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0화 (10/250)
  • #10. 기회는 만드는 자의 것 (3)

    하루 종일 대본을 들여다본 박종연은 안경을 벗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아, 이 짓도 못 하겠다. 눈알이 빠지겠어.”

    “커피 줄까?”

    “겨우 커피로 되겠냐?”

    “알았어. 내가 거하게 한잔 살게. 됐지?”

    “하여간 나처럼 고급 인력을 이렇게 부려먹는 너도 참 너다.”

    “슬럼프에 빠졌다고 하소연한 사람이 누구더라?”

    “슬럼프라니. 그냥 조금…… 시놉이 안 풀린다고 했지.”

    “엎어치나 매치나.”

    “그렇다고 기회다 싶어 대본 들이민 건 반칙이지.”

    “그럼 거절하지 그랬어. 싫다는 사람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 아니다, 나.”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렇게 도울 일 있으면 돕고 그러는 거지.”

    “허이구, 좋다고 와 놓고는 이제 와 딴소리지.”

    하여간 곧 죽어도 그놈의 자존심. 호기심에 제 발로 와 놓고는 딴소리 하는 종연을 보며 기숙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박종연,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세계 3대 영화제를 모두 섭렵한 자타 공인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영화감독이었으니.

    역시나 영화감독을 꿈꿨던 기숙은 학교에서 그를 만나고 처음으로 좌절했다. 신이 모든 재능을 박종연이라는 한 인간에게 몰빵한 탓이었다. 결국 그녀는 영화를 포기하고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전화위복이 되었고, 드라마계에서 알아주는 작가가 된 그녀는 협회의 강력한 추천으로 드라마 아카데미의 최연소 원장을 맡는 중이었다.

    “눈치 보지 말고 내키는 대로 실컷 해. 그래도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끌어 가는 대 감독님이신데 우리 애들 작품 좀 물어뜯었다고 척을 지겠냐, 원수가 되겠냐?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다.”

    아카데미에선 매 학기마다 자체 공모전을 열었다. 최종심 심사만을 남겨 놓은 상황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종연이 작품이 잘 풀리지 않는다며 푸념 어린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기숙은 기회다 싶어 그에게 최종심까지 오른 대본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한 참이었다.

    드라마 작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있었지만 기숙은 드라마 작가의 눈이 아닌 영화감독으로서, 또 그녀가 인정한 천재로서 그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뭐 그렇다면 사양 않겠어.”

    허리를 바로 세우는 종연의 모습에 기숙은 살짝 긴장이 됐다. 그리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쏟아질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석이야. 기승전결 잘 뽑혔고, 떡밥도 착실히 회수되고 기대감 살리고. 신인치고는 나름 괜찮아.”

    “그런데?”

    “그래서 그런지 좀 뻔해.”

    “뻔하다고?”

    “응. 패턴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모험을 전혀 시도하지 않아. 그게 위험하다는 걸 잘 아는 거지. 한 사람이 썼다고 생각할 정도로 클리셰가 비슷해. 솔직히 드라마만 봐도 알겠어. 아카데미 출신인지 아닌지 말이야.”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한 신랄한 평가는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드라마 작가 협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드라마 아카데미는 어느 정도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드라마 한 번도 집필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수진으로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문제의 시작은 이전 원장이었다.

    협회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이성적이기보다는 정에 이끌리는 편이었다. 당연히 주변 작가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인기 작가의 고료가 웬만한 직장인들 연봉을 웃돈다는 기사가 많이 나오지만 편성조차 받지 못해 생계를 위협 받는 작가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전 원장은 그런 작가들을 걱정해 아카데미 강사진으로 채용했던 거였다. 적어도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해.

    그렇게 드라마를 집필하지 않은 작가들이 강사진이 되고 계속 비슷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아카데미 본연의 목적보단 작가들 밥그릇 챙겨 주는 소모품으로 전락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기숙은 그런 아카데미의 운영 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이전 원장을 내치고 자신을 이 자리에 앉힌 이들의 뜻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건질 건 하나 없어?”

    “딱 하나. 이거 나름 괜찮네.”

    박종연이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대본 하나를 내밀었다.

    “시체가 나타났다?”

    “응. 완전 골 때려. 뭐랄까, 제대로 B급 감성을 건드렸다고 해야 하나? 물론 점잖으신 분들 취향엔 좀 안 맞겠지만.”

