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6화 (6/250)
  • #06.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3)

    이름 이은석.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재혼, 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할머니 사망 뒤 보육원행.

    여기까지는 이전 삶과 똑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이은석은 다른 사람이었다. 경우가 알고 있는 이전의 이은석과 지금의 이은석은 달랐다.

    경우는 어릴 때 아버지가 경찰이었지만 결혼 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때 경찰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하긴 했었다.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어서.

    하지만 어릴 때 꿈이 자주 바뀌듯 경찰의 꿈은 오래 전 잊어버렸다. 어쩌면 지금의 이은석과 과거의 자신은 그때 갈라진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평행 세계라도 되는 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긴, 죽었다가 다른 사람으로 깨어난 것도 신기한 일인데 이런 것쯤이야.

    경우는 강철이 조사해 온 이은석에 대한 자료를 덮었다. 자신이 알던 이은석이었다면 모를까 다른 길을 선택하고 나아가는 그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의 삶은 그의 것이었으니.

    “근데 그 사람은 뭐 하려고? 혹시 전생의 원수, 뭐 그런 거냐? 린치라도 하게?”

    “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이전의 나는 잊어라. 앞으로의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테니까.”

    “그거야 뭐,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대답은 하면서도 시선은 줄곧 집 안을 살펴보고 있는 강철이었다. 독립을 했으니 집 구경이야 당연한 거지만 너무 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피고 있었다.

    누가 보면 강철이 집주인인 듯.

    “야, 너 근데 스케일 소박해졌다?”

    “뭐가?”

    “천하의 민경우가 50평짜리 오피스텔이 말이 돼?”

    “혼자 쓰는데 이만하면 됐지.”

    “이야, 민경우. 앞뒤 안 가리는 막무가내인 줄 알았더니, 확실히 느네 꼰대가 무섭긴 무서워.”

    “회장님한테 꼰대가 뭐냐, 꼰대가.”

    경우가 눈을 흘기자 강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해도 민경우의 가족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한집에서 부대끼고 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서슬 퍼런 아버지의 밑에서 벗어나고자 진작 경우 몫으로 두었던 오피스텔도 있었으니 이참에 아예 독립해 버렸다.

    민 회장이 별다른 꼬투리를 잡지 않고 넘어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늘 반지하나 다세대 주택의 옥탑방, 것도 아니면 원룸을 전전했다. 그러니 이만하면 대궐이 따로 없지.

    “참, 그리고 너 다음 주부터 새명유통으로 출근해.”

    “뭐? 설마 지선 누님 밑에서 일하는 거야? 내가 왜?”

    “나 지금 누나한테 개 목걸이 걸렸거든. 근데 누나도 매일 나 보는 거 거북할 거야. 그러니 나 대신 널 볼모를 잡겠다는 거겠지.”

    “야, 내가 무슨 꿩 대신 닭이냐?”

    “닭보다는 참새 정도? 걱정 마. 어차피 박 실장님께 보고하지 누나를 직접 만나는 건 아닐 테니까.”

    “그게 더 걱정이다. 그 박 실장님 가끔 만나지만 눈빛이 아휴.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그러는 거 보면 이유가 있는 거라니까.”

    “남의 사생활에 관심 끄고 잘해 봐. 우리 누나 능력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또 혹시 아냐? 네가 발군의 능력을 발휘해 박 실장님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을지.”

    “됐네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빡세게 나는 못 살겠다. 애초에 새명 들어온 것도 너 비서라고 해서 들어온 거지. 아니었으면 새명, 거들떠도 안 봤어.”

    “저런 걸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싼다고 하지. 며칠 전만 해도 잘릴까 봐 벌벌 떨던 주제에. 야, 너 우리 회사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

    “그래, 잘났다 이 오너 일가 놈아. 근데 너 은근히 말투가 이상해졌어. 병원에서 약을 잘못 맞았냐? 웬 요강? 그런 건 할머니들이 잘 쓰는 표현 아니냐?”

    강철의 지적에 경우는 내심 뜨끔했다.

    할머니의 말동무를 해 주던 버릇이 남아 있던 데다가, 해장국집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으니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들의 말투가 자신도 모르는 새 밴 탓이었다.

    “내가 뭐 어쨌다고. 흠흠, 됐고. 누나한테 책 잡힐 일만 하지 마. 그냥 누나 피해 다녀. 알았어?”

