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4)
끼이익, 안청모가 낡은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가자 구석진 곳에 김은기가 앉아 있었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집게를 들고 돼지 껍데기를 뒤집는 모습이 조금은 처량해 보였다.
‘어깨 좀 펴고 다니라니까…….’
하여간 말도 지지리도 안 듣는다며 청모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잽싸게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인상 좀 펴요. 여기 사람들 무서워서 껍데기나 제대로 먹겠어요?”
“가만히 있는 사람 왜 또 시비야?”
“안 어울리게 이러고 있으니까 그러죠. 그러고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선배 처음 봤을 때 방송국 접수하러 온 조폭인 줄 알았잖아요. 하하.”
“하나도 안 웃기거든.”
“근데 입만 열면 청산유수. 선배 아주 유명했잖아요. 순전히 말빨로 뽑힌 거라고요.”
보통 이렇게 말하면 반박을 하면서 티키타카가 이어져야 하건만 어쩐지 은기는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돼지 껍데기만 굽고 있는 모습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이런 데로 다 불러내고?”
“너 지금 당장 맡은 드라마 없지?”
“이제 막 끝났잖아요. 근데 왜요?”
“잘됐네. 그럼 나랑 같이 <사냥개> B팀으로 들어가자.”
“예, 갑자기 이게 무슨……?”
“몇 달 안 남았는데 액션에 CG까지 일정이 촉박한가 보더라고. 급하다고 현석이가 SOS 치더라. 도와줘야지.”
“아, 또 현석 선배예요? 무슨 예술 하시느라 그러시는지…… 하여간 맘에 안 들어.”
빈정이 상한 청모가 쓴 소주를 들이켰다. 그는 현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국 유학파 출신이라나 뭐라나.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영어 엄청 섞어 쓰면서 구도는 이렇고 연출은 어떻고 하며 아는 척, 잘난 척, 오지게도 심한 그를 보면 버터를 한 사발 삼키는 기분이었다.
“안 들어도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 같은 말단이 머리가 어디 있냐? 위에서 하라는데 별수 있냐?”
동기였음에도 황성준 CP의 친척이었던 현석에게 번번이 밀리고 그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으니 무던한 은기도 속이 말이 아니었을 테지. 뭐라 욕해 주려다 청모는 그저 은기의 술잔을 채워 줄 뿐이었다.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은기가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참, 오늘 아카데미 면접이었지? 어땠냐? 너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
“아직 입봉도 안 한 조연출 알아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하여간 선배 때문에 괜히 떨었잖아요.”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하여간 너도 참 별나. 연출이야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우는 거지 굳이 아카데미까지 다닐 필요 뭐 있어?”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왕 거기까지 갔으니 소감 한번 말해 봐. 어때? 싹수가 보이는 얘가 좀 있던?”
“얼굴만 봐도 알면 돗자리 깔고 앉아야죠. 달랑 이름하고 얼굴 본 게 전분데 어떻게 압니까?”
그러다 피식 웃는 청모의 모습에 은기는 의외라 생각했다.
“아닌데, 뭐가 있는데? 뭐야? 뭔데 그래?”
“없습니다. 그런 거.”
그런데 경우가 떠오른 건 왜였을까?
면접을 보기 위해 들어간 강의실, 왜 드라마를 쓰고 싶은지 묻던 어떤 작가의 질문에 대한 경우의 답은 청모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그의 생각과 똑같았다.
‘영화는 부담스러워서요. 영화관에 가는 돈도 어떤 사람들한테는 거금이거든요. 관람객이 천만이 넘었네 어쩌네 해도 아무 때나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드라마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만큼 재미있는 드라마를 쓰고 싶었어요.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시름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재미있는 드라마를요.’
어쩌면 자신을 이해해 줄 동지가 하나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청모는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 * *
늘 화제를 몰고 다니는 막장 드라마의 대모 오연옥 작가.
때로는 너무 억지 같은 대사 한 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희화화되는 처지지만 작가는 모름지기 시청률로 평가되는 법. 그렇다 보니 그녀는 출연하는 배우들보다 늘 화제성에 앞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전설적인 일화가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니…….
공모전에 당선된 신인 작가들이 인턴 생활을 거치듯 오연옥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턴 생활이라고 해 봐야 한 달에 한 번 모여 합평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써 온 단막극을 서로 신랄하게 씹는 게 전부였다. 그 과정을 버텨 내면 6개월의 시간이 더 주어졌고 대부분은 6개월을 채우기도 전에 쫓겨나듯 떠나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합평이 시작되기도 전 오연옥 작가는 성큼성큼 드라마국으로 향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마침내 국장실이 있는 곳을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된 오연옥이라고 합니다.”
“신인 작가가 나한테 무슨 볼일입니까?”
“이것 좀 봐 주셨으면 합니다.”
당돌하게 말하며 거침없이 내민 것은 일일극 대본이었다. 그것도 120부까지 완성된 대본.
신인 작가의 패기에 놀라고 대본이 너무 재미있어서 더 놀랐다는 국장은 곧바로 편성을 약속 했다고 한다.
그게 그 유명한 <봐도 다시 봐도>였다.
파격적인 소재와 맛깔 나는 대사, 짜임새 있는 스토리에 동 시간대 시청률 1위에 빛나는 일일극이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물론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면 오기는 온다.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게 함정일 뿐.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아카데미의 면접장에서 안청모를 만나고 온 날, 경우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 스스로가 기회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라고.
고명희의 유령 작가로 생활한 게 딱 10년이었다. 그사이 은석이 써서 방송된 드라마가 아홉 작품. 고명희의 닦달을 들으며 고치고 고치기를 수차례.
