가 모조리 차단된 듯 청모는 집중해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은 은기가 힐끔 대본을 보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청모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청모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영문을 알지 못한 은기가 청모를 쿡쿡 찌르자 청모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더니 자신의 책상 서랍에 넣어둔 책 한 권을 꺼내 왔다. 은기에게 내밀자 그가 얼결에 받았다.

    “선배는 일단 남 의심부터 하는 버릇 좀 고쳐요.”

    “야, 내가 의심 안 하게 생겼냐? 새명인지 뭔지 거기 아들이라잖아.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몬드수저가 날로 먹겠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어?”

    “새, 새명이요? 하나, 둘, 셋 아니고 새명 그룹 할 때 그 새명? 민경우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면접 때 경우가 했던 말에 누구보다 공감했던 청모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긴 뭐가 없어? 국장이 대놓고 그렇게 말했는데. 어쨌거나 이건 뭐냐?”

    <열 두 번째 밤>

    영문을 모르겠단 은기에게 청모가 다그쳤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국장님이 그 대본을 맡으라고 했어요? 제작 바로 들어갈 거래요?”

    “그, 그건 아니고…….”

    “아, 그럼 뭐예요? 낙하산인지 뭔지 따지기보다 일단 대본을 봐야 실력이 없으면 그 뒤에 까도 되잖아요. 국장님은 그래도 선배한테 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구만.”

    “그래? 그렇게 보여?”

    “원래 이런 일은 믿는 사람한테만 말하는 거예요. 선배 말마따나 낙하산인데 동네방네 소문 낼 거 뭐 있어요?”

    믿는 사람이라는 말에 만족한 듯 은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청모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놓고 참 좋단다.

    “제가 볼 때 선배는 국장님한테 세 번은 절해야 해요!”

    “뭘, 그렇게까지…….”

    투덜대면서도 은기는 아까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던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은기가 자신도 모르게 대본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간 사이, 청모의 머릿속은 조금 복잡해지고 있었다.

    면접 때 했던 그 말은 뭐지?

    단순히 합격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던 건가?

    그런데 그냥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재벌집 아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대본에 집중한 은기의 모습에 다른 생각은 일단 미뤄 두기로 했다.

    그가 누구네 집 아들인지보다는 그가 가진 능력이 더 중요했다. 지금껏 그가 본 두 편의 미니 시리즈 대본, 바로 제작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작품들이었다.

    그것은 민경우라는 사람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증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배경 탓에 거부부터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 * *

    마지막 장을 덮은 은기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야, 이, 이거 뭐냐?”

    “어때요?”

    “어떠냐니. 넌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지금 제작해도 나쁘지 않아. 아니, 캐스팅만 잘되면 충분히 기대작으로 손꼽힐 정도야. 이놈 누구냐?”

    “저도 자세히는 모르고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어요.”

    “아카데미? 아카데미 출신이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드라마 작가 대부분이 다 그쪽 출신이잖아.”

    “그렇긴 한데 이놈 저랑 같이 면접 봤던 놈이에요.”

    “뭐?”

    “면접 보던 날 감평해 줄 사람 없다며 저한테 봐 달라고 하더니 수업 때 이걸 들이밀더라고요. 선배가 더 잘 알잖아요. 공모전 당선자도 아니고 보조 작가 경력도 없는 쌩판 초짜라고.”

    “그야 그렇게 듣긴 했으니까…… 야, 혹시 이거 전직 작간데 사고 쳐서 필명 갈고 다시 나온 뭐 그런 거 아니냐?”

    “새명 아들이라면서요? 우리가 알기론 새명은 물론이고 재벌 아들이 작가로 활동한 적은 없지 않아요?”

    “그렇긴 하지. 그럼 이놈 혹시 유령 작가 들여놓고 자기가 쓴 거라고 우기고 그러는 거 아냐?”

    “뭘 또 그렇게까지. 재벌집 아들이 뭐 하러요?”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야. 또 혹시 아냐? 이런 이상한 짓거리 할 싸이코 같은 놈일 수도 있고 뭐…….”

    “그럼 직접 만나 확인하면 되겠네요.”

    “응?”

    의미심장하게 웃는 청모의 얼굴에 어쩐지 은기는 한기가 드는 것 같았다.

    * * *

    허리를 바짝 세우고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던 강철은 자신을 바라보는 지선의 눈빛에 침을 꼴깍 삼켰다. 꼭 호랑이 앞에 선 토끼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경우는 지금 뭐 하고 지내?”

    “집에 틀어박혀…… 글을 씁니다.”

    “뭐? 경우가?”

    “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답니다.”

    “갑자기 웬 드라마 작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도 처음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진짜 같습니다. 요즘 외출도 통 안하고 늘 집에서 글만 쓰거든요. 얼마 전에는 아카데미까지 등록했습니다.”

    “아카데미? 그건 뭔데?”

    “드라마 작가를 육성하는 교육 기관 같은 건데 아무튼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들이 거기 출신이라고 보면 됩니다.”

    동생이 어떤 놈인지 누나인 지선이 모를 리 없었다.

    경우는 넓은 집 안에서도 답답하다며 자꾸 밖으로 나돌았다. 정신 병원에 갇혔던 후유증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집안에 그것도 좁은 오피스텔이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게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앞장 서.”

    “지, 지금 가시게요?”

    “원래 시찰은 급습으로 해야 하는 거야. 김대리, 휴대폰 꺼 두는 게 좋을 거야. 연락하는 거 들켰다가는 알지?”

    씩 웃는 모습에 강철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 버렸다. 한동안 잠자코 집에만 있었으니 굳이 연락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각 경우는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반가워요. 나 김은기라고 합니다.”

    마주 내민 손을 잡는 순간 자신의 손을 꽉 잡는 은기의 악력에 경우는 손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청모의 연락을 받고 나간 자리엔 청모 외에도 꼭 산적같이 생긴 남자 하나가 경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며칠 깎지 않았는지 삐죽삐죽 돋아난 수염이 마치 드라마 속 산적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외모에 위축될 법도 했건만 경우는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청모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은기는 함께 일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연출자였다.

    외모와 달리 인망이 두터운 그와 한번 일해 보고 싶었던 경우는 그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 생각지도 못했다.

    “저기, 경우야…… 사실은 말이야.”

    잠시 머뭇거리던 청모가 마침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경우였지만 전혀 몰랐다는 듯 놀라워했다.

    “MBS요? 아니 왜 PD님이 드라마 아카데미에 다녀요?”

    “그건 뭐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

    대충 얼버무리는 청모의 말에 경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건 그 건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고 말이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죠?”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은기가 끼어들며 물었다.

    “김동권 국장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경우는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할 것 같았다. 이 자리를 주선한 게 청모인 줄 알았건만 동권에게 보낸 대본이 결국 이들에게 흘러간 거라 일이 더욱 빨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떻게든 목적지에 닿으면 그만인 것을.

    “저희 삼촌 친구분이신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건지…….”

    “무례한 질문 하나 더 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이 대본 그쪽이 쓴 거 맞아요?”

    그가 내민 건 청모와 동권에게 줬던 각기 다른 미니 시리즈의 대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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