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8화 (8/250)
  • #08. 기회는 만드는 자의 것 (1)

    민정이 연락을 받고 간 카페에서 만난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마디로 부티가 좔좔 흐르는 남자였다.

    “박민정 씨 되시죠?”

    “네. 그런데 저를 왜……?”

    “고명희 씨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설명들.

    한마디로 고명희가 그녀의 작품을 가로채려 한다는 것.

    박민정은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걸까?

    공모전에 떨어지고 그녀는 절망에 빠졌다.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문턱에서 엎어진 게 벌써 네 번째. 아예 처음부터 그랬다면 모를까 이런 일이 반복되니 자신의 운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받게 된 고명희의 전화는 한 줄기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 꺼림칙한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녀의 설득에 넘어가 버렸다.

    그런데 다시 원점이라니…….

    번듯한 외모와 번지르르한 말솜씨에 그녀는 이 남자가 사기를 치려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이 남자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박민정 씨의 작품입니다. 그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여도 괜찮겠어요? 본인이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자식 같은 작품을 다른 사람한테 보내도 되겠냐 이 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실망감, 현직 작가의 인정, 거기다 더 빠르게 드라마 제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속아 본질을 보지 못했다.

    이 남자가 사기꾼이건 아니건 그건 다른 문제고 명백히 그녀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남자의 말에 박민정은 실수를 바로잡기로 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왜 해 주시는 거예요?”

    “고명희한테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어서요. 박민정 씨와 비슷한 이유로.”

    “아!”

    “내키지 않는 제안을 하나 더 할까 하는데요. 아예 작품을 공개해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고명희가 딴짓 못 하게요.”

    남자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해도 작품을 완전히 공개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망설이던 민정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물론 어려운 문제죠. 그래서 제 제안에 응해 주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드리고 싶은데요.”

    보상이란 말에 민정은 침을 꿀꺽 삼켰다.

    * * *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평생 후회할 짓을 할 뻔했어요. 아무리 절박하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말이죠.”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해요.]

    “이렇게 하면 선생님의 복수가 이뤄지는 건가요?”

    [일단은요. 참, 약속한 대로 스튜디오 글로리에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아직 작품을 카페에 공개하지 않았는데요?”

    [어쨌건 저 때문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셨으니 그 정도는 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주소 보낼 테니까 가 보세요. 신생이기는 해도 앞으로 승승장구할 회사니 걱정 마시구요.]

    “걱정 안 해요. 어휴, 저야 감지덕지죠.”

    [아마 기획 작가부터 시작할 것 같긴 한데 가서 실력을 보여 주세요. 작가님 실력이면 씹어 먹고도 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열심히 좋은 드라마 쓰시면 되죠. 응원하겠습니다.]

    ‘스튜디오 글로리’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신생 제작사였다. 첫 작품이 대박 나지만 똥파리들이 꼬이는 바람에 문제가 생겨 한동안은 제대로 된 제작을 하지 못하고 송사에 얽히고 만다.

    드라마만 생각하고 사업적인 부분엔 미숙했던 터라 벌어진 일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경우는 다른 똥파리들이 끼어들기 전 ‘스튜디오 글로리’에 투자를 하기로 했다. 낙하산 하나를 꽂아 넣는 조건으로.

    어차피 드라마 제작사와 투자자는 뗄 수 없는 관계였으니 낙하산 하나 받아들이는 정도로 투자자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거라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당연히 그 낙하산이 생각보다 실력이 좋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쨌든 박민정은 기쁜 마음으로 ‘스튜디오 글로리’로 향했다. 그 기쁨에 취해 고명희의 명을 받은 시연이 자신의 뒤를 쫓고 있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 * *

    “선생니이이이임-.”

    “뭐야? 뭔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선생님 말씀이 맞았어요. 제가 지금 뭘 보고 온 줄 아세요? 박민정 걔 ‘스튜디오 글로리’로 가더라고요.”

    “뭐? 하!”