남들은 드라마가 끝나면 다 잊어버린다고들 했지만 경우는 대사 하나까지 모두 다 기억에 남았다.
그러니 그 드라마들을 다시 써 보자고 마음 먹었다. 물론 고명희의 취향은 온전히 뺀 자신만의 작품으로.
그렇게 경우는 며칠 몇 날 밤을 세워 가며 쓰고 또 썼다.
* * *
고명희는 어이가 없어 자꾸만 코웃음이 나왔다. 민정이 처음 자신의 부름에 작업실에 왔을 때만 해도 촌티를 벗지 못한 풋내기였다. 잔뜩 주눅 들어 있었고 그래서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하루아침에 너무 달라졌다고 했지. 그런 수작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이대로 당하진 않을 건데 말이야…….”
한껏 격양된 고명희의 얼굴에 시연은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이었다.
* * *
“잠깐,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니?”
“아니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 내일부터 작업실 출근하지 않겠습니다.”
“갑자기 왜? 혹시 드라마가 제작되지 않을까 봐서 그래? 그럴 걱정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가 아닙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파일 속에 남아 있는 것보단 제작되고 방송돼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게 더 좋겠죠. 하지만 그래도 제가 썼는데 선생님 작품이 되는 게 내키지 않아요.”
“민정아. 넓게 생각해. 현실을 보라고. 공모전에서 당선된 애들? 걔들 중에 드라마 작가로 살아남은 애들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손에 꼽을 정도야. 운 좋게 공모전 당선됐다고 해도 그것조차 방송도 되지 않고 사라진 애들이 대부분이야.”
“…….”
“그냥 내 이름만 달린 거야. 어차피 감독도 제작사도 네가 쓴 거 알아. 이번 작품은 그냥 네 실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그럼 다음에 쓰는 드라마는 제 작품이 되는 건가요?”
“뭐?”
“선생님 이름 달고 세상에 나오는 드라마는 이거 하나뿐이냐구요.”
“다, 당연하지. 그게 걱정이었어? 난 또 뭐라고.”
“그럼 계약서로 써 주세요. 이번 작품은 제 작품이고 선생님께서 고증을 하신 거며 차기작은 제 이름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겠다고 계약서를 써 주시면 하겠습니다.”
민정의 요구에 명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것은 민정이 유령 작가였다는 사실을 못 박아 두는 건데 그렇게 했다 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그녀를 위협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다 민정을 만난 이후 그녀가 구상만 해 놓았다는 시놉시스 중 마음에 들었던 것도 몇 있던 탓이었다. 이번에 잘 넘어가면 다음도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증거물을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민정아. 설마 지금 나 못 믿는 거니? 아니, 어떻게 나한테 계약서를 써 달라고 할 수 있어? 나 솔직히 너무 섭섭하다. 어디 가서 이런 대접 받는 사람 아닌데 내가-.”
“그러니까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죄송해요. 선생님께서 제 작품 알아봐 주시고 연락 주신 거 감사한데요. 제가 좀 이상한 소리를 들었거든요.”
“뭐? 무슨 말?”
“그래도 그동안의 선생님과의 정을 생각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선생님, 지금 슬럼프라면서요.”
“……!”
“저, 여기 오겠다고 한 건요. 공모전에서 떨어진 제 작품, 제작될 수 있다는 것도 있었지만 선생님 작품…… 좋아했거든요. 선생님 밑에 있으면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울먹이는 듯한 민정의 말투에 명희의 얼굴은 더욱 차가워지고 있었다.
“근데?”
“저 여기 출근한 이후 선생님 글 쓰시는 모습 한 번도 못 봤어요. 항상 멍하니 앉아만 계시다 결국 제가 쓴 거 들춰 보시는 게 다였어요.”
“그거야, 지금 급한 건 이거니까-.”
“네, 결국 저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선생님을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라 생각해요. 그러니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건강하세요.”
결국 민정은 자기 할 말만 다 하고는 몇 가지 되지 않는 짐을 챙겨 달아나 버렸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그래, 너 아니면 유령 작가 못 구하겠냐고 생각했지만 없었다. 이렇게 딱 마음에 드는 사람은.
처음 정 대표한테 공모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귀찮다며 질색을 했다. 하지만 정 대표의 한마디가 결국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였다.
“고 작가 요즘 슬럼프잖아. 혹시 알아? 신인 작가들 통통 튀는 글 보다 보면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을지. 자기 원래 질투가 심한 여자였잖아. 이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온 거 아냐?”
그렇게 심사를 하는 동안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 민정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하며 입에 착착 붙는 대사가 꼭 그녀 스타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팬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여기까지 와 버렸는데 신기루처럼 눈앞에서 그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
“시연아, 시연아!”
명희는 보조 작가 시연을 불렀다.
“아무래도 박민정 걔 뭔가 이상해. 걔가 지금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나한테 보고 해.”
“지금 저보고 민정이 미행이라도 하란 말씀이세요?”
“잔말 말고 얼른! 네 앞날이 달린 일이야.”
입이 잔뜩 나온 시연은 명희의 닦달에 더는 뭐라 말도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민정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조차 제대로 맞추기 어려운 작가님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자신이 뭘 두려워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민정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말씀하신 대로 잘 끝내고 왔어요.”
[잘하셨습니다. 근데 결심은 하셨어요?]
“네. 집으로 돌아가면 제 작품 바로 카페에 올릴 생각이에요.”
[네, 아깝다 생각 마시고 그렇게 하시는 게 좋아요. 고명희 쪽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모르니까 이게 작가님 작품이라는 증거를 남기는 게 좋아요. 힘들게 만든 자식 남한테 뺏길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통화를 하며 민정은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