    오랜만에 재기 발랄한 작품을 본 종연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기숙에게는 별거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는 나름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연이은 영화의 성공,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은 그를 거장 반열에 올려 놓았고 그에게 상상할 수 없는 부담감을 안겨 주었다.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 흥행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몇 달 동안 쓰고 지운 작품만 수도 없었다. 이대로 차기작을 쓰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그를 매일 공포로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기숙의 제안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오늘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잊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영화를 만들려는 이유.

    뛰어난 작품, 흥행이 되는 작품이 아닌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는 사실을 종연은 다시금 깨달았다.

    거기다 익숙한 작가의 이름까지.

    ‘민경우라……. 설마, 아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종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그만 갈란다.”

    “가긴 어딜 가? 한잔해야지.”

    “미안하지만 다음으로 미루자. 나 오늘 선약이 있어.”

    “누구랑? 누군데 천하의 박종연이 술을 마다해?”

    “참, 너도 아는 사람이야. 동권 선배 만나기로 했거든. 같이 가자.”

    “동…… 설마 MBS 김동권?”

    “응.”

    “야, 싫어. 너나 만나.”

    “왜? 아, 맞다. 그래, 너 동권 선배랑 같이 드라마 했지? 풋, 그때 많이 싸웠다고 듣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다, 야.”

    “싫어? 아니, 저주해 그 인간. 내 대본을 찢어발기던 걸 생각하면……. 근데 그 인간을 왜 만나는데?”

    “글쎄,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해서 말이야. 별일이야 있겠어? 오랜만에 회포라도 풀자는 거겠지. 진짜 안 가?”

    기숙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였다.

    “됐다. 그 인간이랑 마주하고 밥을 먹느니 고깃집 가서 4인용 식탁 차지하고 혼자 먹는 게 낫지.”

    결국 기숙과의 술자리는 다음으로 미루고 종연은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막 원장실을 나오던 그의 눈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한 남자가 지나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설마 경우?”

    조금 전 대본에 쓰인 이름을 보기는 했지만 정말 이곳에서 민경우를 보게 될 줄 종연은 상상도 못했다.

    분명 이전에 봤을 땐 삐딱한 시선에 망나니 분위기가 물씬 났었는데 그런 게 싹 빠지고 제법 단정해 보였다.

    “박 감독님!”

    “박 감독님은 무슨. 그냥 삼촌이라고 불러. 삼촌 친구면 삼촌이지.”

    “그럼 그래도 될까요, 삼촌?”

    “어쭈, 못 보던 새에 넉살이 늘었다. 하긴, 이게 얼마 만이야? 아니다, 이럴 게 아니라 너 시간 괜찮아?”

    괜찮아야 했다. 없다면 시간을 만들기라도 해서 그의 뒤를 따라야 했다.

    경우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다시 얻을 수 없는 기회라고.

    * * *

    “세상에, 재필이 조카가 벌써 이렇게 컸단 말이야?”

    박종연을 따라 간 횟집에서 경우는 MBS 드라마국 국장인 김동권과 만나 악수를 나눴다.

    이전 삶에선 마주 볼 기회조차 없었던 하늘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묘했다.

    그러니까 이들과 경우의 접점은 바로 외삼촌 윤재필이었다.

    “그나저나 재필인 요즘 어떻게 지내?”

    “삼촌이야 늘 그렇죠.”

    “얼굴 못 본 지 꽤 됐다. 사장 되더니 연락 딱 끊고 변했어, 그놈.”

    “회사 일이 바쁘셔서 그럴 거예요. 큰삼촌 눈치도 봐야 하고 그러니까요.”

    “그래도 혈육이라고 챙기네. 걱정 마라. 그런 걸로 맘 상하진 않아.”

    “솔직히 그놈이 우리랑 왜 어울렸는데. 예술엔 쥐뿔도 관심 없는 놈이 연극 동아리 든 것부터 수상쩍었다고. 안 그렇습니까?”

    “그랬지. 원래 학교 다닐 땐 소원했잖아. 근데 나 방송사 취직하고 너 조연출 달고 그러면서 부쩍 붙어 다녔지. 그놈 우리랑 같이 다니면 여배우들이랑 놀 줄 알고 그랬다는 거 우리가 모를 줄 알고.”