    “그런 거라면 내가 또 일가견이 있지. 근데…… 넌 이제 어쩔 셈이야?”

    “뭐가?”

    “첫날부터 땡땡이에 제대로 일한 적은 없어도 어쨌든 새명건설 신입 사원이잖아.”

    “네 말마따나 낙하산, 일도 제대로 안 하는데 오너 일가라고 내 눈치만 볼 거 아냐. 그럴 바에야 아예 출근하지 않는 게 낫지. 뭐 어쨌든 걱정하진 마. 나도 따로 생각한 게 있거든.”

    “네가 생각이란 걸 한다는 게 어째 겁난다?”

    “야, 나도 사람이야. 하고 싶은 일도 있고 꿈도 있어.”

    “꿈? 네가? 뭔데? 죽을 때까지 놀고 먹는 거?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는 거 아니냐?”

    “아니거든. 나 작가 할 거다. 드라마 작가.”

    “뭐?”

    일그러진 강철의 얼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칫!

    애써 모른 척하던 경우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건?”

    경우의 말에 표정이 달라진 강철이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야, 너 뭘 알고 있었던 거지? 그치?”

    “뭐가?”

    “내일 프로덕션 공모전. 네가 말한 대로 이상한 게 있더라.”

    “어떻게?”

    “심사위원 중에 고명희라고…… 아, 드라마 작간데 거기 소속이거든.”

    “알아. 드라마 작가가 꿈인데 것도 모르겠냐.”

    “하! 뭐 얘기는 빠르겠네. 어쨌건 그 고명희가 내일 프로덕션 대표하고 친밀한 사이라 하더라고.”

    “뭐?”

    “놀라기는. 너도 생각해 봐. 사실 고명희가 엄청 대박 작가는 아니잖아. 심사위원을 할 만큼 글빨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근데 거기 대표가 고명희랑 친분이 두터워서 심사위원으로 밀어 넣었다나 봐. 그래도 명색이 다수 집필한 작가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근데…….”

    “근데?”

    “다른 심사위원이 만장일치로 뽑은 작품 하나를 의도적으로 탈락시켰다고 하더라고.”

    “그걸 대표가 들어줬다는 거네?”

    “그러니까 친밀한 사이였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 다른 심사위원들 반발도 있었던 모양인데-.”

    “어차피 제작사에서 하는 공모전, 제작 가능한 작품을 뽑는다는 명분을 내세웠겠지. 소속 작가니까 누구보다 고명희가 피력했을 거고.”

    “거기까지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냥 예상을 해 본 거야. 고명희가 요즘 슬럼프라 글을 못 쓴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그럼 그 소문도 알고 있어? 아예 처음부터 고명희가 쓴 건 없고 다 다른 사람이 쓴 거 훔쳐다 제 것인 것처럼 했다는 말도 있어.”

    “설마 그렇게까지야.”

    “나도 그건 좀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너도 슬럼프였다는 걸 아는 걸 보니까 가설 하나가 세워지네.”

    “뭔데?”

    “자기를 대신할 대필 작가를 뽑기 위해 심사위원이 된 건 아닐까 하는 거지. 그 공모전의 취지가 그랬다나 봐. 우리는 작품을 뽑는 게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재를 뽑는다.”

    단순한 가설이기만 한 걸까?

    돌이켜 보니 경우는 당시 그 바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어렸기도 했고 공모전이 당선되기만 한다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쨌건 당한 건 그대로 갚아 줘야 한다는 생각이 경우의 머릿속을 뒤덮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탈락됐다는 그 사람 누군지 알아?”

    “내가 누구냐? 시킨 일은 칼같이 해결한다 이거야.”

    강철이 건넨 파일엔 탈락되었다는 작가의 이력과 이번 공모전에 냈다는 작품까지 들어 있었다.

    “입수하느라 고생 좀 했다. 유출되면 안 된다고 꽤 관리를 한 모양이더라.”

    “근데 너는 어떻게 했냐?”

    “크흠. 영업 기밀이니까 묻지 마.”

    하여간 은근히 재주 좋은 놈.

    이번에 희생양이 된 박민정의 이력을 살펴보던 경우는 생각했다.