    명희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의심이 확신으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어. 순진한 애가 하루아침에 그렇게 돌변할 리가 없지. 꼬드기는 놈들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애가 바람이 잔뜩 들었지. 근데 스튜디오 글로리? 거긴 뭐 하는 데라니?”

    “아, 지난 분기에 대박 난 드라마 <스테이> 제작한 회사 모르세요? 아, 신생이라 모르시나?”

    “내가 그런 조무래기들까지 다 알아야 하니!”

    명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정이 그만둔 배후에 드라마 제작사가 있을 거라고 단단히 오해한 그녀는 범이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하룻강아지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 * *

    “형, 오랜만이네요.”

    아카데미 합격자 발표 후 개강을 시작했지만 청모는 한동안 아카데미에 나오지 못했다. 이제나저제나 청모를 기다렸던 경우는 드디어 만난 그가 무척 반가웠다. 개강을 시작하고도 한 달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래, 아는 얼굴 보니까 반갑다. 같은 반이었는지 몰랐네.”

    “그러게요.”

    청모와 다른 반인 걸 알고 같은 반이 되기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수업 시간을 바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이 방송국 PD임을 아직 밝히지 않은 탓이었다. 본인이 하지 않는데 먼저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으니.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강읜데 시간 맞추기가 참 어렵네.”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어, 회사에서 새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얼마나 바빴는지 그새 얼굴살이 쏙 빠져 있었다. 경우는 그가 어떤 드라마를 맡은 건지 생각하려 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참, 수업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직 기초적인 것밖에 안 했거든요. 뭐, 기승전결이라든지 그런 다 아는 거. 제가 노트 정리한 거 보여 드릴게요.”

    “고마워. 내가 형이니까 더 챙겨 줬어야 했는데.”

    “공짜 아니에요. 전에 제 부탁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부탁?”

    “제 대본 봐주시기로 한 거요.”

    “아, 맞다. 근데 그거 떨어지면 봐주기로 한 거 아냐?”

    “에이, 이러시기예요? 전 형 오시기만 기다렸는데?”

    “농담이야, 농담.”

    청모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걸 경우는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로, 이거 선물.”

    “뭐야? 설마 너 그새 써 가지고 온 거야?”

    “뭐, 틈나는 대로…….”

    “근데 뭐가 이렇게 많아? 몇 편인데?”

    “사실은 단막극이 아니라 미니 시리즈예요.”

    “미니 시리즈?”

    “네.”

    “너 아카데미는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왜요? 실력도 안 되는 놈이 주제도 모르고 장편 쓸까 봐요?”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도…….”

    하긴, 이제 막 드라마를 배우기 시작한 초짜가 미니 시리즈를 썼다면 누구라도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경우는 초짜가 아니었다. 치열한 드라마 세계에서 10년을 버텼으니까.

    “시놉도 썼으니까 그것부터 읽어 보세요. 시놉이 아니다 싶으면 대본은 굳이 보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야, 네가 이렇게까지 열정적으로 써 왔는데 안 봐줄 순 없지. 근데 내가 바빠서 빨리는 못 볼 수 있거든.”

    “네, 전 형한테 줬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시원시원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청모가 경우의 대본을 가방에 챙겼다.

    “부럽네. 난 사는 거에 지쳐서 하루 생활하기도 버거워. 아카데미 괜히 등록했다고 생각하는 중이거든.”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일 하면서 공부하기가 어디 쉬운가요.”

    “나보다 어린 게 이해심도 많아.”

    지금은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질 거란 어쭙잖은 위로는 건네지 않았다. 뭘 해도 어떻게 해도 직장 생활, 사회 생활은 힘겨운 거였으니. 그저 묵묵히 버텨 낼 걸 알기에 경우는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카페를 찾은 청모는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가뜩이나 바쁜 일정, 시간에 쫓기는 중인데 여기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유난을 떠는 배우 탓이었다.

    “저 혼자 와도 되는데요.”

    연출팀 막내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도 못 들고 있었다. 안 그런 사람이 더 많았지만 스탭을 제 하인 부리듯 생각하는 배우들도 더러 있었다. 보고 있자니 속이 더 뒤집어질 것 같아 따라 나온 거였는데 오해를 한 막내의 머리를 청모가 장난스레 헝클었다.