    “아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재필이 덕에 공짜로 비싼 술 많이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때 참 재밌었어. 이제 나이 들어서 그렇게 밤새 마시기도 힘들어.”

    “세월에 장사가 어딨습니까. 이놈 보십쇼. 그 옛날엔 눈에 독기만 있더니 지금은 순해지지 않았습니까.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요.”

    그러니까 민경우가 고교 시절 정신 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 자해를 하는 등 애가 점점 이상하게 변해 가니 그의 어머니 윤정숙은 그를 외갓집으로 보내 버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그를 측은하게 여긴 게 외삼촌 윤재필.

    별생각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유흥 활동에 조카를 대동하고 다녔던 것이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회포를 풀 겸 술잔을 주고받으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써? 작가 하려고? 아니 왜?”

    의외라는 김동권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긴 누가 재벌집 아들이 드라마를 쓰겠다고 생각하겠나. 드라마 제작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경우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의 오랜 꿈이었으니까.

    “이놈, 제법 쓰더라구요.”

    “보셨어요?”

    “응, 아카데미 공모전에 냈던 작품. 그거 너지? 너한테 그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박종연이 자신의 작품을 봤다는 말에 경우는 부끄러운 한편,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작가로서 싹수가 보여?”

    종연은 대답 대신 미소로 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의외라 느낀 건 동권이었다.

    사실 종연은 일에 있어서 냉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가차 없이 아니라 말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경우는 의아할 뿐이었다.

    “당선 각 나오냐?”

    “그건 아닐걸요. 작가님들은 제 작품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실 거예요.”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대답에 놀란 건 의외로 종연이었다.

    “왜?”

    “당선을 노리고 쓴 게 아니니까요. 당선권을 노리면 솔직히 소재가 너무 뻔해지잖아요. 전 메시지보다는 조금 색다른 소재, 색다른 재미만 생각했거든요.”

    단막극은 연속극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1회로 끝나는 짧은 이야기였기에 연속극에서 할 수 없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고 영화 같은 영상미를 보여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날 이야기.

    최근 단막극은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다. 시청률이 높지 않으니 광고가 붙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제 단막극은 신인 작가를 뽑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지망생들은 이 등용문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을 돋보이게 할 분명한 메시지를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 탓에 강박증에 사로잡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 속 메시지에 더욱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단막극에 주로 나오는 소재는 뉴스에 한 번쯤은 나왔던 사회 문제들이 대다수였다.

    고령화, 취업, 비혼…….

    응모작 중 취준생 주인공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율이 70퍼센트 정도나 되었다.

    오죽했으면 제발 공모전에 치매 노인을 중심으로 한 가족 이야기, 가정 주부의 제2의 인생 찾기, 노처녀는 쓰지 말라고 금기 사항까지 만들어졌겠는가.

    종연은 어쩐지 경우가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걸 알고 의도한 듯한 태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다는 교육생이 심사위원인 기성 작가들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혹시 그것 말고 다른 작품 있어?”

    “미니 시리즈 몇 편 써 놓은 건 있어요.”

    “미니 시리즈? 보고 싶네.”

    “나한테 보내 줄 수 있겠냐?”

    갑작스런 동권의 말에 그를 잠시 보던 경우가 살짝 미소를 지으면 말했다.

    “당연하죠.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참고로 저 저작권 등록도 했습니다.”

    “뭐? 하하하. 아무렴 내가 친구 조카 꺼 뺏어 가는 그런 파렴치한일라구.”

    “친구 조카라서가 아니라 이 녀석 뒤에 있을 새명 법무팀이 무서운 건 아니고요?”

    “이 친구 참, 하하하.”

    오가는 웃음 속에 경우는 새명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파렴치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은석은 그 흔한 백이 없었으니 먹잇감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경우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종연이 물었다.

    “근데 선배, 오늘은 어쩐 일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응? 별거 있겠어. 그냥……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는 거지. 글은 어때?”

    “좀 쉬다 보면 나오겠죠.”

    “그래, 그렇지……. 근데 이 작가가 만난다고 하더니 왜 같이 안 왔어?”

    “이 작가 선배라면 이를 갈던걸요?”

    “하여간 속 좁은 건 여전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그렇게 꽁해 있어?”

    그렇게 동권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애초 종연을 만나자고 한 건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가능성이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으니 뭐든 해 봐야겠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동권은 새로운 생각들로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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