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5화 (5/250)
  • #05.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 (2)

    점심시간이라 식당 안은 근처에서 일하는 직장인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자리가 없는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은 강철이 경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야, 다른 데 가자. 근처에 해장국집 많구만.”

    “줄 서 있는 거 보면 모르겠냐? 여기가 진국이야. 다른 덴 여기가 장사가 잘되니까 따라서 생긴 데라고. 가 봐야 맛도 없고 괜히 갔다 싶을걸.”

    연명할 정도로만 먹고, 먹는 일 자체엔 큰 흥미가 없던 경우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강철은 조금 의아했다.

    먼저 맛집 운운하는 것도 놀랄 일인데 이렇게 기다리기까지 하는 걸 보니 해가 서쪽에서 뜬 게 아닌가 싶었다.

    얼마나 맛있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우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강철의 마음속에 은근히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의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안으로 들어온 강철은 자리에 앉자마자 나온 속도에 한 번, 생각보다 끝내주는 맛에 또 한 번 놀랐다.

    “우와, 진짜 국물이 진하네.”

    “여기 사장님이 밤새도록 불 조절해서 육수를 만들어 내거든. 공장에서 사다 쓰는 그런 집하곤 깊이가 달라.”

    “근데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크흠, 뭐, 어쩌다 들었어.”

    말해 뭐 해.

    여기서 일한 시간만 몇 년인데…….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던 은석에게 이 식당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낡았지만 반질반질 윤기 나는 테이블 하나하나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브레이크 타임엔 저쪽에 앉아 세팅 준비를 하며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들었고 가끔 김 군이 으쌰으쌰해 고스톱을 치다 돈만 잃었던 일이 모두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곳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이었고 집이었다.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해장국을 한입 떠먹는 순간, 마음 속에 난 구멍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의 기억 속과 똑같은 이곳의 모습에 경우는 은석으로 살았던 힘겨웠던 시간들이 하룻밤의 꿈이 아닌 그가 직접 겪었던 일임을 실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살아 계신 사장님의 모습을 보니 경우는 마음이 뭉클했다.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지만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입학금을 내주셨고 그 이후로도 은석이 일하기 편한 시간으로 봐주셨던 사장님.

    사장님은 은석에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대신해 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런 사장님의 부고를 들었음에도 찾아뵙지 못했다.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을 때라 하루에도 몇 번 씩 수정된 대본 탓에 쪽대본이 나가기 일쑤였다. 아예 고명희의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터라 언감생심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밤을 새워 대본을 다 쓰고 잠시라도 장례식에 다녀오겠다고 했을 때 고명희가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에 박혀 있었다.

    ‘전에 일하던 식당 사장님이라며. 어차피 가족도 아닌데 거길 왜 가니? 지금 너한테 중요한 건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드라마를 봐 줄 시청자들이야.’

    ‘저한테는 누구보다 고마우신 분이에요.’

    ‘그럼 드라마 끝나고 가 보면 되겠네. 어차피 돌아가셨는데 네가 오는 지 안 오는지 어떻게 아니? 지금 가나 나중에 가나 상관 없잖아.’

    그때 다 때려치우고 나왔어야 했는데.

    옛날 생각에 화가 난 경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괜히 열 받을 필요 없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도 마지막에 보았을 때보다 사장님 많이 젊어지셨네.’

    밤새 불 조절하느라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장님의 모습을 보던 경우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던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번엔 그가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네, 정말 맛있었어요.”

    “저희 식당엔 처음 오시는 분 같은데.”

    “맞아요. 소문 듣고 찾아왔어요.”

    강철을 먼저 보내고 사장님과 친분도 쌓을 겸 말을 이어 가던 경우는 정말 그가 궁금해했던 걸 묻기로 했다.

    “저기, 여기 일하는 분 중에 이은석이라고 있지 않았나요?”

    “은석이? 아, 이 군 찾아오셨어?”

    사장님의 입에서 은석이란 이름을 듣는 경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너무 이상했다.

    처음 민경우로 다시 깨어났다는 걸 알았을 때 원래 민경우는 어디로 간 것인가 하는 걱정과 동시에 자신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만약 자신처럼 다른 누군가가 이은석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혹시나 원래의 민경우와 자신이 뒤바뀐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래서 경우는 직접 자신의 확인해 보기로 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 군, 어제 그만뒀어요. 새 직장을 얻었거든. 여기보다 좋은 곳으로 갔다오. 친구요? 연락이라도 해 보고 오지 그랬어?”

    “아닙니다. 해장국 맛이 좋다고 해서 먹어 보려고 일부러 온 겁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참, 혹시 이 군 집 알면 집으로 찾아가 봐요. 아직 그 집에 살고 있으니.”

    “네, 감사합니다.”

    식당을 나온 경우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은석이 살던 집으로 향해 서둘렀다.

    생각해 보니 지금이 딱 고명희에게서 연락이 왔던 그때였다. 이러다 과거 자신처럼 은석이 호구로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호구 짓은 한 번으로 족했다.

    * * *

    탕탕탕탕.

    경우는 앞뒤 생각 없이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택배라고 생각했는지 누군지 묻지도 않은 채 곧바로 문이 열렸다. 서서히 열린 문틈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얼핏 보이자 경우는 너무 놀라 해야 할 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누구시죠?”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이은석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의 사람이었다. 경우는 순간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그가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이은석의 집이 분명했다.

    “저, 저기 이은석 씨…….”

    “어? 전데요? 어떻게 오신 거죠?”