    “아니야, 답답해서 내가 온다고 한 거야. 이왕 온 거 목이나 축이자. 뭐 마실래?”

    그렇게 두 사람이 음료를 고르는 그때, 공교롭게도 그곳엔 지선이 경음 그룹의 둘째 황석제와 선을 보는 중이었다.

    그놈의 지분이 뭐라고.

    저따위 머저리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불쾌했던 지선은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얼음을 으드득 으드득 씹고 있었다.

    “표정 풀어. 나라고 뭐 좋아서 나온 줄 알아?”

    “그럼 다행이네. 쫑 내자. 서로 얼굴 보는 거 불편하잖아.”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마음이 바뀌었어. 그냥 결혼하자.”

    “뭔 개소리야?”

    “어차피 너나 나나 정해진 길이 있잖아. 귀찮게 이 짓을 반복하는 대신 둘이 거래하자고.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나빠. 엄청. 난 너 진짜 싫어하거든.”

    “단박에 오케이 하는 것도 매력 없지. 좋아 튕기는 거 봐줄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정재계 모임에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석제는 지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그런 놈이었다. 지선이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

    “개소리 그만하고 장 회장님께 가서 전해. 드세고 못돼 처먹어서 저런 여자 집으로 들으면 큰일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니까. 그냥 나랑 결혼해. 자꾸 튕겨도 별로다, 너.”

    웃는 면상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지선은 컵을 움켜쥐었지만 커피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음료를 들고 나가려는 한 사람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그의 음료를 낚아채 석제의 얼굴에 확 뿌려 버렸다.

    흠뻑 젖어 어이없어하는 석제를 청모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너 진짜!”

    “어머, 이런 실수. 물론 너 말고 이쪽. 음료는 제가 다시 사 드릴게요.”

    산뜻하게 미소 짓는 지선을 보며 미친 여자라고 생각한 청모는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 그의 뒤를 쫓으며 연출팀 막내가 외쳤다.

    “선배님, 같이 가요. 선배님!”

    * * *

    어깨에 피로 귀신이 매달린 것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으로 들어온 청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빡빡한 스케줄에 잠시도 쉴 새가 없었다. 자연히 오늘 있는 아카데미 수업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렇게 살아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청모는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 집에서 봤던 영화는 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런 재미있고 멋진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를 극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TV에서 해 주는 영화만큼은 마음껏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늦은 시간 방송되는 주말의 극장도 상관없었다.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갈 만큼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청모는 꿈꿨다.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멋진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드라마는 어느 누구나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작가를 더 이해할 수 있는 PD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일이 많으니 일주일에 단 하루 있는 수업에 참여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괜히 신청했나?”

    매일 방송국 숙직실에서 잠을 청하다 며칠 만에 들어온 집에선 드라마고 뭐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어디라도 기대고 싶어 침대에 몸을 던졌는데 등에 무언가 딱딱한 질감이 느껴졌다.

    “이게 뭐지?”

    침대 위 아무렇게나 올려놓았던 건 지난번에 만난 경우가 봐 달라며 준 시놉과 4회분의 대본이었다.

    “아, 그새 까먹었네.”

    어린 녀석이 열심히 하겠다고 제법 노력하는데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직 방송사 드라마국에서 일한다고 말하지도 못했는데 괜히 찔리는 기분이었다.

    “뭐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스스로 위안을 하며 시놉을 보던 중이었다.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내용과 깔끔한 전개에 청모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뭐야? 뭔데 이렇게 잘 써?”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면서 대본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적잖은 사람들이 드라마 공모전에 소설을 써서 보낼 정도로.

    그러니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경우의 대본에 그는 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시작부터 시선을 끄는 전개에 곳곳에 숨겨 놓은 복선, 다음 편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까지…….

    평범한 지망생의 솜씨가 아니었다.

    청모는 피곤도 잊은 채 완전 집중한 채로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괜히 읽었어. 이거 도대체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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