    이은석이 드라마 작가가 아닌 경찰을 택하면서 변수가 발생했지만 큰 틀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고명희는 이은석을 대신 박민정을 착취할 게 분명했다.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내 표정이 어떤데?”

    “소싯적 애들 괴롭히려고 머리 짤 때 딱 그 얼굴이야. 야, 제발 부탁인데 사고는 치지 말자.”

    “내가 무슨 사고만 쳤다고. 크흠.”

    그동안의 민경우가 저질러 왔던 수많은 비행들이 떠오른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정의 구현이라고 해두자. 비리의 현장을 찾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언제부터 정의 구현을 했다고.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다.”

    “은근히보면 할 말 못 할 말 막 한다. 네가 아직 세상 무서운 맛을 모르는 거지?”

    “아닙니다. 뭐부터 시작할까요, 도련님?”

    강철의 넉살에 경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우선 아군 포섭. 이 사람한테 연락해 봐. 내가 만나자고 한다고.”

    경우는 박민정의 조사 서류를 흔들었다.

    * * *

    드라마 판에서 10년을 굴러다녔지만 이름조차 숨겨진 비운의 작가 이은석.

    하지만 민경우는 드라마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정석대로 가자고 결심했고 선택한 것이 드라마 아카데미였다.

    1년에 두 차례, 아카데미에선 드라마를 쓰고 싶어하는 교육생들을 뽑았다. 신청을 하면 무조건 등록할 수 있는 여느 사교육과 달리 드라마 아카데미는 특이하게 면접이 존재했다.

    열 중 아홉이 붙을 만큼 경쟁률도 심하진 않았지만 재수 없으면 떨어지는 1인에 포함될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었다.

    신청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온 길.

    이전 삶에선 아카데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남들처럼 형편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고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독학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첫 면접 탓인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우는 긴장 탓에 입안이 바짝 마르고 초조해졌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데 거의 대부분이 여자. 남자 작가들도 많아지는 추세였지만 드라마 쪽은 아무래도 여자 작가들이 압도적이었다.

    여자들 중 몇 안 되는 남자를 살펴보던 경우는 어쩐지 그중 한 사람의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아!

    기억을 떠올린 경우는 너무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MBS 드라마국 PD 안청모였다.

    감각적인 연출로 평범한 대본도 웰메이드 드라마로 만들어 놓는 능력자가 왜 여기에?

    어쩌면 이것도 인연이고 기회인데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경우가 슬며시 그의 옆으로 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여자들밖에 없어서 더 긴장되는 것 같아요.”

    “저도요…….”

    하얗게 뜬 얼굴에 정말 긴장했는지 손을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경우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손에 잡힌 건 박하사탕.

    해장국집에서 일하던 시절 손님들 먹으라고 둔 박하사탕을 먹어 버릇해서 경우는 지금도 가끔 박하사탕을 먹곤 했다.

    ‘없는 것보단 낫겠지.’

    힐끔 안청모를 본 경우가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하나 드실래요?”

    “고맙습니다. 저 박하사탕 좋아하는데.”

    사탕을 입에 쏙 넣은 그가 살짝 미소 지었다.

    “여기 남자도 별로 없는 거 같은데 형하고 저 꼭 붙었으면 좋겠네요. 참, 형이라고 해도 되죠?”

    “그럼요.”

    “에이, 그럼 말씀 놓으세요. 저, 보기보다 겉늙어서 들어 보이는 거뿐이지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아요.”

    “그럼 그럴까? 난 안청모라고 해.”

    “민경웁니다.”

    그러고 보니 안청모가 유명해지고 난 후 알려진 이야기가 있었다.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아카데미까지 다녔다는 일화였다.

    세상엔 자신의 일에 많은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저기, 형. 괜찮으시면 저 여기 떨어지더라도 형이 제 대본 한 번만 봐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네.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여기 보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여자라 좀 어려워서……. 누가 봐 줘야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은데 봐 달라고 할 사람이 없어서요.”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특히 드라마밖에 모르는 안청모 같은 사람에겐.

    그의 영상미를 좋아하는 이들이 팬 카페까지 만들고 영화 좀 찍어 달라고 성화였지만 그는 끝까지 드라마만을 고집했다.

    “좋아. 내가 쓰는 건 잘 못해도 봐주는 건 잘할 수 있어. 봐줄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경우는 안청모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밑밥을 던지기 위한 포석이었음을 안청모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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