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기회는 만드는 자의 것 (2)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후 사람들은 오래된 어떤 이론에 주목했다.
일명 하인리히 법칙.
큰 재해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전에 사소한 사고 등의 징후가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이론이었다.
그날 아침 어쩌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징후가 보였을지도 모른다.
전날 촬영 일정이 오늘 새벽까지 이어진 일이라든지 그래서 제작부와 촬영부 사이가 삐걱거렸다든지……. 그 탓에 애먼 스턴트팀이 눈치를 봐야 했다는 것도.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베테랑 스턴트맨 하나가 저조한 컨디션을 보였다는 거였다. 연일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이 문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많은 징후들을 촉박한 촬영 일자와 바쁜 스케줄 탓에 그냥 별거 아닌 것으로 넘겨 버렸다.
“자, 씬 38. 도망치던 창수가 옥상을 넘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넘다 지혜를 만나는 씬입니다. 리허설 먼저 갑시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액션 씬이었다. 창수 역을 맡은 재현은 하네스를 입고 와이어를 고정했다. 옆에서 줄을 잡아당기자 재현의 몸이 붕 떠올랐다. 과거에 비해 장비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더 자연스러운 동작을 위해선 때론 직접 사람의 손으로 와이어를 당기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더 좋은 장면을 담고자 했던 감독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때?”
“좀 쪼이긴 한데, 괜찮아요.”
“이거 일일이 스턴트팀이 다 손으로 잡아당겨서 하는 거야. 합이 잘 맞아야 하니까 긴장해.”
“네. 걱정 마십쇼.”
액션엔 익숙했지만 와이어는 처음이었던 재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해 왔던 것처럼 이 씬도 문제없이 해낼 거라 자신했다.
180이 넘는 훤칠한 키에 몸무게도 어느 정도 나가는 재현이었기에 와이어를 잡아당겨야 하는 스턴트팀과의 합이 맞아야 했다. 몇 번 연습을 마친 후 본격적인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약 2층 높이의 차이가 나는 건물 위에서 도망치듯 뛰어내린 남자 주인공과 부딪치게 된 여자 주인공.
하늘에서 내려온 남자 주인공을 보며 첫눈에 반하게 되는 씬이었다.
그런데…….
“으악!”
서로의 합이 맞지 않았던 탓에 와이어를 잡아당기던 스턴트팀의 손이 미끄러져 버렸다. 나머지 팀원들이 줄을 단단히 잡았지만 저조한 컨디션 탓이었는지 불운한 탓이었는지 재현의 추락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던 선영.
선영은 빠르게 떨어지는 재현을 보고 놀라 피할 새도 없이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야, 119 불러. 119!”
추락하던 재현은 움직이지 못하는 선영을 보고 피하려 했지만 두 사람이 충돌하는 일 자체는 막을 수 없었다. 재현은 선영을 안은 채 바닥을 굴렀다.
원 테이크로 가겠다며 하필 리허설 때까진 있던 매트까지 치워 버린 상황이었다.
곧 도착한 구급차에 두 사람이 실려 병원으로 향했지만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심각한 사태에 스탭들은 현장을 정리하며 수군거리기에 바빴다.
“야,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몰라. 병원 갔으니까 결과 나와 봐야 아는 거지?”
“한 일주일 입원하고 다시 재개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겠어?”
“앞으로도 액션 씬 상당한데……. 이러다 드라마 막 내리는 거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그게 그렇게 쉽냐?”
그보다 더한 일도 있었지만 드라마는 어떻게든 방송됐다. 이번 일도 그렇게 해결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안전 점검을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소식을 들은 국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만에 하나 생겨날 불상사에 모든 이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들은 A팀의 조연출인 세진이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긴급 회의가 진행했다.
“어떻게 됐어?”
“선영 씨는 경추와 요추에 타박상을 입긴 했는데 2주일 정도 입원하면 된다고 합니다.”
“2주? 일단 선영 씨 나오는 씬 빼고 나머지 씬 찍어야지 별수 없겠네.”
국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세진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재현 씨 상태가 심각합니다. 허리와 발목에 부상을 당해서 수술을 해야 한답니다.”
“수, 수술?”
수술이라면 단 몇 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들 최악의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드라마 중단.
그저 국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다릴 뿐이었다. 일단 회의는 거기서 멈췄다.
청모는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은기를 잡아당겼다.
“왜?”
“선배, 저 좀 잠깐.”
두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구석진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야, 너 뭐냐? 왜 그래? 무섭게.”
“선배. 선배가 볼 땐 이 드라마 어떻게 될 거 같아요. 남녀 주인공 둘이 다 부상인데 교체할 거 같아요, 아니면 중단?”
“무슨 살벌한 소리를 하냐……? 설마 너 드라마 중단되길 바라는 거야?”
갑작스러운 기세에 은기는 주춤거렸지만 일단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입 밖으로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일이었을 뿐.
“아무래도…… 접지 않겠냐? 낌새가 영 그래.”
“사람이 다친 건 정말 안 된 일이긴 한데 솔직히 쌤통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누가 들을 새라 은기는 회의실 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회의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야, 입 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쩔라고.”