    자신이 이은석이라는 말에 경우는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경우는 고명희에게 가지 전에 일을 해치우기 위해 빙빙 돌리지 않기로 했다.

    “저기 고명희 선생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누구요? 고명희? 그 사람이 누군데요?”

    “예? 다음 주부터 고명희 작가님 보조 작가로 일하기로 하신 거…… 아니신가요?”

    그러자 이은석이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며 물었다.

    “제가 이은석이 맞긴 한데…… 근데 고명희는 처음 들어 보는데요. 누굽니까?”

    “아, 그러……세요? 제, 제가 잘못 알았던 모양이에요.”

    “그래요? 참 이상하네요. 이 주소에 이은석이 저 말고 또 있는 것도 아닐 텐데요.”

    이놈 뭐지?

    생긴 건 무던하구만, 예리한 모습에 경우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예전에 내가 이은석이었고 이곳에 살았다는 말도 할 수 없었던 경우는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잘못 알았습니다. 이은석이 아니라 이은섭이었는데 죄송합니다. 주소도 여기가 아니라 옆 동네였는데 제가 착각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요?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을 수 있나?”

    “그럼요.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우연이 반복되다 보면 뭐 필연이…… 이건 아닌가? 아무튼 죄송합니다.”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누군가 저를 사칭하고 다니는 거라면 연락 주세요.”

    싱긋 웃은 이은석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저 경찰이거든요.”

    “아, 네.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경우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하던 그의 앞으로 차가 쓱 다가와 섰다. 창문이 열리고 강철이 얼굴을 내밀었다.

    “일은 다 끝났어?”

    가 볼 데가 있다고 먼저 가라고 했는데도 기어이 따라붙었다.

    그냥 놔뒀다가 또 사고 치면 뒷감당 할 자신이 없었을 거라며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자리에 올라탄 경우는 어쩐지 기운이 쑥 빠지는 것 같았다.

    “여긴 누구 집이야? 너 여자 숨겨 놨냐?”

    “아니거든.”

    “아니기는.”

    “야, 강철이. 사람 뒷조사 아직도 할 수 있지?”

    “뭐?”

    놀란 강철이 몸을 완전히 뒤로 돌려 물었다.

    “난 못 해. 아니, 안 해. 또 무슨 작당을 하려고.”

    “그런 거 아냐, 임마. 그냥, 내가 예전에 알던 사람이 맞나 확인하려고 그런다.”

    “왜? 피의 복수라도 하려고? 철천지원수라도 돼?”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냥 좀 알아봐 주면 안 돼?”

    경우의 기세에 강철이 움찔하며 답했다.

    “알았어. 알아다 주면 되잖아. 누구?”

    “아까 내가 들어갔다 나온 집에 이은석이라고 살거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과거엔 어땠는지 경찰이라니까 지금은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그런 거 전부.”

    “알았어. 그거면 됐어?”

    “한 가지 더. 이번에 내일 프로덕션에서 아마 드라마 공모전을 했을 거야. 최종심까지 올라간 사람 명단하고 심사위원 명단, 그리고 뭐 이상한 일은 없었는지 알아봐 줘.”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강철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지 경우는 눈을 감았다. 잠이 스르르 쏟아졌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이 새벽에 어쩐 일이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은석의 모습에 사장은 괜히 좋으면서도 툴툴거렸다.

    “식당에 밥 먹으러 왔지 놀러 왔겠어요?”

    “이렇게 일찍 오라고 하면서 밥도 안 줘?”

    “밥이야 주겠죠. 근데 첫 출근이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첫 출근인데 든든히 먹어야죠. 사장님 해장국 유명하잖아요. 앞길 탄탄하게 해 준다고요.”

    “하여간 나잇살 먹어서 능청만 늘었어. 동곡댁, 국밥 하나 말아 줘.”

    입에 발린 소리나 한다며 툴툴댔기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그의 마음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이런 좋은 사람을 만난 덕에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 생기는 거라 은석은 생각했다.

    어느새 보글보글 끓은 국밥을 직접 가지고 온 사장이 은석의 앞에 앉았다.

    “하던 대로만 해. 너 여기 처음 왔을 때처럼 하던 대로.”

    “그때 엄청 혼나고 그랬는데요.”

    “그거야 일 배우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어쨌든 나 죽었소 하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볕들 날이 오지 않겠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은 문득 은석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잘 웃지도 않고 눈치만 보던 어린 녀석이 어느덧 이렇게 장성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는 은석을 보며 그도 참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 무렵 무언가 떠올랐다.

    “참, 친구는 잘 만났어?”

    “친구요?”

    “못 만났어? 어제 여기 찾아왔는데?”

    “그래요? 뭐라고 했는데요?”

    “여기서 일하지 않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좋은 직장 잡아서 그만뒀다고 집은 그대로라고 했지. 이상하네. 급한 일 있어서 갔나?”

    은석은 사장의 말에 전날 자신을 찾아왔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자신이 잘못 안 거라며 둘러댔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실 이은석이란 이름이 흔한 이름이었다고 해도 잘못된 주소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산다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식당까지 찾아온 걸 보면 그가 찾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그는 잘못 알았다며 돌아가 버렸다.

    ‘뭐지? 꼭 뭔가 감추는 게 있는 것 같았는데…….’

    남자를 생각하던 은석은 혹시나 그와 자신이 알던 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얼굴이 낯이 익은 탓이었다. 어디서 꼭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처라도 받아 놓을걸 그랬다 싶으면서도 어쩐지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0