“솔직히 이 드라마, 원래 하반기에 기획된 거잖아요. 근데 일정이 갑작스럽게 앞당겨졌고 그 바람에 무리하고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우리까지 차출돼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자기 조카 밀어주려고 밀어붙이다 이 꼴이 난 거잖아요.”
드라마 <사냥개>는 제작 규모가 제법 큰 본격 액션 드라마였다. 애초 하반기에 예정되어 있던 프로젝트였는데 방송사와 제작사 간의 문제로 다른 드라마의 편성이 어그러지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방영 예정인 경쟁사의 드라마가 기대치만 못하다는 소문이 전해졌고, 이 기회를 틈타 대작으로 시청률도 가져오고 자신의 조카에게 그 공을 돌리게 하려는 황성준 CP의 입김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야, 너 좀 흥분한 거 같다. 흥분 가라앉혀.”
“죄송합니다.”
“처음에 봤을 땐 안 이런 녀석이었는데 어쩌다…….”
빡센 일정이 이어지다 보니 아무래도 청모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은기는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지금 발등 앞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으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아무래도 주연 교체가 적당했다. 이미 찍어 놓은 부분도 있으니 주연만 교체돼 그 부분만 찍고 이어 나가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모르지. 적당한 다른 배우를 찾게 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촬영 재개할지도 몰라.”
“그게 그렇게 쉬워요? 캐스팅이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데.”
하지만, 지금 주인공의 커리어를 생각할 때 그만한 급의 배우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거기다 다른 장르도 아닌 액션이었다. 연기력이 되면서 액션이 가능하고 인지도까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의 주연 배우 캐스팅은 1순위였으니 높아진 안목에 맞는 다른 배우를 찾는 건 안 봐도 가시밭길. 배우를 교체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아예 잘 안 되라고 고사라도 지내지 그러냐? 난 네가 이렇게 얼굴 철판 깔고 있는 줄 몰랐다.”
“뭘, 진작 아셨으면서. 어쨌든 이 드라마 접으면 그 후에는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다. 다음 드라마 편성을 당기는 게 가장 좋겠지만 배우들 스케줄에 조율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그게 어디 쉽냐? 당장 제작 가능한 다른 드라마가 있다면 또 모를까…….”
곰곰이 생각하던 은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마 외주에 사전 제작한 드라마가 있긴 할 거야. 그거 편성하지 않겠냐?”
“사전 제작이라…… 그거 아예 버리는 카드 아니에요?”
“버리는 카드라니. 사전 제작은 우리 드라마국의 꿈이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제작할 수 있으면 당연히 좋겠죠. 근데 그렇게 좋다는 거 다 알면서도 못 하는 거, 시청자 반응 때문이잖아요.”
시청률에 민감한 드라마의 특성상 사전 제작은 실시간으로 제작되는 드라마 문제점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모험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었다.
현재 사전 제작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찍어 둔 분량이 많은 것뿐이지 완전한 의미에서 사전 제작은 아니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던 일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굳이 모험을 선택하진 않는다.
덕분에 쪽대본이 난무하고 실시간으로 편집해 거의 생방송이 되는 형편이지만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기에 놓을 수 없는 독사과이기도 했다.
“네 기분 모르는 거 아니지만 현석이 너무 미워하진 마. 당장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바닥에서 적을 만들어 봤자 좋을 거 없어.”
“저도 똥오줌은 가릴 줄 아는 나입니다.”
“그런 놈이 그런 얼굴이야?”
은기의 다그침에 청모는 얼굴을 풀었다. 어쨌든 현석을 생각하면 통쾌한 일이지만 배우들이나 다른 스텝들 입장에선 불행한 일이 맞았으니.
그나저나 이 급박한 와중에 청모는 왠지 모르게 경우의 대본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가 지망생이 아닌 단막이라도 집필한 작가였다면, 드라마국 관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인지도 있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에게 준 그 대본으로도 지금 당장 제작에 들어가 펑크 난 곳을 채울 수 있으련만.
“에이, 그게 가능하겠어?”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애써 생각을 지운 청모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가시죠.”
* * *
경우는 귀를 긁젹였다.
“갑자기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누가 내 이야기하나?”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경우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기사를 살펴봤다.
포털 사이트를 가득 채운 건 재현의 사고 소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지.”
경우는 이전 삶에서 보았던 사건을 떠올렸다.
재현의 부상 소식에 그의 팬덤은 관리를 허술하게 한 방송사와 제작진들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탓에 TV 비평 프로그램에서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드라마 제작 현장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결국 드라마 <사냥개>는 제작 중단이 결정되었고, 그 시간엔 사전 제작된 드라마가 편성돼 1퍼센트도 안 되는 저조한 시청률로 결국 조기 종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악재를 기억해 뒀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경우는 앞날을 미리 알고 있었던 자신이 사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일을 비밀로 하는 청모에게 아는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어찌저찌해서 청모에게 말한다고 해도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란 경우의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미친놈 취급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경우는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어느덧 밖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카데미 스터디 룸이 대본 쓰기 좋아 수업이 없는 날에도 종종 찾았던 경우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곳에서 낯설지 않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설마 경우?”
돌아보니 그곳엔 어디선가 본 듯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경우는 오래된 기억 속 그 남자의 일화를 떠올랐다.
“박 감독님!”
경우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향해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